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市場 만들고 룰 만들고 그위서 뛰어'

'市場 만들고 룰 만들고 그위서 뛰어'

이민화가 누구인가. 누가 뭐래도 우리 벤처 산업의 산파는 벤처 맏형격인 이민화 메디슨 전 회장이다. 부도기업주로 몰락하긴 했지만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시장에 벤처라는 씨앗을 직접 뿌렸고, 백지 상태였던 정부 관료를 교육시킨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관료 교육(?)’은 본인이 직접 맡았다. 처음엔 주로 중기청 관료들이 대상이었다. 이 전 회장의 아이디어는 중기청의 정책으로 포장되어 발표되기도 했다. 나중엔 카운터파트가 청와대나 정통부 등으로 확대됐다. 이 전 회장이 대한민국 벤처 정책의 ‘과외 선생님’이었던 셈이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였다. “관료들이 벤처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게 그의 회고다. 벤처란 용어조차도 생소해 했던 관리들을 대상으로 교습했던 ‘벤처 선생님’이 겪은 애로의 단면이다. 그러나 고생의 보람은 컸다. 본인이 원한대로 정부가 직접 멍석 깔고 관료가 대신 손발이 되어 룰을 만들어 주었다. 시장 만들고 룰 만들고 그 위에서 뛰니 그만큼 편하고 좋은 환경도 없었다. 곳곳이 규제일변도인 재벌 환경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 아닌가-. 1997년 7월. ‘벤처 선생’ 이민화의 꿈이 담긴 벤처육성법(벤처기업육성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당시 3당의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벤처육성법의 주된 내용은 벤처기업을 정부가 인증해 유리한 조건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게 해주자는 게 골자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부의 ‘벤처인증제=성공 보증수표’, ‘벤처지정=돈 다발’로 만든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전 회장의 사실상 벤처와 관련한 첫 작품인 이 제도는 현재 손질의 도마에 올라 있는 상태다. 말 많고 탈 많은 스톡옵션제도도 사실 이 전 회장이 아이디어를 댔다. 관료들까지 벤처행 열차를 타게 만든 스톡옵션제도는 지금은 유명무실한 상태로 약효를 상실해 버렸다. 어찌됐든 YS 말기 3당이 통과시킨 벤처 육성법은 정권교체 이후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반재벌기치 아래 재벌은 숨죽이고 있는 상황에서 벤처기업은 거칠 게 없었다. 양적인 팽창을 거듭했고, 그것은 정부의 실적으로 내세워졌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이회장의 아이디어는 끝이 없었다. 관(官)주도의 벤처육성책은 마치 박정희 시대의 중화학 육성책을 연상시키기도했다. “국민의 정부 아래 전국민으로 불붙어 나간 벤처붐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60년대 새마을운동이 떠오른다”는 우려의 관전평이 나올 정도였다. 이 전 회장은 그야말로 아이디어의 산실이었다. 벤처 정책의 사실상 입안자였다. 다소 엉뚱한 결과를 빚기도 했지만 ‘1백만 실업자 해결책’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IMF 위기 탈출에 매달려 있던 정부에게 이 전 회장의 실업 대책 아이디어는 구세주였다. IT(정보기술)와 인터넷 기반확대용 아이디어로 낸 대학생·직장인 1백만명 신규 고용 아이디어는 노동부의 1백만 실업자 대책으로 옷을 바꿔입고 발표되기도 했다. 이는 나중에 기술집약형인 벤처가 어떻게 굴뚝산업에서 퇴출된 실업자를 흡수하느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관료의 ‘벤처 선생’ 강남 빌딩을 벤처타운화로 몰고 갔던 벤처빌딩 지정제·기술담보제도·프라이머리CBO(채권담보부증권)제도 역시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 중 정부가 1조8천억원이나 쏟아부은 프라이머리CBO는 지금 ‘눈먼 돈’이란 낙인이 찍혀 그 후유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연을 다니며 ‘실험실 창업 운동’을 적극 주장했다. 