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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 투자 새 판 짜는 대기업들

[글로벌 경영 위기, 우리 기업 대응은②]
경기 둔화 우려→경기 침체 공포 확산
삼성·현대차·SK·LG 등 대기업 투자계획 재정비
인센티브 많은 美 투자↑, SK 한국 투자계획 보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서울 용산구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정 회장의 영어 연설이 끝난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Gloomy and More Uncertain(암울하고 더 불확실한)’

국제통화기금(IMF)는 지난달 세계경제전망(World Economic Outlook) 보고서의 부제를 이렇게 달았다. 전 세계에 불어닥친 인플레이션, 중국의 성장둔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 장기화 등 악재가 경제 성장 가능성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IMF는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2.3%로 예상했다. 기존 전망치보다 0.2%포인트 낮고 세계 경제성장률 예상치(3.2%)도 밑도는 수준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공개한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의사록에서도 “경제 전망이 좋지 않다”고 공론화된 사실이 드러났다. 표면상 지표들이 나타내는 신호는 ‘경기둔화’. 하지만 세계는 경기 침체(Recession)를 우려하고 있다. 이른바 ‘R의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업들도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사업 손익 구조를 다시 들여다보고 투자 계획 재정비에 들어갔다. ‘확실한 곳에만 투자하고 불확실한 곳은 관망’하는 계산기 두드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美에 초대형 투자한 삼성‧현대, 바이든과 만남에서도 자신감

삼성, 현대, SK, LG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주요 기업도 저마다 투자 계획을 새로 짜고 있다. 확실하게 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 명확하게 인센티브가 보장된 곳에 투자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사업에서 돈을 빼거나 투자 계획을 연기하고 있다. 당분간 경기 상황 변화를 지켜보며 투자를 저울질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최근 삼성이 향후 20년 동안 미국에 약 2000억 달러(260조원)을 투입하는 투자 계획을 내놓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22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과 텍사스주 오스틴 지역 매체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이런 내용을 담은 세제혜택신청서를 텍사스주 감사관실에 제출했다.  
 
신청서에는 삼성전자가 텍사스주 오스틴에 생산라인 2개, 테일러에 9개의 생산라인을 추가하겠다는 계획을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 규모는 1921억 달러(약 252조6000억원)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 170억 달러(약 22조원)을 들여 테일러에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번 투자 계획이 현실화할 경우 10배가 넘는 투자가 이뤄지는 셈이다.  
 
아직 투자 계획이 구체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삼성전자가 대규모 장기 투자 계획을 밝힌 것은 미 텍사스 주의 ‘챕터 313’ 신청 안건이 소멸하기 전 지자체가 제공하는 혜택을 우선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챕터 313은 일정 규모 이상의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에 대해 주 정부가 10년 동안 재산세를 감면해주는 세제 혜택 프로그램이다. 내년부터는 기업이 투자를 약속하더라도 지자체가 혜택을 보장하지 않는데,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선 향후 투자를 백지화할 경우 혜택을 포기하면 되지만, 계획대로 투자를 유지하면 수혜를 볼 수 있다.  
 
현대차그룹이 미국 전기차 공장 건설 계획을 밝힌 것도 인센티브와 관련 있다. 현대차가 55억 달러(7조2000억원) 투자 계획을 발표하자 미 조지아 주 정부는 세제 혜택 등 18억 달러(2조4000억원) 규모의 지원을 약속했다. 북미 지역을 비롯해 미국이 세계 자동차 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대차의 대규모 투자 약속이 아무 조건 없이 나온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현대차의 55억 달러 투자 계획은 지난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 기간에 나왔다. 현대차는 전기차 전용 공장과 배터리셀 공장 등 생산 거점을 미국에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조지아 주 정부는 현대차가 공장을 건설할 경우 8000개의 일자리가 생기고, 부품 회사 등 협력업체 일자리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10년간 총 6조원에 달하는 급여가 지급될 것으로 전망한다. 기업은 정책 지원을 받아 미래 먹거리를 투자할 때 생기는 리스크를 줄이고 지자체는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윈윈(win-win)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 ASML CEO, 마틴 반 덴 브링크 ASML CTO 등과 반도체 장비를 점검하고 있는 모습. [사진 삼성전자]

LG, 유럽 투자 Go 미국 투자 Stop…SK는 국내 투자 보류    

미국이 투자기업의 천국인 것만 아니다. LG그룹의 행보를 보면 이런 상황이 여실히 드러난다.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은 최근 미국에 1조7000억원을 들여 배터리 단독공장을 짓기로 한 투자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인플레이션과 환율 상승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당초 계획보다 훨씬 더 큰 비용이 예상되자 손익계산에 들어간 것이다.
 
