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은 餘音까지 들어야 제 맛”
“국악은 餘音까지 들어야 제 맛”
음악을 듣고 죽은 사람이 있다? 지난해 인터넷을 통해 “황병기의 <미궁> 이란 곡을 세 번 이상 들으면 죽는다더라”, “음반을 틀지 않고 그냥 놔둬도 소리가 난다”는 등의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고, 급기야 작가가 홈페이지를 폐쇄해야만 했던 해프닝이 있었다. 1975년에 초연된 <미궁> 은 가야금의 전통적 연주법 대신 여지껏 듣지 못했던 색다른 소리와 느낌을 시도했던 곡이다. 무용가 홍신자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신문 한 구절을 읽는 소리들이 함께 하고 있어 듣기에 좀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창작국악의 개척자로 불리는 황병기 교수는 어떤 생각에서 이런 곡을 만들었을까? 미궁> 미궁>
올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았다. 역시 비가 오락가락했던 늦여름 날 북아현동 언덕에 있는 황병기 교수의 하얀색 3층집을 찾았다.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황병기 교수와 자리를 마주하면서 <미궁> 을 둘러싼 ‘괴담’ 같은 소문 얘기부터 꺼내 보았다.
“원래 제 스타일은 <침향무> 같이 명상적이고 아름답다고 얘기되는 계통의 음악입니다. 그런데 1950년대 말부터 서양현대음악이나 미술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75년 월간지 <공간> 100호 기념으로 명동국립극장에서 국제현대음악제를 개최할 예정이고, 그때 초연을 부탁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전위음악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창작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이 음악을 듣다가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뛰쳐나간 사건이 있었고, 문공부로부터 연주금지명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음악평론가들은 모두 이 작품을 실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라는 관점에서 다루기도 했습니다.”
미학이 전공인 필자가 지금 들어도 전위적이고 형식파괴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75년 당시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처럼 실험적인 시도의 이면에 새로운 예술에 대한 작가의 의도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가늠해 보게 된다.
“미술은 구상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20세기 추상미술을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그렇지만 음악은 추상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대상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 이런 음악에 20세기 들어서는 웃음소리 ·신음소리 등과 같은 실제의 소리를 개입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구체음악이라고 합니다. <미궁> 도 우선은 그런 맥락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가야금 연주방법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연주방법에서 탈피하려 했습니다. 첼로의 활이나 대나무 등으로 두드리거나 켬으로써 이제껏 전혀 듣지 못했던 소리들을 나타내려 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이란 기본적으로 소리를 통해서 그 무엇을 담아내는 예술이라 할 때, 그처럼 새로운 소리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종전의 가야금이 내지 못했던 표현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질문을 해보았다.
“종교적인 내용인데, 생명체로서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담고자 했습니다. 처음 부분의 가야금 소리는 초혼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홍신자 씨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언어 이전의, 즉 문화 이전의 소리에 해당합니다. 중간의 신문 읽는 소리는 문화를 상징하는 언어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연주 당일 아침 신문을 읽도록 해서 문화의 현재 모습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그리고 끝부분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낭독하는 소리는 피안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궤적을 가야금 소리와 사람 소리를 결합하여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실험적이고 형식파괴적인 예술일수록 이면에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뒷받침돼야만 할 것이다. 예술이란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대중과의 공감을 통해 발전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주금지명령 받았던 <미궁>미궁>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황병기는 부산 피난시절인 16세 때 우연히 가야금 소리에 매혹된 후 지금까지 52년 동안 하루도 가야금에서 손을 뗀 적이 없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당시 서울대 음대 학장의 요청으로 신설된 국악과에 출강했고, 국립국악원 ·이화여대에서도 강의를 했다. 사업가였던 부친의 권유로 극장 ·화학공장 등의 경영에 관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야금 연주와 작품 발표는 지속적으로 해왔으며, 74년부터 2001년까지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재직했다. 90년 평양에서 있은 범민족통일음악회 전통음악 연주단장,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지냈고, 지난해에는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첼리스트 장한나와 협연 무대를 펼친 바 있다. 현재는 이화여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이런 황병기 교수에게는 항상 ‘창작국악의 새 장르 모색’이라는 설명이 따라다닌다. 전통음악의 유산으로 간주돼온 조선시대의 것으로부터 탈피라는 점을 들기도 한다. 특히 그의 창작품 <침향무> 는 신라적인 예술세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과연 신라적인 것과 조선시대의 것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신라적인 것은 서역으로부터, 혹은 불교로부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한시대에 서역적인 것이 받아들여지면서 토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무릇 문화라는 것이 외래문화로서 타자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개성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이지요. 그러던 것이 삼국시대로 오면서는 서역적인 것이 우리 고유의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것은 외래의 것으로 여겨졌지요. 우리가 향피리라 할 때 그것은 서역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장구도 마찬가지고요. 반면 당피리는 삼국시대 당나라로부터 온 외래적인 것이고요. 이런 관점에서 삼국시대 토속적인 것에는 서역으로부터 온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경향이 강했습니다. 조선이 유교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터부시했다면, 삼국시대에는 나체에 종교적 신성함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지요. 따라서 내가 말하는 ‘신라적’인 것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음악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불교적 법열(法悅)의 세계로 이행함을 의미하며, <침향무> 는 그런 신라인의 춤곡이라 할 것입니다.”
