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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우회협박 뉴브리지 반격 경고?

정부의 우회협박 뉴브리지 반격 경고?

아무래도 ‘한국판 스탠더드’의 벽은 넘기 힘들었을까. 지난 10월23일 물러난 윌프레드 호리에 前 제일은행장은 결국 ‘모난 돌이 정 맞은 꼴’이 됐다. 국내 첫 외국인 은행장의 뒷맛이 영 개운찮은 퇴장이었다. 호리에 前 행장의 행보는 출발부터 한국판 스탠더드와 마찰을 빚었다. 2000년 1월21일 제일은행장에 오른 그는 1차 자금시장 안정대책 크레딧 라인 설정 거부, 2차 자금시장 안정대책 종금사 지원 거부, 채권안정기금 조성 거부, 11·3 퇴출 때 ‘살릴 기업은 확실히 지원한다’는 약정 거부, 회사채 신속 인수제 참여 거부…. 아무리 공익성이 중요해도 관치에 따라 이뤄지는 일은 과감히 ‘노(NO)’로 버텼다. 또 계좌 유지 수수료를 만드는 것을 비롯 공공성보다 수익성을 더 따져 은행권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이런 경영 스타일은 다분히 대주주인 뉴브리지캐피털의 주문 영향이 컸다. 은행산업 발전이 아닌 단기 수익이 목표인 투자펀드로선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런 탓에 금융계에서는 제일은행이 한국 경제와 금융산업 발전에 보탬이 되길 바라는 게 무리라는 시니컬한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어느 외국계 증권사 은행담당 애널리스트 말처럼 꼭두각시 인형 같은 한국의 은행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왕따당한 호리에 그러던 호리에 前 행장은 올 들어 조금씩 달라졌다. 감독당국의 간부를 찾아가 고개를 숙이거나, 시중 은행장 모임에도 가끔 얼굴을 비췄다. 비용을 줄이려고 전산부문을 아웃소싱하려다 노조와 불협화음이 나자 이를 철회하고, 노조를 껴안는 제스처도 취했다. 특히 국내 은행조차 꺼리는 하이닉스 지원에 나서겠다고도 했다. 정부쪽의 공세도 만만찮았다. 회사채 신속 인수제와 新워크아웃 협약 등에서 독자 행보를 보이는 제일은행을 왕따시키는 분위기였다. 지난 1월11일 국회 공적자금 특위에 나와 한국 국회 ‘데뷔전’을 치르면서 인신공격성 질문에까지 답해야 했다. 진념 부총리는 “햇볕이 쨍쨍할 땐 기업을 지원하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외면하는 금융기관은 사라져야 한다”고 비난했다.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올 초 시중 은행장들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 호리에 前 행장만 부르지 않았다. 정부 입장에선 눈엣가시 같던 호리에 前 행장은 ‘약점’도 잡혔다. 스톡옵션 행사가격이 문제였다. 그렇찮아도 헐값 매각 시비가 끊이질 않는 가운데 정상궤도에 오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스톡옵션 가격을 터무니없이 낮게 정했던 것. 그런 탓에 제일은행은 지난 6월 주식이 거래되지도 않는데 스톡옵션 가격을 너무 낮게 매겼다는 문제로 금감원으로부터 ‘주의적 기관경고’ 조치를 받았다(제일은행은 9월15일 이사회를 열어 지난해 초 호리에 前 행장과 임원에게 부여한 5백27만주의 행사 가격을 5천79원에서 9천8백34원으로 올렸다). 설 땅이 점점 줄어든 호리에 前 행장은 애꿎게도 하이닉스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그는 결국 지난 6월 1천억원 규모의 하이닉스 신디케이트론에 참여했다. 더군다나 그는 지난 7월27일 기자 간담회에서 “채권단이 다시 지원에 나설 경우 제일은행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까지 밝혔다. 이 대목을 두고 그럴싸한 정황 설명을 하는 사람도 있다. 외국계 증권사의 은행담당 애널리스트는 “국내 은행들도 하이닉스 지원을 꺼리던 판에 그동안 사사건건 정부 방침에 딴지를 걸었던 제일은행이 나선 것만으로도 상징성이 컸다”고 밝혔다. 정부가 압력을 넣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이다. 정부도 대주주인 만큼 뉴브리지측에 어떤 식으로든 압력을 넣었을 법하다는 것. 그는 특히 호리에 前 행장이 스톡옵션건 탓에 ‘주의적 기관경고’ 조치를 받은 뒤 좀더 달라지지 않았겠느냐고 설명했다. “정부와 잘 지내야 한다는 걸 배웠다”는 호리에 前 행장의 쓸쓸한 퇴장 인사에도 그런 뉘앙스는 물씬 풍겼다. 좀 다른 각도의 얘기긴 하지만 주택은행의 경우 금감원에서 하이닉스건으로 부르면 일부러 외국인 부행장을 보낸다. 외국인 부행장이 리스크관리본부장이라 담당자이긴 하지만 정부 압력을 막겠다는 속뜻도 담겨 있었다. 반면 이번 ‘호리에 경질’건이 정부의 압력에 밀려서라기보단 정부를 압박하는 카드라는 관측도 있다. 정부의 금융정책을 두고 외국 투자자들이 반발한 게 아니냐는 얘기다. 특히 채권단의 75%가 찬성하면 채권을 포기하든지 무조건 따르든지 선택해야 하는 구조조정촉진법이 나온 상황에서 한국 정부에 더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항의성 메시지라는 것. 하이닉스를 비롯 부실 기업에 돈을 대주느라 이익이 줄었다는 건 핑계일 뿐 사실은 정부의 新관치금융에 맞선 것이란 분석이다. 