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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절도 없다’…아 옛날이여!

집도 절도 없다’…아 옛날이여!

박용학
박건배
안병균
김의철
장진호
최원석
“잘나가던 대그룹 오너였던 분이 이젠 ‘집도 절도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그가 살던 집은 경매에 부쳐져 남의 손에 넘어간 상태로 집 주인의 양해를 얻어 계속 살고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모든 걸 잊으려고 애쓰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의 한 측근이 전해준 그의 근황이다. 박 전 회장은 현재 자신의 소유였던 서울 이태원동에 있는 방 6개짜리 고급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경매된 주택으로 박 전 회장의 집이 아니라는 게 측근의 설명이다. 그는 지난 1997년 경기도 광주군 소재 그룹 연수원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구속돼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애착을 보였던 해태제과는 이제 외국 기업이 됐다. 해태는 지난해 UBS컨소시엄이 인수했다. UBS컨소시엄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법인을 설립, 전문경영인 체제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해태제과라는 브랜드는 그대로이지만 이미 박 전 회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회사가 됐다. 해태제과는 지난 45년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서 ‘해태제과합명회사’로 출범했다. 박병규(박 전 회장의 아버지)·민후식(해태유업 전 회장)·신덕발(해태관광 전 회장)·한달성씨 등 4명이 설립했다. 그러나 박 전 회장은 건설분야 진출과 인켈 인수 등 무리한 사업확장이 화근이 돼 97년 11월 그룹이 부도를 맞았다. 박 전 회장은 회사가 부도가 나자 “모든 걸 다 잃어도 좋으니 ‘해태제과’라는 브랜드만은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애원해 재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같은 이유로 그는 현재 돈이 거의 없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그는 한때 해외에 도피시킨 돈이 많다는 소문으로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박 전 회장이 해외에 숨겨놨던 돈을 역으로 들여와 해태제과를 재매입하려 한다는 풍문이 돈 것이다. 이와 관련 박 전 회장은 한 사석에서 자신이 돈을 챙기지 않은 이유를 솔직하게 밝히기도 했다. “나는 돈을 몰랐습니다. 해태제과라는 회사 오너였기 때문이죠. 돈을 따로 챙겨서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해할지 모르지만 그런 순진한 재벌 아들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기를 위해 어떤 사업을 다시 벌일 만한 재산을 따로 숨겨 놓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해태제과의 한 관계자는 “박 전 회장은 현재 자신의 측근이었던 사람조차 챙겨줄 수 없는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있다”며 “늦게 낳은 막내딸과 함께 지내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 전 회장이 ‘집에서 놀고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외환위기 이후 숱하게 떨어진 ‘재계의 별’들이 점차 세인의 관심에서 벗어나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부도 직후 억울하다고 호소하면서 재기의 의욕을 강하게 내비치던 모습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점차 세월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굴뚝 기업의 선구자를 자처하던 재계의 진 별들이 다시 떠오르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IT·벤처시대가 각광을 받으면서 이들의 중요성이 감소한 주변환경도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이들의 나이가 이제 만만찮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일부 인사들은 나이가 들어 건강이 허락치 않아 칩거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마음 비우고 칩거=박용학 대농그룹 전 명예회장은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박 전 명예회장은 회사가 부도난 뒤로는 일체 회사에 관여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그의 아들인 박영일 전 회장은 서울 필동에 개인 사무실을 차려 놓고 있다. 미도파 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얼마 전까지만도 일부에서 박 전 명예회장 일가가 자신의 심복들을 회사에 심어 놔 미도파 백화점을 원격지휘한다는 얘기가 있었다”며 “그러나 현재는 어떤 형태의 교류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 전 명예회장 일가와 미도파는 완전히 결별된 상태라는 설명이다. 그는 이어 “박영일 전 회장이 개인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것도 당장 재기를 모색하기보다는 딱히 소일거리가 없어 마련한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또 워크아웃 1호 기업이었던 고합의 장치혁 전 회장도 요즘은 조용히 지내고 있다. 그는 지난해 말까지 회사에 출근했다. 장 전 회장은 또 회사가 워크아웃을 당한 이후에도 전국경제인연합회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북한이 고향인 재계인사들과 함께 대북사업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 활동했다. 그러나 실패한 경영인이 여전히 회사에 남아 경영에 간섭한다는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결국 지난해에는 전경련의 대북 관련사업 위원장 자리를 내놓기도 했다. 