서역은 중국의 서쪽이란 의미이고, 침향이 인도에서 나는 향료나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침향무> 는 서역의 향기 속에서 추는 춤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황 교수의 음악이 명상적 사유에 적합한 곡이라는데 춤곡이라니, 좀 의아했지만 명상과 법열의 경지가 통한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보다 더 의아했던 것은 과연 신라의 자료들이 남아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음악이란 사람들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료가 미비합니다. 세종 이전의 악보조차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신라 불상의 자세와 모양을 통해 그것이 춤을 출 때 나타나는 동영상 속의 한 스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불상이 움직일 때 혹은 춤을 출 때의 동작과 그에 따른 음악을 창안해봤습니다.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을 거듭하면서 만든 창작곡이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인터뷰라고 말하고 강의를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범민족통일음악회로 평양에 다녀온 이야기를 청해 보았다.
“1990년이니까 아마도 내가 북한을 민간인으로 서는 처음 갔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 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소프라노겳으0즯장구가 어우러진 음악이었지요. 이 곡은 남북통일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0세기가 탄압과 전쟁을 통해 각자의 우리를 내세우면서 빚어낸 갈등의 역사였다면, 그런 모든 것들을 넘어 인류 전체가 우리이고 하나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한 것이었지요. 다시 말해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이뤄가는 과정을 담아내려 한 것입니다. 남북문제에서부터 인류 전체의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악기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가 결합되고, 악기도 서양과 한국의 것이 결합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이 하나라는 의미에 보다 가까이 간 시도로 북한 음악가와의 공동작업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당시 북한의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 성동춘 씨와 합작한 <통일의 길> 이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마 북한과의 합작이라는 최초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우리 음들은 한국화의 붓자국 같은 것”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듯싶어 최근 우리 문화예술계의 화두인 한국문화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꺼내 보았다. 그가 서양 음악과 한국음악의 차이를 줄비빔악기와 줄튕김악기의 차이를 들어 설명한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라는 점에서부터 시작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대를 이용하는 줄비빔악기는 음의 발생부터 끝남까지 사람이 컨트롤하는 악기입니다. 이에 반해 가야금처럼 손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줄튕김악기는 사람이 음을 발생만 시키고,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이 일 때처럼) 여음(餘音)들이 파문처럼 퍼져나가면서 지속되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 여음에서 자연과의 동화를 이루게 되고, 결국에는 사람과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생각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여음이란 무엇일까. 줄을 튕기고 난 후의 잔향음이라면 한국화의 여백과 같은 것일까.
“서양사람들이 여음을 애프터톤(aftertone)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정확한 의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양에는 여음과 같은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양에서는 소리와 침묵의 경계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침묵도 소리와 같은 음악의 요소라는 것이지요. 여음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음악의 음들은 한국화의 붓자국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텐데요. 한국화에서 일필휘지를 말하는데, 더 이상 고쳐서는 안 되고 하나의 흐름으로서 여백과 상호관련 속에 존재합니다. 여기서도 붓 자체를 자연이라고 한다면, 붓자국은 그 자연과 사람의 합일을 나타내는 것이고 여백이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이지요.”
서양음악은 벽돌을 쌓는 것과 같고, 한국음악은 각기 다른 모양의 정원석을 배치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동의를 구해 보았더니 “서양음악에서는 화음이나 하모니를 중시하고 그를 위한 음들의 통제를 중시한다면, 한국음악은 한국화에서 선이 갖는 독자성을 존중하듯이 개개의 음들을 존중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음악에서는 두 음을 겹쳐서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이런 설명들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흔히 고루하다고 생각하는 국악의 세계가 무궁무진할 것만 같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는 만큼 더 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것이 국악의 진정한 대중화가 아닐까 생각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 보았다.
“나는 계획을 미리 세워두고 하지 않습니다. 음악과 가야금이 좋아서 시작했고 지금까지 해왔듯이,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실행에 옮기게 되면 하고, 미리 계획을 세워 놓지는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을 존중합니다.”
