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 한가위’ 11인의 시선 | 김국현-가족] 일가친척보다 가까운 ‘트친’ ‘페친’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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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 한가위’ 11인의 시선 | 김국현-가족] 일가친척보다 가까운 ‘트친’ ‘페친’

[‘코로나19 시대 한가위’ 11인의 시선 | 김국현-가족] 일가친척보다 가까운 ‘트친’ ‘페친’

정(情)은 함께 축하하고 슬퍼하는 일... 비대면이라도 ‘현실의 가족·친구’ 챙겨야

'소셜 디스턴싱(사회적 거리두기)’이라는 말은 좀 어색하다. 사실 사람들은 오히려 더 ‘소셜’해지고 있어서다. 거리를 두라고 할수록 소셜 네트워크, 소셜 미디어, SNS 등 소셜을 표방하는 얼개와 장치들은 우리에게 더 가까워졌다.

슬롯머신을 돌리듯 스마트폰을 끊임없이 스크롤 한다. 코인을 넣듯 엄지손가락으로 일상과 단상을 상납하면 그 기분을 해치지 않을 콘텐트를 알아서 ‘뽑기’할 수 있다. 그 중에는 실제 일면식도 없지만 익숙해져 지인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니, 나름 사회적 활동이다. 실생활의 지인과는 마음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트친이니 페친이니 스마트폰 속 사람은 친구 관계를 끊거나 블록해 버리면 그만이다. 끊임없이 읽고 쓰며 뭐라도 발언하니 별로 외롭지도 않다. 소셜 미디어에 탐닉 중인 현대인 사이의 거리는 코로나 사태가 심각함을 더해가는 지금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그런데 소셜 디스턴싱이란 말은 어쩌면 소셜 미디어까지 포함해 모두와의 거리두기가 필요한 때가 ‘지금’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매체를 만든다. 15세기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는 지식을 해방해 근대로 이끌었지만, 이와 함께 프로파간다와 음모론도 해방되었다. 21세기의 기술과 매체가 만드는 혼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반복적 전개는 불가피한 일이다.

댓글부대가 정론매체와 똑같은 활자를 쓰고, 극단적 주장의 유튜버들이 공중파와 똑같은 영상 기술을 구사한다. “뉴스에서 봤는데…”라는 말은 나만의 정의를 위한 연료가 된다. 그것이 어느 매체의 누가 쓴 것인지는 관심도 없고, 알아도 금세 잊어버린다. 그저 인터넷에서 본 것은 모두 진실이 되고, 이 활동이 돈이 되니 모두 달려든다. 적나라한 경제적, 정치적 동기가 있는 경우 이외에도 존경과 관심을 받고 싶은 개인적 욕구가 가짜 뉴스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가족은 조금씩 천천히 해체되고 있다.
인간은 몰려다니면서 안전을 확보하도록 진화됐다. 원시시대에 집단으로 뭉치는 습성은 홀로 지내다 객사할 가능성을 줄였다. 역사상 발발한 수많은 감염병도 마을 단위로 뭉쳐서 대응했다. 마음 둘 곳을 찾는 것은 인류의 본능인 셈이다.

다만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은 도심 속에서 가족 단위로 분절되어 고립되어 있다. 사촌도 이웃사촌도 남과 같아진 지금, 가족이 붕괴하거나 기능부전에 빠지거나 가족이 곧 나홀로인 1인 가족이라면 마음 둘 곳을 찾아 나선다. 통신과 교통 덕에 전국구가 될 수 있는 종교와 정치적 모임들은 집성촌(集姓村) 대신 마음 둘 곳이 되어 준다. 그런데 그곳이 나를 보호할 물리적 울타리가 아닌 코로나 집단감염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고독을 가려주는 그곳들이 별로 밉지 않다.

재단법인 일본청소년연구소는 다양한 테마로 한·중·미·일 4개국 청소년의 의식조사를 매년 해오고 있다. 2015년은 고교생의 생활과 의식에 대한 조사였는데, 흥미로운 문항이 있었다.

