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정몽헌 없는 현대號 장모 손에 달렸다

정몽헌 없는 현대號 장모 손에 달렸다

사위가 경영하는 회사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장모가 매입한 주식이 결국 한 그룹의 앞날을 결정짓는 ‘마스터 키’가 됐다. 사위는 최근 자살한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고, 장모는 김문희(75) 용문학원(용문중·고) 이사장이다. 정회장의 조용한 우호세력일 뿐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던 김이사장은 최근 정회장 사후 현대그룹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요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김문희 이사장이 2000년 1월부터 6월까지 사모은 주식은 현대엘리베이터 1백4만2천70주(지분율 18.57%). 당시 정몽헌 회장과 정몽구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그룹 계열사들이 핵분열을 일으키고 있을 때 김이사장이 사재를 털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대거 매입했다.
현대가(家)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그가 갑자기 나타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1백억원어치(당시 6개월 동안 현대엘리베이터의 주당 평균 가격은 1만원대)를 사들인 이유는 정회장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왕자의 난 이후 정몽헌 회장이 차지한 현대상선·현대증권·현대투신·현대택배·현대아산 등의 모기업 역할을 했던 현대건설이 부실화되면서 그룹이 구심점을 잃자 정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를 통해 계열사를 지배하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결국 그는 장모에게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사도록 부탁했고, 김이사장은 거액을 투입했다. 정회장이 장모에게 현대엘리베이터 대주주 자리를 넘겨준 이유는 당시 채권단에서 부실 계열사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사재출연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에서는 ‘처가를 통한 지배체제 강화’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3년 뒤 김이사장이 실제 그룹의 앞날을 좌우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현대상선의 고위 관계자는 “현대그룹의 경영체제는 대주주인 김문희 여사와 현정은(미망인) 씨 등 가족이 협의해서 결정할 일”이라고 말했다.
김문희 이사장은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소피아(上智)대에서 수학한 엘리트 여성이다. 재력가였던 고 김용주 전남방직 창업자의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그는 평범한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

일찍부터 사회활동에 눈을 뜬 김이사장은 한국전쟁 직후 YWCA 국제친선부 위원을 역임했고, 걸스카웃연맹 총재와 여성유권자연맹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아버지가 세운 용문중·고의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그는 일흔이 넘은 지금도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의 고문으로 뛰고 있다. 고 이양구 동양그룹 회장이 설립한 서남재단엔 이화경 동양제과 사장과 함께 이사로 등재돼 있다. 이렇듯 폭넓은 사회활동을 통해 그는 정치와 경제·교육 분야에서 다양한 인맥을 구축했다.


