유통
대선제분 창업주 4대가 살던 장충동 저택, 스타벅스가 된 사연 [가봤어요]
- 샹들리에·계단·창살 보존 조건으로 임대
박선정 대표 “소유보다 함께 누리는 공간으로”
2024년 9월 문을 연 ‘스타벅스 장충라운지R점’은 대선제분 창업주 일가가 4대에 걸쳐 생활했던 공간이다. 최근 현장에서 만난 박 대표는 어린 시절 뛰어놀던 정원부터 가족들이 손님을 맞았던 응접실까지 건물 곳곳을 직접 안내했다.
박 대표는 이곳을 단순히 소유한 부동산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할 공간으로 바라봤다. 그는 “아버지는 이곳에 직접 거주하는 방식으로 집을 지키셨지만 저는 대중에게 개방하는 방식으로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60년 전 샹들리에 그대로…보존이 임대 조건
저택은 1966년 6월 1일 완공됐다. 설계자는 한국 1세대 건축가 나상진이다. 박 대표는 2018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건물 활용 방안을 고민하며 여러 건축가를 만났고, 그 과정에서 저택에 담긴 건축적 가치와 설계 의도를 새롭게 알게 됐다고 했다.
건물 한편에는 나상진 건축가가 그린 설계도 사본도 전시돼 있다. 박 대표가 보관 중인 원본 도면에는 한국식 난방 공간을 뜻하는 ‘ONDOL’(온돌)이 영어 발음 그대로 적혀 있다. 당시 건축 양식과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는 흔적이다.
정원에도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수령 100년이 넘는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와 60년 이상 된 향나무가 대표적이다. 둥글게 다듬어진 향나무는 지금도 정기적으로 가지를 손질한다. 박 대표 역시 주말이면 이곳을 찾아 정원을 살핀다.
물론 모든 공간을 과거 모습 그대로 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연못이 있던 자리에 분수대를 설치하고, 인접한 주택 부지를 확보해 정원을 넓혔다. 상업시설로 활용하기 위해 화장실과 휠체어 접근 동선도 새롭게 마련했다.
다만 기존 목재와 석재, 계단, 샹들리에 등 건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요소는 최대한 보존했다. 박 대표는 이를 스타벅스와의 임대 조건으로 내걸었다. 스타벅스가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4대가 살던 집에 스타벅스가 들어온 이유
이후 박 대표가 선택한 것은 커피 전문점이었다. 개인 카페보다 더 많은 사람이 방문할 수 있고, 오래된 저택의 분위기와 커피가 어울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직접 스타벅스에 입점을 제안했다.
장충라운지R점은 스타벅스가 국내 리저브 도입 10주년을 맞아 선보인 10번째 리저브 매장이다. 과거 가족들이 생활하던 방과 손님을 맞던 응접실은 고객 좌석으로 바뀌었다. 각 공간은 저택의 기존 구조를 살리면서 서로 다른 분위기로 꾸몄다.
일반 스타벅스 매장과 달리 주류를 판매하고, 커피 추출을 위한 전용 장비도 갖췄다. 한때 가족들이 손님을 맞았던 공간에서는 이제 북콘서트와 신제품 발표 행사 등이 열린다.
박 대표가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도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정원과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해외 방문객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매장을 찾아온다고 했다. 국내에서도 오래된 건축물을 둘러보려는 중장년층부터 사진을 찍으러 오는 젊은 층, 가족 단위 손님까지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박 대표가 특히 기억하는 방문객은 어린아이들이다. 정원에서 흙을 만지고 나비를 쫓거나 분수대의 물소리를 들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 자신이 뛰어놀던 공간에서 이제 다른 아이들이 새로운 추억을 쌓고 있는 셈이다.
과거 이 집에 드나들던 가족의 지인들이 찾아와 학창 시절을 떠올리는 일도 있다. 주변의 옛집들이 하나둘 사라진 뒤에도 이 저택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저택을 개방한 이유를 ‘소유’보다 ‘공유’에서 찾았다. 가족의 추억이 담긴 공간을 자신만 누리기보다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공간을 저 혼자 소유하고 향유하기보다 많은 분이 함께 누리고 추억을 쌓는 장소가 됐으면 했다”며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누군가에게 오래 기억되고, 또 다른 세대에게도 새로운 경험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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