하이닉스 문제를 꺼낸 것만 봐도 이런 배경이 무관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관치보단 투기펀드가 낫다? 그렇더라도 ‘호리에 경질’은 뉴브리지의 지나친 횡포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아무리 이익만 좇는다지만 그렇다고 적자를 내지도 않은 은행장을 하루 아침에 자를 수 있느냐는 얘기다. 시중 은행의 한 임원은 “은행장이 큰 비리에 얽힌 경우 등이 아니면 전격적으로 바뀌진 않는데 시절이 바뀐 건지 뉴브리지가 너무한 건지 잘 모르겠다”고 씁씁해 했다. 물론 호리에 前 행장의 ‘성적’이 그리 좋진 않다. 예컨대 호리에 前 행장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 동안 풋백옵션을 뺀 고정이하여신은 꽤 늘었다. 풋백옵션을 뺄 경우 고정이하여신 규모가 워낙 적어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 부실로 잡히더라도 지표가 크게 나빠지는 착시현상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호리에 집권기의 경영성과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진 않다는 평가다. 제일은행에 따르면 올 상반기 고정이하여신은 3천4백51억원이다. 지난해 6월 말 현재 4백31억원보다 1년새 3천20억원이나 늘었다. 특히 하이닉스 여신 2천7백50억원과 지난 8월 말 부도난 흥창여신 2백60억원이 대부분이다. 호리에 재임 기간 동안 제일은행의 생산성도 떨어졌다. 은행 신탁부문이 전반적으로 고전했다 하더라도 제일은행 직원 1인당 충당금적립 전 이익은 3백80만원에서 3백60만원으로 떨어졌다. 직원 1인당 예수금 규모도 4억3천만원에서 3천7백만원으로, 1영업점당 예수금도 6억3천7백만원에서 5억2천9백만원으로 각각 하락했다. 그렇다고 제일은행이 적자를 낸 것은 아니다. 제일은행은 3분기까지 2천억원 정도의 이익을 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다만 하이닉스와 흥창 대출 탓에 올해 목표(2천6백억원)를 이루긴 어렵다는 관측이다. 구조조정과 정부 관계, 대기업 여신, 소비자 금융에 뛰어드는 시기 등의 문제로 호리에 前 행장과 갈등을 빚어온 뉴브리지측으로선 좋은 ‘빌미’였던 셈이다. 특히 이사회에서 대기업 여신을 줄이자는 결의가 있었는데도 호리에 前 행장이 정부쪽을 의식해 하이닉스를 지원했다는 점이 쟁점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新관치금융에 맞선다는 논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뉴브리지를 욕할 일만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잘 알려진대로 뉴브리지는 투기자본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표는 ‘제일은행을 비싼 값에 되파는 것’이다. 제일은행의 몸값을 올리려면 이익을 많이 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아무리 은행장이라도 단번에 갈아치울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낙하산 인사로 은행에 피해를 주기 마련인 정부보단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투기자본이 더 낫다는 판단이다. 임지원 JP모건증권 부지점장과 백운 삼성증권 은행담당 애널리스트는 “시장논리대로 움직이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반면 금융연구원 손상호 박사는 조금 다른 입장이다. 미국식 경영법에서는 단기에 이익 내는 게 선(善)이고, 그렇게 계속 이익을 쌓아나가면 1등도 되겠지만 빨리 튀켜서 팔고 나가겠다는 식의 인상을 주는 것은 우리 정서에 맞지 않다는 것. 특히 금융위기가 1백%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선진국식’만 내세우는 건 무리라는 지적이다. 어쨌든 호리에 前 행장이 전격 경질되면서 국내 시중은행에도 파장이 확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특히 간판급 국내 은행들이 외국인 손에 들어가 있는데다 외국계 투자펀드가 잇따라 국내 금융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더군다나 국내 금융시장에 외국계 출신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글로벌 스탠더드’와 ‘한국판 스탠더드’의 충돌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사실 기존 관행의 벽을 넘기란 쉽지 않다. 당사자간 이해가 엇갈리기 쉬운데다 마찰이나 불협화음이 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낯선 관행이 뿌리를 내리기까진 시간도 많이 걸리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돈이 걸려 있는 문제라면 더 그렇다. 금융 새판짜기 과정에서 용도폐기됐다는 관측도 나오는 호리에 前 행장의 경질을 계기로 이른바 선진금융기법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 지 관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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