김이사장의 남편이자 정몽헌 회장의 장인은 현영원(76) 현대상선 회장이다. 현회장은 줄곧 해운업체의 대표를 맡는 등 해운업계의 산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현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선주협회 회장직을 내놓았고, 사위 장례식에서도 주위 사람의 부축을 받고 걷는 등 몸이 불편해 보였다. 이런 이유로 현대그룹의 미래는 현대엘리베이터 대주주이자 비교적 건강이 양호한 김이사장의 손에 달려 있을 것으로 현대측 인사들은 예상한다.
김이사장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75세의 나이에다 줄곧 학원사업에만 전념한 그가 현대그룹의 경영권에 관심이 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딸만 셋을 두었기 때문에 딱히 자신의 대주주 자리를 물려줘 경영수업을 받게 할 아들도 없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김이사장이 한때 국내 최대 재벌가의 자손들이었던 딸과 손자·손녀들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랄 것 같지는 않다. 현대그룹의 한 소식통은 “김이사장이 가족들을 통해 회사 경영을 맡아 그룹을 지배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재계 소식에 밝은 한 금융계 인사는 “현재 현대 계열사를 운영하는 전문경영인을 그대로 두고, 김문희 이사장 편에서 이들을 감시하는 사외이사를 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외이사는 이사회 회장을 맡아 전문경영인을 독려하고 주주 중시 경영을 할 수 있도록 이사회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경영인체제는 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대주주의 전횡을 차단하는데 유용하지만, 노조의 눈치를 보느라 제때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지 못하는 단점도 있다. 이런 단점을 막기 위해 경영자를 감시할 사외이사를 두고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확대하도록 독려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김이사장이 이 안을 따른다면 우선 그가 갖고 있는 대주주의 권한을 이용해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 명망 있는 사외이사를 선임해야 한다. 그리고 이사회를 구성해 이사회 회장으로 그를 앉힌 뒤 김이사장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측 관계자는 “대주주의 이해관계가 경영진의 의사로 대변되는 한국 사회에서 복잡하게 사외이사를 두고 전문경영인을 감시할 필요가 없다”며 “대주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임시 주총을 소집해 경영자를 바꾸면 된다”고 말했다. 이미 정회장의 측근들로 장악된 조직과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이 좀더 현실적 대안이라는 설명이다.현대그룹은 이미 정회장이 자살하기 전부터 회장 부재시를 대비한 비상계획을 세워두었다. 지난 7월 말 정회장이 대검 중수부에서 대북송금과 관련해 조사받고 난 뒤 측근들은 정회장 구속에 대비한 플랜을 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계획에 따르면 현대건설 출신으로 현대전자 부사장과 현대 구조조정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강명구(57)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겸 현대택배 회장과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당시 그룹 차원의 대응 방안을 세운 바 있는 노정익(50) 현대상선 사장이 공동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도록 돼 있다. 현대아산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신임했고, 정몽헌 회장도 유서에서 대북사업을 이어갈 인물로 지목한 김윤규 사장이 정회장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현대측 관계자는 “2000년 이후 정회장이 전문경영인에게 계열사 경영을 일임했기 때문에 정회장 부재시에도 각 계열사는 독립적으로 운영될 것”이라고 전했다.

김이사장이 어떤 방안을 택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위의 자살로 받은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해 그는 매일 출근하던 안암동의 용문학원 이사장 사무실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딸과 손자를 위해 그는 어떤 형태로든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몽헌 회장의 친가쪽인 정씨 형제들은 도와줄 여력도 없고 그럴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장례식장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밝혔듯이 현대차 그룹은 대북사업에 참여하지 않고 자동차 부문에만 전념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몽준 의원 역시 현대중공업 고문으로 있지만 경영에선 손을 떼 회사 차원의 지원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망인 현정은씨가 있지만, 현씨는 지금껏 평범한 아내로 남편의 내조에만 전념한 주부여서 현대그룹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현재로선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잇는 인물이 가족에서 나올 때까지 김이사장이 대주주의 자리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 계열사나 다른 기업이 현대엘리베이터를 인수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현대그룹측 인사들의 눈길이 김이사장의 의중을 읽느라 분주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하루 한 팩으로 끝”...농심, 여성 맞춤형 멀티비타민 출시

2미래에셋, ‘TIGER 글로벌BBIG액티브 ETF’→’TIGER 글로벌이노베이션액티브 ETF’ 명칭 변경

3한투운용 ‘ACE 주주환원가치주액티브 ETF’, 주주가치 섹터 중 연초 이후 수익률 1위

4한국투자證, 홍콩서 IR행사, 'KIS 나잇' 개최

5‘비상경영’ 신세계면세점,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

6삼성화재, ‘도로 위의 포청천’ 퀴즈 이벤트 오픈…내달 1일까지

7BGF리테일, ‘전략혁신부문’ 신설...정기 인사 단행

8티머니, 리보와 시각장애인 이동성 향상 위한 업무협약 체결

9더작심, 경주에 신규 진출..연이은 건물주 직접 운영 사례로 주목

실시간 뉴스

1“하루 한 팩으로 끝”...농심, 여성 맞춤형 멀티비타민 출시

2미래에셋, ‘TIGER 글로벌BBIG액티브 ETF’→’TIGER 글로벌이노베이션액티브 ETF’ 명칭 변경

3한투운용 ‘ACE 주주환원가치주액티브 ETF’, 주주가치 섹터 중 연초 이후 수익률 1위

4한국투자證, 홍콩서 IR행사, 'KIS 나잇' 개최

5‘비상경영’ 신세계면세점,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