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 위의 신사들] “은행원이 돈 안 훔쳤다고 칭찬받나?” - 보비 존스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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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 위의 신사들] “은행원이 돈 안 훔쳤다고 칭찬받나?” - 보비 존스

[필드 위의 신사들] “은행원이 돈 안 훔쳤다고 칭찬받나?” - 보비 존스

아놀드 파머, 12타 만에 온그린하고도 웃음... 스코어 카드 잘못돼 우승 놓쳤는데 자신을 탓한 비센조
▎자화상 앞에 서 있는 보비 존스.

▎자화상 앞에 서 있는 보비 존스.

골프 대회에서 스타들이 보여주는 멋진 샷만큼이나 그들의 훌륭한 매너는 아마추어 골퍼들에게 귀감이 된다. 골프 역사에서 돋보인 젠틀맨 프로골퍼 7명을 선정해 보았다. 역사에 남는 전설적인 골퍼들은 실력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본받을 만했다.
 진정한 프로 월터 하겐의 낭만
▎월터 하겐.

▎월터 하겐.

“서두르지 말고 걱정하지도 마라. 그리고 길가에 핀 장미꽃 향기를 놓치지 말라.” 시 구절을 연상시키는 멋진 말을 남긴 월터 하겐(1892년 12월21일~1969년 10월 6일)은 골프 역사상 가장 쇼맨십이 강했던 골퍼다. 준수한 얼굴에 머릿기름을 좌르르 바른 올백 머리 스타일에 패션모델처럼 옷을 잘 챙겨 입고 시합에 나가 매 경기마다 주목을 받았다. 1914년 US오픈에서 첫 우승을 하면서 승승장구한 그는 골프가 미국에 보급·확산되면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1919년 최대 메이저 대회인 US오픈에서 우승을 추가했을 뿐 아니라 1920년대에는 PGA챔피언십 4연패를 포함해 5승, 디(브리티시)오픈 4승까지 총 11개의 메이저 우승을 거둔 당대 최고의 프로였다.

자동차 정비공의 아들로 태어난 하겐은 10살부터 로체스터CC에서 캐디를 하면서 골프를 시작했다. 13살 때 학교를 그만둔 뒤로 자동차 정비공, 피아노 조율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돈을 잘 번다는 말에 골프 선수가 됐다. 당시 미국에서 골프는 한창 성장하는 스포츠였다. 하겐은 골프를 막 배우기 시작한 미국 신흥 부유층 사이에 화제의 인물이었다. 언변이 뛰어났고 옷을 항상 세련되게 차려입고 대회에 출전했다. 1924년 영국 호이레이크에서 열린 디오픈에서 우승하고는 갤러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내와 진한 키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당대의 라이벌이던 보비 존스가 귀족적인 아마추어리즘을 대변한다면, 월터 하겐은 서민으로 태어나 프로 골퍼가 되는 자수성가형 성공 유형을 만들었다. 존스는 하겐의 경기를 다음처럼 회고했다. “항상 씩씩했고, 웃으면서 경기를 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운이 없다거나 투덜대지 않았다.”
 그랜드 슬래머 보비 존스의 정직
평생 아마추어 골퍼로 살았지만 골프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골퍼는 보비 존스(1902년 3월 17일~1971년 12월 18일)이다. 그는 1930년 28세 나이에 4대 메이저를 모두 우승하는 그랜드슬램을 유일무이하게 달성했다. 골프 역사상 누구도 달성 못 한 위업을 이룬 뒤, 프로로 전향하지 않고 최정상에서 홀연히 은퇴했기에 존스는 골프 아마추어리즘의 전설이 됐다.

존스가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자 누구나 프로로 전향해 엄청난 돈을 벌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관심 받는 것이 불편했다. 갤러리가 몰리면 코스에서 담배를 꺼내들어 긴장을 떨치려 애썼고, 경기 중에는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한 달 뒤 존스는 결국 “더 이상 게임을 즐길 수 없다”고 고백한 뒤 현역 골프계를 은퇴했다. 정상에 오른 뒤에는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현명하다. 박수칠 때 떠날 줄 아는 이의 뒷모습이 멋있다.

오늘날 존스는 선수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마스터스 개최지인 오거스타내셔널을 만들었다. 존스의 정직한 인간성을 알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1925년 US오픈 11번 홀. 세컨드 샷이 그린 왼쪽 러프에 떨어졌다. 존스가 어드레스를 할 때 볼이 약간 움직인 것 같았다. 경기위원도 갤러리도 그 장면을 못 봤지만 존스는 “볼이 움직였다”고 자진 신고했고, 그래서 벌타를 받았다. 결국 경쟁자와 동타가 됐고, 플레이오프에서 지면서 트로피를 놓치고 만다. 주변에서 우승컵을 놓친 것을 위로하자 존스는 오히려 정색하며 이렇게 답했다. “은행원이 돈을 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칭찬받을 수야 없지 않은가.”
 한 해 18승 바이런 넬슨의 성실함
▎바이런 넬슨.