막 불을 지피던 코스닥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많은 조언을 했다. 정부의 벤처정책은 벤처산업 초기 때처럼 모두 이 전 회장의 컨트롤 범위 내에 있었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마른 논에 불 붙듯 벤처열풍은 어느새 이 전 회장이 정부에 건의하는 수준을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이 전 회장이 주로 중소기업청이나 정통부 과기처 등 해당 부처 관리들을 만나 벤처산업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엔 각 부처마다, 지자체마다 벤처 관련 정책을 내놓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관료들 스스로가 이제 벤처라는 것을 학습하게된 것이죠. 하긴 리스크를 줄이고 보수적인 돈 장사를 해야 할 은행까지도 벤처투자에 경쟁적으로 열을 올렸으니까 이 전 회장이 가져다준 벤처 학습 효과는 대단했던 셈입니다.” 이 전 회장을 잘 아는 한 벤처 기업 사장의 말이다. 이 전 회장 자신도 메디슨의 부도 직후 중앙일보와의 단독기자회견을 통해 “기업인으로 내가 오버했다”고 소회를 밝힌 것도 이런 점과 관련해 다시 새겨볼 대목이다. 벤처기업가가 자기 본업인 기술 개발이나 회사 운영보다는 벤처정책 입안에만 더 신경을 쓴 결과는 오늘의 메디슨 부도로 증명되고 있다. 또한 오랜 연구와 검토를 거쳐 만들기보다는 정부가 ‘졸속’과 ‘한건주의식’으로 양산해낸 엉성한 벤처정책들은 결국 수많은 게이트로 벤처산업을 얼룩지게 한 원인이 됐다. 사실 그가 정부의 벤처 정책을 한 손에 놓고 요리한 파워의 근원이 뭘까에 대해서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이 전 회장의 뒤를 봐줬다는 얘기부터, 이 전 회장이 정치권에 ‘돈줄’ 역할을 했다는 얘기까지 다양한 추측들이 떠돌기도 했었다. 이에 대해 이 전 회장은 현철씨와는 일면식도 없으며 정치권 후원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벤처기업을 담당하는 정부부처A과가 이 전 회장을 키웠다는 것은 벤처기업인들 사이엔 공공연한 비밀에 속한다. 서로 밀고 당겨주며 벤처산업 초기, ‘영웅’으로까지 대접받던 그였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 벤처업계엔 이른바 ‘이민화 사단’이 형성되기도 했다. 주로 이 전 회장이 투자한 벤처기업들과 이 전 회장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교수·기업가들로 구성된 이 그룹은 벤처업계 전체를 좌지우지할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들은 많은 기업에 자금을 대고 아이디어를 대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이 98년 마이크로소프트사에 팔릴 위기에 처한 ‘아래아한글’ 살리기 운동에 적극 나선 것이 또 다른 ‘오버’의 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매각될 운명에 처한 아래아한글을 벤처기업협회·메디슨 등이 돈을 대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막자는 발상은 당시 국민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반발이 심했다. 회사 내부 자금 사정을 등한시한 채 대외적인 홍보 효과만 노리는 것이란 회사 직원·주주들의 반발도 많았다. 또한 외자유치를 적극 주장하던 IMF 위기 이후 정부 정책 기조와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었다. 당시 정부 당국자는 이같은 내용을 이 전 회장에게 전달하며 ‘자중’을 요구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또한 한글 살리기 운동의 결과로 한글이 살아난 게 아니라 ‘한컴 몸값 띄우기’가 계속돼 결과적으로 메디슨만 막대한 이익을 봤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 전 회장이 “어떤 의도를 갖고 한컴에 투자를 한 게 아니었냐”는 말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무리한 한컴 투자는 오히려 메디슨의 유동성 위기를 자초하는 불씨로 남아, 내내 이 전 회장을 괴롭히게 된다. 결국 메디슨은 한컴의 지분을 다시 외국인의 손에 매각하는 길을 걷게 된다.