황 교수의 연주가 듣고 싶어져서 조심스럽게 청해 보았다. 지금까지의 모습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고, 신이 나는 것 같아 보였다. 해박한 이론과 고민을 담아 국악이론의 대가로 꼽히지만 그는 역시 예술가였다. 가야금 연주를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철저한 노력과 자기관리를 통해 자신의 음악세계를 가꿔가는 음악가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기관리가 우리 문화의 지금 모습에도 적용돼야만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통일의> 우리는> 침향무> 침향무> 침향무> 미궁> 공간> 침향무>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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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엔 유난히 비가 많았다. 역시 비가 오락가락했던 늦여름 날 북아현동 언덕에 있는 황병기 교수의 하얀색 3층집을 찾았다.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황병기 교수와 자리를 마주하면서 <미궁> 을 둘러싼 ‘괴담’ 같은 소문 얘기부터 꺼내 보았다.
“원래 제 스타일은 <침향무> 같이 명상적이고 아름답다고 얘기되는 계통의 음악입니다. 그런데 1950년대 말부터 서양현대음악이나 미술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75년 월간지 <공간> 100호 기념으로 명동국립극장에서 국제현대음악제를 개최할 예정이고, 그때 초연을 부탁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전위음악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창작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 이 음악을 듣다가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뛰쳐나간 사건이 있었고, 문공부로부터 연주금지명령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음악평론가들은 모두 이 작품을 실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라는 관점에서 다루기도 했습니다.”
미학이 전공인 필자가 지금 들어도 전위적이고 형식파괴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75년 당시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처럼 실험적인 시도의 이면에 새로운 예술에 대한 작가의 의도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가늠해 보게 된다.
“미술은 구상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20세기 추상미술을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그렇지만 음악은 추상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대상을 모방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다.) 이런 음악에 20세기 들어서는 웃음소리 ·신음소리 등과 같은 실제의 소리를 개입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구체음악이라고 합니다. <미궁> 도 우선은 그런 맥락의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가야금 연주방법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연주방법에서 탈피하려 했습니다. 첼로의 활이나 대나무 등으로 두드리거나 켬으로써 이제껏 전혀 듣지 못했던 소리들을 나타내려 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이란 기본적으로 소리를 통해서 그 무엇을 담아내는 예술이라 할 때, 그처럼 새로운 소리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종전의 가야금이 내지 못했던 표현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질문을 해보았다.
“종교적인 내용인데, 생명체로서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담고자 했습니다. 처음 부분의 가야금 소리는 초혼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홍신자 씨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언어 이전의, 즉 문화 이전의 소리에 해당합니다. 중간의 신문 읽는 소리는 문화를 상징하는 언어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연주 당일 아침 신문을 읽도록 해서 문화의 현재 모습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그리고 끝부분의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낭독하는 소리는 피안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궤적을 가야금 소리와 사람 소리를 결합하여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실험적이고 형식파괴적인 예술일수록 이면에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뒷받침돼야만 할 것이다. 예술이란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대중과의 공감을 통해 발전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주금지명령 받았던 <미궁>미궁>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황병기는 부산 피난시절인 16세 때 우연히 가야금 소리에 매혹된 후 지금까지 52년 동안 하루도 가야금에서 손을 뗀 적이 없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당시 서울대 음대 학장의 요청으로 신설된 국악과에 출강했고, 국립국악원 ·이화여대에서도 강의를 했다. 사업가였던 부친의 권유로 극장 ·화학공장 등의 경영에 관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야금 연주와 작품 발표는 지속적으로 해왔으며, 74년부터 2001년까지 이화여대 한국음악과 교수로 재직했다. 90년 평양에서 있은 범민족통일음악회 전통음악 연주단장,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을 지냈고, 지난해에는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첼리스트 장한나와 협연 무대를 펼친 바 있다. 현재는 이화여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
이런 황병기 교수에게는 항상 ‘창작국악의 새 장르 모색’이라는 설명이 따라다닌다. 전통음악의 유산으로 간주돼온 조선시대의 것으로부터 탈피라는 점을 들기도 한다. 특히 그의 창작품 <침향무> 는 신라적인 예술세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과연 신라적인 것과 조선시대의 것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신라적인 것은 서역으로부터, 혹은 불교로부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한시대에 서역적인 것이 받아들여지면서 토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무릇 문화라는 것이 외래문화로서 타자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개성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이지요. 그러던 것이 삼국시대로 오면서는 서역적인 것이 우리 고유의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것은 외래의 것으로 여겨졌지요. 우리가 향피리라 할 때 그것은 서역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장구도 마찬가지고요. 반면 당피리는 삼국시대 당나라로부터 온 외래적인 것이고요. 이런 관점에서 삼국시대 토속적인 것에는 서역으로부터 온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경향이 강했습니다. 조선이 유교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터부시했다면, 삼국시대에는 나체에 종교적 신성함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지요. 따라서 내가 말하는 ‘신라적’인 것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음악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불교적 법열(法悅)의 세계로 이행함을 의미하며, <침향무> 는 그런 신라인의 춤곡이라 할 것입니다.”