▎바이런 넬슨.

‘한 해 18승에 11연승’이란 골프사의 대기록을 세운 바이런 넬슨(1912년 2월 4일~2006년 9월 26일)은 80세가 넘는 고령에도 필드를 찾았으며, 그의 이름을 딴 스윙 로봇이 만들어질 정도로 이상적인 스윙 폼을 가진 존경받은 신사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넬슨은 어린 시절 글렌가든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면서 골프를 배웠고, 15살에 캐디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골프 선수가 될 결심을 한다. 농장이 많은 텍사스에서 자란 그의 당시 꿈이란 ‘골프 대회에 나가 돈을 벌어 농장을 하나 마련하는 것’이었다.

넬슨의 전성기는 1944~45년이다. 세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달하던 44년엔 총 23번의 경기에서 13승을 거뒀다. 45년 총 30번 열린 경기에서 PGA챔피언십 우승을 포함해 18승에 11연승을 거뒀다. 그해 평균 타수는 68.34타(타이거 우즈가 2000년에 깨기 전까지는 역대 최소타)였다. 자만심을 가질 만 하지만 넬슨은 이렇게 말했다. “저를 위대한 골퍼로 기억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성실하고 또 신뢰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기억해주는 게 더 기쁩니다.”

정상이란 혼자 지키기엔 너무 외로운 자리일지 모른다. 아니면 신사였던 그가 더 오를 곳 없는 정상에서 후진들을 위해 양보한 것인지도 모른다. 넬슨은 이듬해인 46년,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하고는 어릴 적 꿈이던 농장 만들기에 들어갔다. 나중에 가끔 골프 대회에서 TV해설가로 등장했다. ‘철(鐵)의 바이런’, ‘그린의 신사’ 등의 별명이 그의 성품을 말해준다.
 불굴의 의지 벤 호건의 재기
▎벤 호건.

▎벤 호건.

‘싸움닭’ ‘불굴의 아이스맨’이란 별명의 벤 호건(1912년 8월 13일~1997년 7월 25일)은 1950년대 미국 골프의 아이콘이었다.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그 별명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었던 인생에서 나왔다. 프로로 첫 승을 올린 것은 데뷔 7년째인 31년이었으니 초기엔 돋보이는 선수가 아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46년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다. 48년은 전성기였다. US오픈, PGA챔피언십, 웨스턴오픈을 연달아 우승하면서 절정기를 보냈다.

하지만 이듬해인 49년 2월 2일 수요일 모든 게 달라졌다. 아내 발레리와 텍사스 페코스의 동쪽을 드라이브하다가 희미한 안개 속에서 달려나오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와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낸다(이 사고로 인해 완전히 찌그러진 차량이 골프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전신의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고 몇 번의 수술이 반복되었다. 선수로의 재기는 어림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호건은 초인적인 의지로 재활에 나섰다. 걷는 법을 다시 배웠고, 모터 스쿠터를 타고서 코스로 나와 다시 샷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동차 사고 후 1년이 안된 50년 1월 로스앤젤레스의 리비에라CC에서 열린 첫 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붕대를 감고 골프 대회에 출전했다. 안쓰럽게 쳐다보는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게임을 묵묵히 이어나갔다. 그러더니 결국 그해 오크몬트에서 열린 US오픈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후로도 호건은 초인적인 의지로 여러 대회에 출전했고 59년까지 메이저 9승에 미국 PGA투어 통산 59승을 거뒀다. 신체적인 핸디캡을 딛고 대회에 나와 최선을 다하는 호건의 모습에서 미국인들은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 오늘날 미국 PGA투어는 부상이나 장애를 극복하고 재기한 선수에게는 매년 벤호건 상을 수여한다.
 로베르토 디 비센조의 품위
▎로베르토 디 비센조.

▎로베르토 디 비센조.

자신이 범하지 않은 잘못과 사고에 대처하는 방식이 사람의 품격을 결정한다. 아르헨티나의 살아있는 전설인 로베르토 디 비센조(1923년 4월 14일~)는 최악의 상황에서 의연했던 진정한 스포츠맨이다. 1968년 메이저인 마스터스에 출전한 비센조는 마침 대회 마지막 라운드 날이 자신의 45세 생일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홀에서 보기를 범했지만 65타라는 월등한 스코어를 기록하면서 공동 선두가 되어 플레이오프에 나가게 될 상황이었다.

같은 조에서 라운드했던 토미 아론이 비센조의 마커(기록자)가 되어 그의 스코어 카드를 적었다. 그는 대충 훑어보고는 사인을 하고 본부석에 제출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파317번 홀에서 비센조가 기록한 3타 대신 한 타가 많은 숫자 4가 적혀 있었다. 골프규정에 따르면 자신이 친 타수보다 많이 적힌 타수를 적어 내면 그대로 적용되며, 만약 그보다 적은 타수를 적어내면 실격 처리된다. 비센조는 아마도 플레이오프에 나간다는 생각에 침착함을 잃었을 수 있다. 하지만 잠시 후 경기위원이 그에게 다가와 타수가 66타여서 밥 골비가 한 타 차로 챔피언에 올랐다는 최종 결과를 전했다.