금융기관 인수 시도 메디슨호는 2000년 주식시장 거품이 꺼지면서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벤처연방제’라는 허울 아래 추진한 무리한 확장 경영이 결국 화를 자초한 것이다. 97년 말까지 7백76억원에 불과했던 메디슨의 자본 총액은 온 나라가 벤처 열풍에 휘말렸던 99년 5천6백48억원으로 불어났다. 메디슨은 이때부터 기술개발은 뒷전인 채 벤처 투자에만 골몰하기 시작했다는 비난을 듣기 시작했다. 탄탄한 발판 없이 취약한 브랜드력 하나만 믿고 50여개 벤처기업에 8백억원을 투자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메디슨 신화의 몰락은 내부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차입금에 의존한 공격 경영과 무리한 방만 경영은 주식시장의 거품이 빠지자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메디슨은 지난해 매출 2천74억원에 당기순손실 1천백66억원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추락했고, 위기 극복을 위해 오스트리아의 자회사 크레츠테크닉을 제너럴일렉트릭(GE)에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에 나섰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유동성 위기에 봉착한 이 전 회장은 또다시 엉뚱한 곳에서 해법을 찾기 시작한다. 정공법보다는 편법으로 문제해결을 하려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2000년 당시 추진했던 금융기관 인수 추진이다. 2000년 7월, 그는 부족한 유동성을 보완하기 위해 금융기관을 인수해 ‘미국식 투자은행’을 하나 만들자는 발상을 내놓게 된다. 자신의 벤처연방에 금융기관까지 포진시켜 일종의 ‘사(私)금고’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재벌들이 금융기관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싶어하는 것과 전혀 다를바 없는 행태였던 것이다. 당시 부도 상태로 새주인을 찾고 있던 중앙종금에 이 전 회장은 2백억원을 출자해 인수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하지만 주주들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그러자 그는 다시 평화은행을 인수하겠다고 나서, 당시 주당 1천원대이던 평화은행 주식을 5천원에 사들이겠다고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이 역시 그와 함께 인수를 추진하던 벤처기업 협회 산하 벤처기업들의 자금난 심화로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지나친 '원칙론자' 그를 잘아는 한 벤처기업 사장은 그가 지나치게 이론적인 사람이란 평을 한다. 메디슨의 사원들조차 그가 염불처럼 외고 다니는 ‘벤처연방론’ ‘초생명기업론’ 등을 제대로 알기 힘들어 했다. 서울 강남경찰서 앞에 있는 메디슨의 구사옥을 찾으면 복도 곳곳, 심지어 엘리베이터 안에도 ‘초생명기업’에 대한 그의 이론이 빽빽이 씌어진 종이가 붙어 있었다. 사원들은 승진시험을 보려면 반드시 그 내용을 달달 외고 있어야 했다. 이 전 회장이 직접 참여, 진급 대상자들과 토론을 거친 후 합격 여부를 가리기도 했다. “마치 대학원 학위를 따기 위한 구술시험에 가까웠다”는 것이 메디슨의 한 직원의 말이다. 그는 벤처이론에 관한 한 국내 최고임을 자처했다. 많은 책을 집필하고, 강연도 많이 했다. 특히 우리 국민들의 ‘빨리 빨리’ 근성, 잘 뭉치지 못하는 성격 등이 오히려 ‘벤처 국민’으로 적절하다는 지론을 펴기도 했다. 이 같은 한국인 고유의 특성을 조합해 ‘한경영’이란 새로운 이론을 내놓기도 했다.