그는 특히 중국에도 관심이 많아 마지막까지 열정을 보였다. 장 전 회장은 경기도 의왕과 경남 울산에 있는 고합 공장을 중국에 이전을 추진했다. 그는 이들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고 해당 부지에 아파트를 지으면 회사가 금새 회생될 것이라는 주장을 주변 사람들에게 강조하기도 했다. 고합 관계자는 “창업자인 장 전 회장은 지난해 11월까지 회사에 나와 회생을 위해 열심히 뛰셨다”며 “그러나 이제는 나이도 70을 넘겨 재기를 위한 활동을 하기에는 다소 무리라 요즘은 칩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고합은 현재 채권단에 의해 매각 등 청산 절차를 밟고 있고 있다. 석유화학 부문은 ‘KP케미칼’이라는 신설법인으로 재상장할 예정이다. 안병균 나산그룹 전 회장도 자택에서 칩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회장은 외부에 거의 얼굴을 내놓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섬유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안 전 회장은 재기할 여력이 없다”며 “한때 나산그룹의 일에 깊이 관여했던 그의 친동생은 현재 갈비집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한국의 월마트를 표방하며 유통업계의 기린아로 급성장하던 뉴코아 그룹의 김의철 전 회장은 요즘 투병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요즘 당뇨와 심장병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김 전 회장은 뉴코아 백화점과 할인점인 킴스클럽이 부도난 뒤 재기를 모색했다. 그는 일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땅을 이용해 부천에 ‘시마1020’이라는 유통점을 분양하면서 유통왕국 재건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또 인터넷 쇼핑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기에는 끝내 실패했다. 시마1020은 외국계 투자회사로 이미 넘어 갔다. 그의 재기 의욕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따라주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밖에 최순영 대한생명 전 회장과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나승렬 거평그룹 회장 등도 특별한 재기의 움직임 없이 칩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는 미련 못 버리고 뛰기도=화의 1호 대기업이었던 진로의 장진호 회장은 요즘도 외자유치와 자산매각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서초동 땅 일부 매각과 외자유치에 직접 관여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97년 이후 김선중 대표이사가 회사의 경영을 담당하고 있지만, 오너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 채권단에 담보로 맡긴 자신의 지분에 대해서는 조건 이행을 못할 경우 휴지조각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진로는 당시 채권단의 채무에 대해 5년거치 5년분할 상환을 유예받았다. 바로 올해 말이 5년째 되는 해인 것이다. 따라서 내년부터는 이자는 물론 원금을 상환해야 된다. 진로의 한 관계자는 “장 회장은 올해가 회사가 회생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해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은 외자유치와 땅 매각에 총력을 쏟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말했다. 최원석 동아그룹 전 회장도 아직 의욕을 굽히지 않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외공사 노하우와 인맥이 자신 만큼 있는 사람이 없는데, 이를 썩히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라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 전 회장은 지난해 말 중국도 방문했다. 중국 수로부(수자원을 담당하는 정부 기구로 우리의 수자원공사에 해당) 초청의 4박5일 일정이었다. 중국이 벌이는 남수북조(南水北調) 프로젝트와 관련해 최 전 회장의 자문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이 여행에는 이창복 전 사장 등이 동행했다. 이밖에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도 해외에 머물며 사실상 재기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현재 자서전을 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귀국을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김 전 회장이 정권 교체기를 이용해 새로운 모색을 시도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재기에 성공하는 사례도 나와=워크아웃 기업 2호였던 신원그룹의 박성철 회장은 재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회장은 워크아웃 이후에도 회사 경영에 관여해 진두지휘하면서 회생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채권단도 섬유업계 특성상 박회장이 직접 경영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었다. 신원의 경우 일시적인 금융비용 부담과 환율 변동에 따른 피해로 보고 박회장의 회사 내 역할의 중요성을 인정한 셈이었다. 대신 박회장은 신원건설과 신원유통·광명전기 등 섬유업 이외에는 모두 정리했다. 이에 따라 신원은 지난해 말 매출 5천억원에 당기순익 45억원을 기록했다. 신원은 지난해 자율추진 기업으로 전환한 데 이어 올해 상반기 중 워크아웃을 졸업할 전망이다. 박회장은 이런 공을 인정받아 98년에 이어 올해 다시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을 연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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