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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절벽’ 제주대, 24년 만에 공대출신 총장 뽑은 이유

[인터뷰] 김일환 국립 제주대 신임 총장
예산에서 고정비 비중 93%…재량사업 불가능
4차산업 기술로 제주산업 키우고 결실 나눠야
신사업 발굴·고도화 돕는 공공 데이터센터 시급

 
 
지난해 말 제주대 총장 선거에서 이변이 일었다. 24년 만에 인문대를 제치고 공대 교수가 총장직에 올랐다. 국립대인 제주대는 학생도 참여하는 직접 선거로 총장 1순위 후보자를 뽑고, 대통령이 후보자를 최종 임명한다.
 
투표 결과도 압도적인 편이다. 총장 당선자는 2차 투표에서 과반을 얻었다. 직전 선거 때는 3차 투표까지 갔었다. 특히 몰표가 쉽지 않은 교수 투표에서 표차를 벌였다. 제주대 안팎에서 “사실상 압승”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변의 주인공은 제주대 전기공학전공 교수인 김일환 신임 총장이다. 제주의 전략산업 중 하나인 신재생에너지 분야를 연구해왔다. 지난 2013년부터 3년간 창업기업 성장을 지원하는 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 원장을 지낸 바 있다.
 
제주대는 왜 변화를 선택했을까. 지난 3월 29일, 봄기운이 돌기 시작한 캠퍼스에서 김일환 신임 총장을 만났다. 길가에선 벚꽃이 움트고, 캠퍼스 어디서나 푸른 바다가 보였다. 학생회관에선 즉석 피아노 연주가 펼쳐지고 있었다.
 
“대학이 거의 부도 상태입니다.” 김 총장은 꽃샘추위 같은 말로 운을 뗐다. 전체 예산에서 액수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경직성 경비 비중이 93%를 넘었다는 것이다. 13년간 등록금은 동결됐지만, 인건비나 장학금 등은 꾸준히 올라서 그렇다. 그러다 보니 대학에서 재량으로 특성화 과제를 찾거나 지역 기업과 연계해 일자리를 발굴하는 데는 쓸 돈이 거의 없었다고 김 총장은 말했다.
 
대학에서 으레 하는 투정이 아니다. 제주대에서 한 해 편성할 수 있는 예산액 약 530억원 가운데 재량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돈은 7%인 37억원에 불과하단 이야기다. 재학생 1만명인 국립대에서 운용할 수 있는 돈이 국내 초기 창업기업이 평균적으로 투자받는 돈(약 31억원)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다. 다만 정부에서 미리 용도를 지정해서 주는 재정지원금은 뺀 액수다.
 
이런 여건에서 대학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기업·연구소와 협력을 전담하는 교내 특수법인인 산학협력단을 키우는 것이다. 과제를 수주하면 예산의 12%를 재량 사업비로 쓸 수 있다. 김 총장은 “제주대 산학협력단의 연간 회계가 약 900억원”이라며 “임기 내에 1500억원까지 늘리려고 한다”고 밝혔다. 계획대로라면 약 60억원의 재량 사업비를 확보하게 된다.
 
김 총장은 제주의 3대 전략산업인 신재생에너지와 바이오(천연화장품), 그리고 관광산업을 산학협력의 거점으로 삼으려고 한다. 이들 산업에 빅데이터와 블록체인, 메타버스 같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을 덧붙여서 부가가치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김 총장은 이런 방법으로 제주의 지역내총생산에서 2차 산업 비중을 현재 4%에서 적어도 10%로 늘리도록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총장이 꼽은 가장 시급한 사업은 ‘빅데이터센터’ 설립이다. 그 이유를 물었다.
 
빅데이터센터는 뭔가.
도내에서 만들어지는 데이터를 축적하고, 사업화가 가능한 데이터를 발굴한다. 풍력발전을 예로 들어보자. 제주도 풍력발전 역사가 30년이다. 이제 어느 위치에서 얼마만큼 수익을 낼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데이터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지금까지 축적을 안 해왔다.
 
데이터가 결국 돈인데.
신재생에너지는 결국 데이터 싸움이다. 귀한 자료라 개인별·기업별로 갖고 있을 뿐 공유를 안 한다. 그러나 누구나 쓸 수 있어야 새로운 창업이 일어나고 산업 전체가 커질 수 있다. 공공 데이터센터가 필요한 이유다.
 
제주대 혼자 힘만으론 못 만드나.  
대규모 서버를 갖추자면 적어도 1000억원이 든다. 제주도와 유관기관, 대학이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추진해야 하는 일이다.
 
전략산업과 4차 산업혁명 기술의 접목을 꾀하는 건 제주테크노파크 원장 시절 경험 때문이 크다. 제주에 화장품산업이 거의 없던 시절, 제주도 천연물이 10% 이상 들어갔을 때 인증 상표를 붙일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 제주대도 화학과를 화학코스메틱스학과로 바꾸고 석·박사 고급인력을 키웠다. 그 결과 아모레퍼시픽 같은 대기업이 제주도로 들어왔다.
 
아쉬운 건 복제 문제였다. 제주도 인증 마크를 따라 한 상품이 해외에서 버젓이 만들어졌다. 김 총장은 “개인이 위·변조할 수 없는 블록체인 상에서 제주도 인증 기록을 남긴다면 상표권의 가치가 더 오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늘에서 본 제주시 아라동 제주대 캠퍼스의 모습. [연합뉴스]

“제주도, 동아시아 창업 거점 가능해”

데이터와 기술이 있다고 산업이 커지진 않는다. 자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서울과 경기도 판교 등 극히 일부 지역을 빼면 투자받기가 쉽지 않다. 특히 벤처업계에선 “벤처투자사와의 물리적 거리가 10㎞ 이상 나면 투자받기 어렵다”라는 속설이 있을 만큼 비수도권 기업은 투자 유치가 어렵다. 비수도권 지역 중에서도 제주는 물을 건너야 하는 만큼 여건이 더욱 안 좋다.
 
그러나 김 총장은 “생각을 바꾸면 불리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미 제주는 휴식을 취하며 업무를 병행하는 ‘워케이션’ 명소로 떠오른 상태다. 반면 수도권은 높은 집값 때문에 젊은 사람이 터를 잡기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무비자 지역인 만큼 일본·중국·동남아 사람이 와서 창업하기도 쉽다는 것이 김 총장의 생각이다. 창업을 고민할 때 재정을 든든하게 지원해줄 수 있으면 된다.
 
김 총장은 “지자체에서 관련 펀드를 조성해야 한다”며 “제주도에서 모태펀드를 1000억원 규모로 조성해서 제주 창업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태펀드는 민간 벤처투자사가 만드는 펀드에 출자하고, 운용에 개입하지 않는 펀드를 뜻한다. 정부 모태펀드는 최근 벤처 붐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학이 산업을 키우고, 결실을 지역과 나눈다는 건 32년 차 교육자인 그의 지론과도 맞닿는다. 김 총장은 “기술은 매해 바뀌는데, 대학의 교육과정과 연구 환경은 30년 전에 머문다면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개교 70년을 맞는 제주대가 변화의 길목에 섰다.
 

문상덕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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