부끄럼 많은 학생 그는 스스로 자신의 벤처운동이 실제 60년대 새마을운동에 버금가는 새로운 운동이라 생각한 듯하다. 그는 자신이 쓴 한 글에서 ‘1960년대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이 전세계 개발도상국의 모델이 되었듯이 90년대 말 우리나라의 벤처산업 발전 모델이 전세계에 모범이 될 수 있다는 데서 벤처 발전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99년 ‘10만 웹마스터 양성운동’을 펼치기도 하는 등 거창한 구호성 국민운동을 펼치고 자신이 선봉에 서길 유독 좋아했다. 2000년 초 코스닥 활황으로 벤처 졸부 탄생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이 형성되자 그는 다시 ‘국민벤처펀드’를 조성해 전국민이 벤처 주식을 보유, 벤처 과실을 나눠먹도록 하겠다는 거창한 발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코스닥 거품이 꺼지면서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그를 잘 아는 한 벤처 사장은 이 전 회장에 대해 “그는 공익을 위한 일을 해야 신바람을 느끼는 사람 같았다”고 전한다. 지나친 ‘돈키호테’적 순수한 발상에 치우진 감성적 인물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기도 하다. 그는 어릴 적 유달리 부끄럼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냥 부끄럼을 타는 아이 정도가 아니라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무서워하는 소심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71년 그는 법관을 목표로 공부를 하다 당시 이모 판사의 ‘사법파동’을 목격하며 ‘공학도’로 진로를 수정했다. 한 법관이 소신과 원칙대로 판결했다가 정권의 미움을 받아 제주도의 술집에서 접대를 받았다는 이유로 그를 파면한 사건을 보며 그는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엔지니어의 길을 선택한다.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들어간 그는 데모로 얼룩진 캠퍼스에서 대학 4년을 ‘허송세월’하고 졸업 후 입학한 KAIST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다. 이때 익힌 초음파 관련 기술들이 그가 메디슨을 창업하는 밑거름이 됐다. 85년 실험실 동기들과 함께 십시일반으로 자본금 5천만원을 마련해 창업한 메디슨은 산부인과 병원에서 주로 쓰는 초음파 진단기와 관련해서는 세계적인 원천기술을 보유한 업체였다. 초음파와 관련해서는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세계 최초의 기술들을 내놓을 만큼 쟁쟁한 실력가들이 모인 이 집단에서 그는 밤잠을 잊은채 기술 개발에 몰두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 밥 먹으러 가는 시간이 아까워 여직원이 옆에서 김밥을 먹여주고, 자신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정도”였다고 회상할 정도로 기술로 승부를 걸었다. 덕분에 96년 세계 최고의 3차원 초음파 진단기를 개발하고, 세계시장 점유율 25%를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하게 된다. 이 같은 기술력을 근간으로 97년 금탑산업훈장 대통령상, 한국공학한림원에서 수여하는 한국 공학기술상 젊은 공학인상을 수상하였고, 99년 아시아위크지로부터 ‘아시아 밀레니엄 리더 20인’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 6월 비즈니스위크지 선정 ‘아시아 스타 50인’에 선정 밀레니엄리더 2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원리 원칙을 고수하는 독선적인 성격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그의 지나친 독단과 직선적인 성격이 제때 위기에 대응하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는 이같은 성격 탓에 주위 사람과의 마찰도 잦았고, 이로 인해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하기엔 역부족이었다고 주위 사람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해외로 가라” “싫다” 지난해 메디슨 주가하락의 책임을 지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그는 한국기술거래소 이사장으로 계속 활동하며 여전히 벤처정책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최근 심심찮게 메디슨의 부도 위기설이 흘러나오자 주위에서는 그에게 “잠시 해외로 가 있으라”는 고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난 떳떳하다. 도피하는 인상을 주기 싫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최근 부도 직전 그가 메디슨 주식 일부를 매각한 것도 빚을 갚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때 “재벌이 부럽지 않다”고 할 정도의 돈과 명예를 한 손에 쥐었던 이 전 회장. 그는 메디슨의 몰락과 함께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잃었다. 심지어 부도 직전까지도 빚에 허덕였다. 우리사주 매입용으로 은행권에서 빌린 돈의 이자를 갚느라 쩔쩔맸다는 후문이다. 메디슨의 부도는 한 벤처기업의 성공 신화 붕괴로만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이 전 회장이 크고 작은 벤처정책에 미친 역할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DJ 정부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벤처붐도 각종 게이트와 비리로 얼룩진 채 수렁에서 헤메는 ’졸작‘으로 평가될 전망이다. ‘벤처 전도사’ 이민화의 개인적 공과를 떠나서-.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비상계단 몰래 깎아"...대구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

2"올림픽 휴전? 러시아만 좋은 일"...젤렌스키, 제안 거부

3일론 머스크, 인도네시아서 '스타링크' 서비스 출범

4취업 준비하다 봉변...日 대학생 인턴, 10명 중 3명 성희롱 피해

5주유소 기름값 또 하락...내림세 당분간 이어질 듯

6아이폰 더 얇아질까..."프로맥스보다 비쌀 수도"

7 걸그룹 '뉴진스', 모든 멤버 법원에 탄원서 제출

8 尹 "대한민국은 광주의 피·눈물 위 서 있어"

9성심당 월세 '4억' 논란...코레일 "월세 무리하게 안 올려"

실시간 뉴스

1"비상계단 몰래 깎아"...대구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

2"올림픽 휴전? 러시아만 좋은 일"...젤렌스키, 제안 거부

3일론 머스크, 인도네시아서 '스타링크' 서비스 출범

4취업 준비하다 봉변...日 대학생 인턴, 10명 중 3명 성희롱 피해

5주유소 기름값 또 하락...내림세 당분간 이어질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