서역은 중국의 서쪽이란 의미이고, 침향이 인도에서 나는 향료나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침향무> 는 서역의 향기 속에서 추는 춤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황 교수의 음악이 명상적 사유에 적합한 곡이라는데 춤곡이라니, 좀 의아했지만 명상과 법열의 경지가 통한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보다 더 의아했던 것은 과연 신라의 자료들이 남아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음악이란 사람들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료가 미비합니다. 세종 이전의 악보조차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신라 불상의 자세와 모양을 통해 그것이 춤을 출 때 나타나는 동영상 속의 한 스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불상이 움직일 때 혹은 춤을 출 때의 동작과 그에 따른 음악을 창안해봤습니다.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을 거듭하면서 만든 창작곡이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인터뷰라고 말하고 강의를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범민족통일음악회로 평양에 다녀온 이야기를 청해 보았다.
“1990년이니까 아마도 내가 북한을 민간인으로 서는 처음 갔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 라는 곡을 발표했는데, 소프라노겳으0즯장구가 어우러진 음악이었지요. 이 곡은 남북통일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0세기가 탄압과 전쟁을 통해 각자의 우리를 내세우면서 빚어낸 갈등의 역사였다면, 그런 모든 것들을 넘어 인류 전체가 우리이고 하나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한 것이었지요. 다시 말해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 이뤄가는 과정을 담아내려 한 것입니다. 남북문제에서부터 인류 전체의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악기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가 결합되고, 악기도 서양과 한국의 것이 결합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이 하나라는 의미에 보다 가까이 간 시도로 북한 음악가와의 공동작업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당시 북한의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 성동춘 씨와 합작한 <통일의 길> 이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마 북한과의 합작이라는 최초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우리 음들은 한국화의 붓자국 같은 것”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듯싶어 최근 우리 문화예술계의 화두인 한국문화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꺼내 보았다. 그가 서양 음악과 한국음악의 차이를 줄비빔악기와 줄튕김악기의 차이를 들어 설명한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라는 점에서부터 시작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대를 이용하는 줄비빔악기는 음의 발생부터 끝남까지 사람이 컨트롤하는 악기입니다. 이에 반해 가야금처럼 손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줄튕김악기는 사람이 음을 발생만 시키고,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이 일 때처럼) 여음(餘音)들이 파문처럼 퍼져나가면서 지속되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 여음에서 자연과의 동화를 이루게 되고, 결국에는 사람과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생각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여음이란 무엇일까. 줄을 튕기고 난 후의 잔향음이라면 한국화의 여백과 같은 것일까.
“서양사람들이 여음을 애프터톤(aftertone)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정확한 의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양에는 여음과 같은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양에서는 소리와 침묵의 경계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침묵도 소리와 같은 음악의 요소라는 것이지요. 여음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음악의 음들은 한국화의 붓자국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텐데요. 한국화에서 일필휘지를 말하는데, 더 이상 고쳐서는 안 되고 하나의 흐름으로서 여백과 상호관련 속에 존재합니다. 여기서도 붓 자체를 자연이라고 한다면, 붓자국은 그 자연과 사람의 합일을 나타내는 것이고 여백이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것이지요.”
서양음악은 벽돌을 쌓는 것과 같고, 한국음악은 각기 다른 모양의 정원석을 배치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동의를 구해 보았더니 “서양음악에서는 화음이나 하모니를 중시하고 그를 위한 음들의 통제를 중시한다면, 한국음악은 한국화에서 선이 갖는 독자성을 존중하듯이 개개의 음들을 존중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음악에서는 두 음을 겹쳐서 사용하지 않습니다”라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이런 설명들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흔히 고루하다고 생각하는 국악의 세계가 무궁무진할 것만 같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아는 만큼 더 들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것이 국악의 진정한 대중화가 아닐까 생각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 보았다.
“나는 계획을 미리 세워두고 하지 않습니다. 음악과 가야금이 좋아서 시작했고 지금까지 해왔듯이,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실행에 옮기게 되면 하고, 미리 계획을 세워 놓지는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을 존중합니다.”
황 교수의 연주가 듣고 싶어져서 조심스럽게 청해 보았다. 지금까지의 모습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고, 신이 나는 것 같아 보였다. 해박한 이론과 고민을 담아 국악이론의 대가로 꼽히지만 그는 역시 예술가였다. 가야금 연주를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철저한 노력과 자기관리를 통해 자신의 음악세계를 가꿔가는 음악가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기관리가 우리 문화의 지금 모습에도 적용돼야만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통일의> 우리는> 침향무> 침향무> 침향무> 미궁> 공간> 침향무>미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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