“부모가 고령이 되어 여러분이 돌봐야 할 경우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해서라도 스스로 부모를 돌보고 싶다’는 문항을 57.2%의 한국 청소년이 선택했다. 중국(87.7%)보다는 못하지만, 일본(37.9%)보다는 높았다. 문제는 ‘부모 자신의 힘에 맡긴다’는 문항이다. 한국만 26.5%. 다른 국가들은 미·중·일 각각 2.7, 0.4, 3.7%였다. ‘경제적 지원은 한다’, ‘잘 모르겠다’ 등 다른 문항도 있었지만 한국 청소년 상당수에게 ‘부모의 노후란 스스로 알아서 하셔야 할 남의 일’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답변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겐 놀라운 답변이다. 그렇기에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문항이기도 하다. 현대사회 속 가족의 역할에 대해 모두 제각각의 정의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 기대 수준의 차이는 점점 벌어질 것이다.

현대사회는 부모가 제 노릇을 못하더라도 그 불찰을 대신 메워 줄 조부모 등 친지가 가까이에 없다. 그저 부모역할 못 하는 일로 끝나지 않고 방임이나 학대가 되기도 하니, 이들이 성장한 뒤 부모와 멀어지는 일을 불효라는 질타로 막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고독사 문제는 독거노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고독사 추정건의 14%가 20~30대다. 물리적 고독은 나의 물리적 소재에 관심이 없는 트친이나 페친이 좀처럼 해소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결국은 밥 한 끼 같이 나눌 현실의 가족과 친구만이 지켜줄 수 있다.

한가위는 농경사회의 한국인에게 더없이 중요한 최대명절이었다. 도시화 이후 흩어졌어도 이때만큼은 일가친척이 고향에 모여 함께 핏줄을 확인하는 축제를 지냈다.

올해의 한가위는 분위기상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이를 반가워하는 이들도 있다. 자주 보지 않아 별 애착이 없는 관계에 둘러싸여 잔소리나 듣는 명절 따위 고역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모두 먹고 마시고 떠드는 걸 좋아한다. 낯을 가리는 내성적 사람도 마음에 맞는 이가 한 명만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활짝 웃는다.

음식을 둘러싼 회화가 즐거운 것은 우리 태고의 기억 덕이다. 연회란 농경과 정주화가 시작된 후, 질서를 과시하고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리고 그 본질은 바로 축하하는 일에 있다.
 ‘한가위의 마음’을 지키는 일이 소중하다
서비스업 3차 산업의 근간은 결국 사람이 모임으로써 이뤄지던 이벤트, 축하와 같은 감정적 의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인생의 각 스테이지에 있어서의 모든 축하의식이 하나둘 중지되고 있으니, 마치 올림픽이 사라진 운동선수처럼 우리 개개인의 정신적 타격은 물론 사회 전체의 위축 효과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함께 밥숟가락은 같이 들지 못해도 멀리서나마 축하하는 일만큼은 할 수 있다. 코로나 속 한가위에 해볼 만한 일이다. 축하할 일이 없다고? 그럴 리 없다. 조금만 관심을 두면 축하할 일은 언제든 있다. 살아남아 오늘을 사는 일 자체가 축하받을 일이다. 축하할 일을 함께 찾는 것 또한 친지의 정이기도 하다.

정(情)이란 함께 축하하고 함께 슬퍼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 마주 보고 있지 못해도, 목소리만으로도, 아니 단 몇 단어의 문자만으로도 전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만나지는 못해도, 함께 할 수 있는 한가위의 마음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 일이 한 해에 한번이 아니라 수시로 반복할 수 있을 때, 아니 수시는커녕 ‘좋아요’ 누르는 시간에 한 번만이라도 해본다면, 우리는 해체되던 가족과 친지의 유대를 어쩌면 조금씩 회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 필자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겸 IT평론가다. IBM, 마이크로소프트를 거쳐 IT 자문 기업 에디토이를 설립해 대표로 있다. 정치·경제·사회가 당면한 변화를 주로 해설한다. 저서로 [IT레볼루션] [오프라인의 귀환] [우리에게 IT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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