LG엔솔은 지난 3월 미국 애리조나주 퀸크리크에 1조7000억원을 투자해 연산 11GWh(기가와트시) 규모의 원통형 배터리 신규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었다. 전기차 분야를 비롯해 무선 전동공구 등에서 원통형 배터리 수요가 늘면서 신규 공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물가·고환율 등의 여파로 투자비가 2조원 이상 불어날 것으로 예상되자 투자 계획을 보류했다.  
 
그렇다고 모든 투자 계획을 재검토하는 것은 아니다. 제너럴모터스(GM)와 함께 짓는 테네시 주 합작2공장(35GWh)과 미시간 주 합작3공장(50GWh) 등 현재 건설 중인 합작공장은 예정대로 진행할 예정이다.  
 
미국 완성차업체 포드에 공급하는 배터리 물량도 2배로 늘리기로 했다. 이를 위해 내년까지 폴란드 공장의 포드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라인 규모를 기존의 2배로 증설한다는 방침이다. 이후에도 순차적으로 증설을 이어갈 계획이다. LG엔솔은 2020년 하반기부터 머스탱 마하E와 E트랜짓에 배터리를 공급해왔다. 그런데 이 차량 판매가 늘면서 LG엔솔의 배터리를 필요로 하는 수요도 늘었고 LG엔솔도 투자를 늘리기로 했다.    
 
SK는 국내 반도체 공장 증설 계획을 보류했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지난달 열린 이사회에서 청주 신규 반도체 공장 증설 안건을 보류했다. 메모리 반도체 수요 증가에 따라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에 4조3000억원을 들여 신규 반도체 공장(M17)을 증설할 예정이었지만, 투자를 연기한 것이다. 지난달 14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전략적인 형태로 투자가 지연될 수 있다”고 언급했는데 이와 맞물리며 SK 투자 재고에 대한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이런 고민을 하는 건 우리 기업만이 아니다. 해외 글로벌 기업들도 속속 긴축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대만 TSMC는 최근 발표한 2분기 실적이 전망치를 뛰어넘는 어닝서프라이즈로 나타났지만, 장비 리드타임(주문부터 납품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고, 재고가 많아 시설투자(CAPEX)를 기존보다 40억 달러 하향 조정했다.  
 
블룸버그통신은 18일(현지시간) 미국 대표 기업 중 하나인 애플이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비해 내년 일부 사업부문의 연구개발(R&D)과 채용 예산을 낮춰 잡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또 매년 5∼10%가량 인원을 늘려온 것과 달리 내년에는 일부 부서의 인원을 늘리지 않기로 했다. 알파벳과 아마존, 메타 등 초대형 테크 기업들도 채용과 지출 축소 계획을 밝혔고 마이크로소프트(MS)와 테슬라는 감원을 시작했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 '제45회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인사하고 있는 모습.[사진 대한상공회의소]

국내 기업, 현금 쌓아두고 실탄 모으기 돌입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자 기업들은 비상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실탄 모으기에 들어갔다. 투자 계획을 재고하는 한편 ‘현금’을 쌓아놓고 위기에 대처하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6월 발표한 ‘2022년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 현황 분석 결과’를 보면 일반지주회사가 체제 내 보유한 현금과 현금성 자산은 모두 65조8416억원으로 나타났다. 1년 전과 비교하면 19% 증가한 수준이다.  
 
피계림 공정위 지주회사과장은 “투자가 위축되다 보니 체제 안에 현금이나 현금성 자산이 많이 쌓이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유보자금이 적극적인 투자 활동으로 이어지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병희 기자 leoyb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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