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비’ 지방행차에 숨죽이는 지방호족들
내수경기가 바닥을 찍던 지난해 12월 초, 전북 익산에 본사를 둔 하이트주조의 임직원들은 ‘ 지역경제 발전은 자도소주 한잔부터’라고 쓰인 대형 플랜카드를 앞세운 채 전북 도청 앞으로 향했다. 도청 앞에 모인 임직원들은 판매 부진으로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한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고향 소주를 마셔 달라며 시민들에게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이 회사는 지난 99년 57%이던 전북 지역내 시장점유율이 이듬해 38%, 지난해엔 31%로 곤두박질쳤다. 한때 20%대까지 떨어진 적도 있을 정도다. 원인은 진로였다. 진로가 ‘참眞이슬路’를 앞세워 전북시장에 맹공을 퍼부으면서 하이트주조의 밥그릇을 좁혀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충북·충남·강원·전남 지역도 마찬가지다. 주류전문가들은 지난해 영남권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이미 진로의 사정권에 들어갔다고 진단했다. 진로의 공세에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영남권도 결코 낙관할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올해 소주시장은 줄잡아 2조1천억원 규모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장을 놓고 진로와 두산·금복주·보해 등 전국 10개 소주업체들이 전국에서 먹고 먹히는 숨막히는 밥그릇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소주시장이 이렇게까지 달라진 것은 알코올 도수 22도짜리 순한소주가 등장하면서부터. 순한소주가 출현하면서 치열한 판촉경쟁이 촉발됐고, 이때부터 업체간 우열이 더욱 짙게 판가름나기 시작했다. 내수경기가 바닥을 찍었던 지난해, 진로와 두산 등 일부 메이저급 업체들은 판매량이 두 자릿수씩 증가하는 등 영업이 호조였다. 특히 진로는 지방에서 큰 매출을 거둬들였다. 이에 반해 지방 소주업체들은 일부 업체를 제외하곤 대부분 뒷걸음질쳤다. 진로에게 밥그릇을 빼앗긴 것이다. 지난해 진로는 수도권에서 90% 이상, 지방에서 30∼40%의 점유율을 장악했다. 이중 수도권은 전국 소주시장의 절반에 해당하는 곳으로 모든 소주업체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지역이다. 한때 지방 소주업체들은 황금시장인 수도권 공략에 앞다퉈 뛰어들었다. 금복주·보해·하이트주조·무학·대선·선양 등 수도권 공략에 눈독을 들이지 않은 업체가 없을 정도였다. 지방 업체들은 수도권 일대 할인점과 슈퍼마켓 등 유통매장은 물론 요식업소를 돌며 제품판촉에 열을 올렸다. 판촉비용도 수없이 쏟아부었다. 그러나 결과는 진로의 벽을 실감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수도권 판촉에 전력투구했지만 수도권의 터줏대감인 진로의 점유율이 오히려 상승세를 타며 90%를 넘어선 것이다. 반면 지방소주업체 중 수도권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판촉활동을 벌였던 보해의 경우 점유율은 1%를 넘지 못했다. 금복주·무학·대선 등 비교적 잘나가는 영남권 3총사도 1%를 밑돌기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이트맥주의 계열사인 하이트주조와 하이트소주도 수도권 판매량이 오히려 감소하면서 점유율은 ‘제로’를 향해 치달았다. 한마디로 지방 소주업체의 수도권 대공세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실탄만 낭비한 셈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진로의 반격이었다. 진로는 90% 이상 장악한 수도권 소주시장은 현 상태에서 묶어 두고 영업력이 허술한 지방시장을 공략하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주파수를 지방으로 돌린 진로의 계획은 상당부문 성공했다. 호남과 충청·강원 지역 소주업체들이 진로의 무차별적인 공세에 거의 모두 무릎을 꿇었다. 보해의 경우 지난 2000년 86%이던 전남시장 점유율이 지난해엔 80%로 낮아졌다. 진로의 공세가 격렬했던 지난해엔 한때 점유율이 75% 아래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진로와 법정싸움까지 벌이며 자존심 대결을 펼쳤던 두산도 수도권에선 상승세를 탔지만 텃밭인 강원도 시장을 유린당했다. 지난 2000년 57%이던 강원 지역 점유율이 지난해엔 52%로 밀려났다. 전북·충청 지역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전북에 뿌리를 둔 하이트주조는 시장점유율이 31%로 1년 새 7%포인트 하락했고, 충남·대전의 선양도 59%에서 50%로 낮아졌다. 