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당 100년 중국 공산당의 생존비결은?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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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 100년 중국 공산당의 생존비결은?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덩샤오핑, 공산당 원리주의 버리고 실용주의적 타협안 내놔

 
 
제13기 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3차 전체회의에서 리잔수 상무위원과 대화하는 시진핑 주석 [연합뉴스]

제13기 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3차 전체회의에서 리잔수 상무위원과 대화하는 시진핑 주석 [연합뉴스]

중국공산당(중공)이 7월 1일로 창당 100주년을 맞았다. 이날은 공식적인 중국공산당 탄생 기념일(중국 공산당 건당 기념일, 7·1 건당절)이다. 중국 공산당은 성대한 기념행사를 열었다. 중국 전역의 혁명 유적지는 9000만 명이 넘는 공산당원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실 중공이 실제로 창당된 날은 1921년 7월 23일이다. 이날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외국인 치외법권 지역)의 망지로(望志路) 106번지(현재 흥업로(興業路) 76번지)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중국 전역에 공산당원 57명(50여 명으로도 알려졌으며, 밝혀진 인물은 41명)을 대표하는 13명과 첫 대표회의를 요구한 외국인 코민테른 요원 2명 등 모두 15명이 모였다. 마지막 날인 30일 조계의 프랑스 경찰이 현장에 들어와 수색하고 순찰을 강화하자 이들은 상하이에서 서남쪽으로 100㎞쯤 떨어진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에 있는 유람선으로 옮겨 대회를 마쳤다. 그리고 당의 기본 임무와 민주집중제 등 조직원칙, 규율 등을 담은 중국공산당 강령을 채택했다. 천두슈(陳獨秀·1879~1942)가 중앙집행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그렇다면 왜 7월 23일이 아닌 7월 1일이 건당 기념일이 됐을까?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1938년 5월 옌안(延安)에서 내놓은 ‘지구전을 논하다’에서 7월 1일을 창당 기념일이라고 언급한 게 계기다. 그 뒤 1941년 6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건에서 ‘창당 20년, 7·7절 4년’이라고 표현하며 그날 기념식을 열기로 하면서 7월 1일이 공식적으로 정착됐다. 7·7절은 1937년 7월 7일 베이징(당시엔 베이핑(北平)) 서남쪽의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일본군의 자작극으로 벌인 발포로 중일전쟁이 시작된 날을 가리킨다.  
 
중국공산당이 100년을 생존한 요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비결로 경제 업적을 들 수 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현대 중국사를 주도한 핵심 세력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들은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의 개혁·개방을 바탕으로 이룬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주역으로 자평한다.  
 

마오쩌둥 실수 딛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오늘날 중국은 14억4399만 명 인구에 명목 금액 기준 국제통화기금(IMF) 2021년 국내총생산(GDP) 예상치가 16조6400억 달러로 미국(22조6752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그 뒤를 잇는 일본(5조3781억 달러), 독일(4조3192억 달러), 영국(3조1246억 달러), 인도(3조497억 달러)보다 한참 앞선다. 중국의 2021년 1인당 GDP 예상치는 1만1819달러로 세계 78위다. 세계 평균을 조금 넘는 액수다. 2020년 수출 2조5900억 달러에 수입 2조600억 달러다. 말 그대로 눈부신 성적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마오쩌둥식 공산주의 이념을 정치·경제·사회에 확산했다. 건국 초기인 1950~70년대 초 중국은 거대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에 나서기까지 중국에선 역사 발전의 바퀴가 사실상 멈춰 섰다.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은 전국에 자신들의 이념을 적용하려고 시도하다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중국 인민이 받았다. 중국 헌법 서언(서문)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노동계급이 지도하는 노농동맹을 기초로 한 인민민주주의 독재 즉 실질상의 무산계급독재가 강고해지고 발전되었다”고 적혀 있다. 여기에 초기 시행착오의 원인을 엿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1950년대 초 ‘인민민주주의’를 앞세워 지주를 비롯한 ‘반혁명분자’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인민민주주의는 무산계급이 지주·자본가와 기득권층으로 이뤄진 유산계급이 지배하던 봉건 체제를 무너뜨린 뒤 공산당 중심의 중앙집중적인 권력체계를 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무산계급이 인민의 적인 유산계급과 반혁명분자를 배제하고 적대시하면서 독재를 펼친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중국 당국이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인민민주주의를 가리킨다. 이는 당의 지도와 지배 아래에서 이뤄지는 체제이기 때문에 개인의 의지와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서구 자유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중국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련을 만든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창한 ‘민주집중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민주집중제는 ‘토론은 자유롭게 하되 일단 당이 결정하면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당이 정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은 1951년부터 사상개조 운동과 함께 부패·낭비·관료주의에 반대한다는 삼반(三反) 운동, 그리고 뇌물·탈세·국영재산강탈·정부계약사기·국가경제정보누설을 반대한다는 오반(五反) 운동을 펼쳤다. 둘을 합쳐 삼반오반운동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반혁명 세력 타도에 나섰다. 1955~57년에는 반우파운동을 펼쳐 공산당에 대한 불평불만 분자를 제거에 나섰다. 토지개혁, 집단농장 등 반대파 숙청 등을 통해 공산당은 독재체제를 확립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발전은커녕 혼란에 빠졌다.  
 