그 순간 20세기 골프사에서 역사에 남을 명언이 나왔다.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비센조는 울분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말했다. “여기서 틀리다니 이런 바보가 또 있나요!” 자신의 타수를 잘못 적은 토미 아론이 원수 같았을 테고, 한 번 더 물어보지 않은 경기 기록원이 미웠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는 자세에 모든 이들이 감명받았다. 대회가 끝난 뒤 동정 여론이 일었다. 오거스타내셔널은 역대 우승자들이 새겨진 순은 담배 케이스를 그에게 선물로 보냈으며 비센조의 친구들은 마스터스 우승자들이 대대로 입던 그린재킷을 비슷하게 만들어 그를 위로했다. 2년 뒤인 70년에 그는 골프계에 공헌한 기여를 인정받아 윌리엄 D. 리처드슨상까지 받았다.
 왕으로 불린 아놀드 파머의 인간미
▎아놀드 파머.

▎아놀드 파머.

오늘날 골프의 인기와 스타가 주는 재미를 만들어낸 대표적인 선수는 ‘킹’으로 불린 아놀드 파머(1929년 9월 10일~2016년 9월 25일)다. 그는 호쾌한 골프 스타일로 TV중계에서 팬들의 관심을 이끌어낸 주인공이다. 파머의 경기를 보려고 몰리는 구름 같은 갤러리를 그의 애칭을 본뜬 ‘아니의 군대(Arnie's army)’라 부를 정도였다.

파머는 팬을 몰고 다니는 스타였다. 1961년에 대서양을 건너 디오픈에 참가하자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던 이 대회가 활력을 찾으면서 메이저의 권위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는 선수생활 동안 마스터스 4승을 포함해 메이저 7승, PGA투어 통산 62승을 거뒀다. 잘 생긴 데다 항상 과감하게 도전하는 호쾌함이 팬들이 모이는 이유였다. 여기에 파머의 소박하고 쾌활한 인간성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란쵸파크GC 파5 9번 홀(464m) 티 박스 옆에는 동판으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1961년 1월 6일 금요일 35회 LA오픈 첫날 아놀드 파머는 이 홀에서 12타를 쳤다.’ 파머는 티 샷을 하고 다음 샷 지점으로 걸어갔다. 선두에 2타 뒤진 상황. 아니의 군대가 운집한 속에서 파머는 평이하게 레이업으로 스리온 하지 않고, 3번 우드를 꺼내 과감한 투온을 노렸다. 하지만 그 볼은 OB(아웃오브바운즈). 1벌타를 받고 다시 쳤으나 바람을 맞고 또 OB, 그리고 또 OB. 결국 10타 만에 그린에 볼을 올렸고 2퍼트로 홀아웃했다. 여느 사람 같으면 화를 내거나 두 번 다시 거들떠도 안 볼 텐데 파머는 웃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고 골프장은 그의 기록을 새겼다. “한 홀에 12타는 멋진 숫자다. 내가 남긴 이 숫자로 수많은 골퍼가 희망을 갖고 투지를 불태울 테니까.”
 메이저 18승 잭 니클라우스의 도전 정신
▎잭 니클라우스.

▎잭 니클라우스.

‘황금곰’ 잭 니클라우스(1940년 1월 21일~)는 메이저 역대 최다인 18승에 생애 총 73승을 거둔 현대 골프의 거장이다. 1950년 10세 때 골프를 시작해 19세 때 미국 아마추어선수권에서 우승하면서 주목받았다. 22세에 프로에 데뷔한 이래 1986년 46세까지 마스터스를 여섯 번 제패하는 등 무려 25년간 골프계의 지존으로 군림했다. AP통신은 ‘20세기 최고의 골퍼’로 니클라우스를 꼽았다.

그의 인생을 보면, 대기록은 힘들게 얻어졌다. 13세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그 후유증으로 선수생활 내내 관절 부상을 안고 살아야 했다. 63년에는 몇 주에 걸쳐 코티손 주사를 25차례나 맞았고 고관절 수술을 받기도 했다. 본인은 이렇게 회고한다. “골프 경력의 절정기 이전부터 골반에 문제가 있었다. 어떤 때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병과 싸웠고 나중에는 내 한계와 싸워야 했다.”

1998년 마스터스에 출전해 58세 나이로 6위를 하면서 톱 10에 든 역대 최고령 선수로 기록되자 니클라우스는 다음과 같은 어록을 남겼다. “나는 매일 한 시간 반을 체조와 등 운동을 한다. 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평생을 어떤 한계와 싸우며 산다. 60세에 이르렀다고 그 투쟁을 그만두어야 하나? 우리가 저지르는 최악의 선택은 포기다. 어느 날 아침에 지쳤다고 느낀다면 몸과 마음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굴복하면 그 즉시 늙어갈 뿐이다.” 77세의 니클라우스는 오늘도 열심히 무언가에 도전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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