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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 인간과 조직 사이] 알고보면 ‘한끗 차이’…세종의 ‘악덕 리더십'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 세종대왕(한석규)의 모습.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우리가 잘 아는 얘기가 있다. 조선 세종 때 집현전 학사이던 신숙주가 밤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그런데 깨어 보니 이게 웬일인가? 임금이 입는 용포를 덮고 있는 게 아닌가. 임금의 옷을 입는다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죄인데 말이다.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그 사이에 세종이 다녀간 것이었다. 집현전을 돌아보던 세종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신숙주를 발견하고는 안쓰러운 마음에 용포를 덮어주었다는, 신하를 어여삐 여기는 세종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흔히 이야기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말 이뿐이었을까? 신하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 뿐이었겠는가 말이다. 조직심리학적 관점에서 이 일을 보면 다른 게 보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자. 이 이야기를 우리도 알고 있으니 다음날 집현전은 온통 화제 만발이었을 것이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이 누군가. 다들 전국에서 손꼽히는 인재들이 아니던가. 하나같이 청운의 꿈을 품고 궁궐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신숙주가 밤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성은(聖恩)을 입었으니 그는 임금의 머리에 분명하게 기억됐을 것이고, 당연히 미래도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날 이후 집현전의 밤은 어땠을까? 퇴근할 시간이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서거나 잠을 자야 할 시간이라고 편히 잠을 자는 이가 있었을까? 임금이 밤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으며 가끔 집현전 ‘순찰’을 돈다는데? 기회는 깜빡 졸기 쉬운 새벽녘에 온다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날 이후 집현전의 밤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을 것이다.
 

탁월한 리더, 말보다 상황 만들어

알다시피 세종은 셋째 아들이라 원래 후계자가 아니었다. 무소불위의 아버지 태종이 밀어 올린 왕이었다. 당연히 초반에는 왕권이 강하지 못했다. 신진 학자들로 집현전을 만들고, 싱크탱크로 키운 것도 그래서였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재벌 3세 회장이 직할조직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세종은 이 집현전을 통해 국정을 주도할 뭔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은 집현전이라는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야 했을까? 왕명의 지엄함으로 “열심히 하라”고 수백 번 강조하면 되었을까, 아니면 이런 식으로 새벽녘에 나타나 조용히 용포 한 자락 덮어주고 가는 게 효과적이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였을 것이다. 세종은 성군이기도 했지만 그가 일을 추진하는 과정을 보면 일을 시키는 능력이 뛰어난 리더였다. ‘하라’고 하지 않고 ‘하게끔’ 하는, 탁월한 리더들이 갖춰야 할 덕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할 만한 그 많은 일을 해냈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야근하다 잠깐 잠들었는데 “야근하느라 집안 식구들 얼굴도 못 볼 텐데 맛있는 밥이나 사주라”면서 사장이 두툼한 봉투를 두고 갔다면 우리 마음은 어떨까?
 
예나 지금이나 탁월한 리더들은 말로 하기 보다 ‘어떤 상황’을 만들어 그 상황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끌어간다.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인간은 참으로 이상해서, 스스로 원하는 것이면 ‘죽도록’ 일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일도 억지로 시키면 악덕이고 갑질이지만 스스로 마음을 동하게 해서 하게끔 하면 탁월한 리더십이 된다. 세종 같은 ‘악덕 리더십’, 어디 없을까?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그렇게 일하면 아무도 모릅니다]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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