덩샤오핑, 헌법개정으로 개혁개방 시작

1978년 싱가포르 방문 당시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와 만난 덩샤오핑 당시 중국 부총리 [신화통신]

1978년 싱가포르 방문 당시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와 만난 덩샤오핑 당시 중국 부총리 [신화통신]

그 뒤에는 더 큰 사건이 벌어졌다. 1957년 반우파 투쟁으로 공산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마오쩌둥은 1958~1961년 대규모 인력 투입으로 농업과 공업의 대규모 증산을 노린 대약진 운동을 진행했다. 그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인민공사와 합작사, 집단식당 등을 운영하면서 인민의 재산을 공유화하고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면, 15년 안에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을 만큼 고도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위해 마오쩌둥은 농촌에 소형 용광로를 다량 보급해 쇠를 생산하는 등 기기묘묘한 정책을 펼쳤다. ‘참새는 해롭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 참새를 대대적으로 잡는 바람에 참새가 먹던 해충이 창궐해 농촌에 대규모 흉년이 들었다. 중국 전역의 산업과 인프라, 그리고 환경이 대대적으로 파괴되면서 전국이 혼란에 빠졌고, 그 결과 대기근이 발생해 이 시기에만 1500만~55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1976년에는 권력 회복을 노린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며 중국은 또다시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문화대혁명은 인민민주주의를 더욱 확고화 한다면서 어린 홍위병의 폭력에 의존해 민중의 사상과 행동을 통일하려고 시도한 사건이다. 명분은 ‘봉건적 문화와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수세에 몰린 마오쩌둥의 정치적인 술수라는 평가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가 수십만에서 250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학교는 폐쇄됐고 지식인·문화예술가들과 마오쩌둥에 맞서던 공산당 지도부는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공산당 원리주의 또는 교조주의의 생생한 모습이었다.  
 
마오쩌둥 집권 시절인 1954년 제정된 중국 헌법은 그의 말년인 1975년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공산주의 색채를 희석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현대 국가 건설에 힘을 실어줬다. 1975년 첫 헌법 개정 때는 당시에 이미 유명무실했던 국가주석 제도를 폐지하는 등 정치·제도적 변화에 그쳤다.  
 
하지만 1976년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78년 3월에 이뤄진 헌법 개정은 중국과 중국공산당의 방향을 대대적으로 바꿔놓았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불리는 덩샤오핑이 그야말로 작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이를 위한 첫 조치로 공산주의 계급투쟁 노선을 의미하는 ‘전면적인 독재’라는 구절을 헌법에서 뺐다. 그 대신 공업·농업·국방·과학기술의 현대화를 가리키는 ‘4개 현대화’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4대 현대화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년)가 주창했던 정책으로 덩샤오핑은 이를 중국의 공식 경제정책으로 삼았다.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조치다.
 

중국 경제 살린 ‘흑묘백묘’론

변화를 위한 기반을 다진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열린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2회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제안했다. 국내체제 개혁과 대외개방 정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바로 1978년 개헌이었다. 그해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싱가포르에 다녀온 뒤였다. 당시 헌법에 삽입된 4개 근대화는 개혁·개방의 상징으로서 경제성장의 소중한 거름이 됐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사상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 대표된다. 이념보다 실용을 앞세운 덩샤오핑의 생각이 잘 반영된 말이다. 여기에 ‘자본주의에도 계획경제가 존재하듯 사회주의에도 시장경제가 있다’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일방적인 평등화보다 ‘부유할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져라’는 선부론(先富論)을 합치면서 덩샤오핑의 경제사상이 완성됐다.  
 