강원 47%(2000년 41%)·충북 60%(59%)·충남 44%(35%)·전북 60%(52%)·전남 18%(8%)의 진로 점율율을 보면 이러한 변화를 금세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충북과 전북의 경우엔 향토기업보다 진로의 점유율이 오히려 높아 주객이 전도됐다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영남권도 진로의 참眞이슬路 공세에 미동하는 모습이다. 지난 2000년 6.53%이던 진로의 부산 지역 점유율이 지난해엔 6.63%으로 소폭 상승했다. 경북과 경남도 각각 4%, 3%를 기록했다. 진로의 지방공세가 성공하면서 보해·선양·하이트주조 등 지방 소주업체의 소주 판매량은 줄어든 반면 진로는 전년보다 14%나 크게 늘어난 14억6천8백만병을 기록했다. 이러한 숫자 변화는 올해 더욱 커질 것이란 게 진로측 설명이다. 이 회사는 올해 영남권 점유율 7%를 자신하고 있다. 한마디로 올해 영난권을 집중 공략 대상에 넣었다는 뜻이다. 진로는 이와 관련, 올초 임원인사를 단행하면서 마케팅 부서에서 오랫동안 잔뼈가 굵은 베테랑급 중역을 영남영업본부장에 앉혔고, 영업조직도 대폭 개편했다. 영남 지역 판매목표도 크게 올려잡았다. 유통업소에 대한 제품 공급을 늘리고 판촉활동도 개시했다. 요식업소에 대한 판촉물 지원도 강화했다. 진로는 지방 공세를 취하면서 지역민 환심사기 사업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진로의 김선중 회장은 지난달 강원도청에서 김진선 강원지사와 최종호 강원도장애인협의회장을 만나 장애인복지기금 10억원을 조성해 전달하기로 약속했다. 오는 2005년 6월까지 강원도 지역에서 판매되는 참眞이슬路의 수익금 중 일부를 적립해 기금으로 내놓기로 한 것이다. 진로는 강원도를 신호탄으로 이같은 사업을 충청, 호남, 영남까지 영역을 넓혀간다는 구상이다. 진로가 강원도 지역에 장애인돕기 기금을 기탁하자 이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두산이 즉간 반격에 나섰다. 두산의 김대중 사장은 지난 12일 강원도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오는 2006년까지 매년 4억원씩 총 20억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 약속으로 1차분 1억원을 이날 선뜻 내놓았다. 진로의 강원 인심잡기 행보에 대해 견제구를 던진 셈이다. 시민을 상대로 향토기업을 살리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하이트주조도 최근 판매 수익금 중 일부를 떼어내 ‘전북사랑기금’으로 내놓았다. 선양주조도 2002 안면도국제꽃박람회의 공식후원사로 나서면서 상당한 금액을 기금으로 조직위원회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로의 지역민 환심사기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올해 소주시장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안개정국이 예상된다. 진로와 두산·보해의 수도권 3파전과 진로와 지방 소주업체의 공수전, 롯데칠성의 소주시장 진입 등 수많은 변수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을 끄는 대목은 롯데칠성의 소주시장 본격 진출이다. 이미 지난해 12월 ‘한송이’로 소주시장에 명함을 내민 롯데칠성은 올 하반기쯤 본격 출사표를 던진다는 계획이다. 롯데는 소주를 직접 생산하는 방법과 기존 소주업체를 인수하는 방안을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 롯데칠성측에 따르면 경영난을 겪고 있는 대선주조는 물론 진로와 두산도 검토 대상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매각설이 꾸준히 나돌았던 대선주조는 롯데의 연고와 같은 부산에 본사를 두고 있고, 거래금액도 비교적 적다는 점에서 가장 유력한 업체다. 롯데칠성이 대선을 인수하고 소주시장에 가세할 경우 가장 타격을 받는 쪽은 당연히 영남 지역 업체들. 지난해 롯데칠성이 한송이 소주를 출시할 때 영남권 업체들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롯데가 부산에 연고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롯데칠성이 부산을 중심으로 영남권과 수도권 공략에 들어갈 경우 소주시장은 진로의 지방 공세와 지방 업체의 안방 수성 전략과 복잡하게 맞물리면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국으로 빠져든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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