덩샤오핑의 신념은 공산당 지배는 그대로 둔 상태에서 헌법 개정 작업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했다. 그는 “인민들이 잘 먹고 잘사느냐가 사회주의냐 아니냐의 핵심”이라며 실용주의 노선을 앞세웠다. 공산주의의 기본정신은 부정하지 않고, 인민 민주주의 독재 정치체제를 지키며, 공산당의 지도력을 유지한다는 중국 사회주의의 3가지 원칙은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통해 부강한 중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덩샤오핑의 의도였다. 이는 그 뒤 중국 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1979년 헌법 개정은 정치적인 보수화를 상징한다. 공산당은 4대 민주, 또는 4대 자유로 불렸던 대명(大鳴·자유로운 발언)·대방(大放·자유로운 조직과 활동)·대변론(大辯論·자유토론)·대자보(大字報·벽보 붙이기)를 폐지했다. 78~79년 웨이징성(魏京生) 등이 베이징 시단(西單)의 벽에 민주화·자유를 선전하는 대자보를 붙인 ‘민주의 벽’ 운동이 원인이었다.  
 
중국공산당이 개헌을 통해 개혁·개방의 한계를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4대 민주는 문화혁명 시기 인민의 완전한 언론·조직 활동을 보장해 기득권 세력을 타도한다며 한때 마오쩌둥이 주창했던 인민동원방식이었다. 하지만 민주의 벽 운동에선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1982년 개헌도 보수파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은 사회주의, 무산계급독재,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4원칙을 지킨다는 내용의 ‘4항 기본원칙’을 헌법에 반영했다. 급진적인 개혁 요구를 제한하겠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은 정치개혁 없는 경제개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 다음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다당제·공정선거 등 정치개혁 없이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이 있었으며 이를 서로 타협해 해결했음을 보여준다.  
 

지금 중국경제는 타협의 산물

이런 개혁을 통해 보수파를 달랜 덩샤오핑은 시장경제로 더욱 달려 나갔다. 1988년 개헌에선 헌법 11조에 “자영경제, 사영경제 등 비공동소유경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중요한 구성 부분”임을 인정하고 “국가는 자영경제 사영경제 등 비공유 경제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한다”라고 명문화했다. 민간경제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하는 내용이 추가된 셈이다. 토지사용권 양도도 가능하게 했다.  
 
1993년 개헌에선 국유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분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는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선 개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기업 활동에서 공산당이나 정부의 입김을 배제한 획기적인 조치이기 때문이다.  
 
1999년 개헌에선 덩샤오핑 이론에 헌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사회주의 법치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헌법 5조에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도 헌법과 법률을 초월하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 사회주의 법치국가를 건설한다”며 법치를 명문화했다. 법치의 도입은 중국의 변화를 상징한다. 실제로는 법도 공산당보다는 앞설 수 없는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2004년에는 사유재산권 보장을 헌법에 못 박았다. 헌법 13조에 “공민의 합법적인 사유재산은 불가침”이라는 내용을 넣었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 제도를 실현해 빈부 격차를 없앤다는 고전적 공산주의 이념이 인민이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 앞에 잠시 고개를 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중국공산당은 항상 중국의 선진사회 생산력의 발전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인민 대부분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는 장쩌민(江澤民)의 3개 대표 사상에 대한 헌법적 지위도 확립했다.  
 
중국공산당도 변했다.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변모를 꾀했다. 개혁·개방 초기 과거의 잘못된 판결과 정치적 평가를 바로 잡는 평반(平反)을 활성화했다. 이는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과거 역사의 과오를 청산하고 중국 사회를 재구성하는 계기가 됐다. 심지어 당원 자격도 무산대중에서 당을 지지하는 홍색 자본가로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사회주의는 정치적 의미를 상실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권위는 그대로 유지됐다. 이를 통해 중국공산당은 변화와 개혁을 실험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중국공산당이 지금까지 100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건국 초기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내부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성과만 보지 말고 내부의 변화 과정을 더욱 정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중국공산당의 장단점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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