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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호 기자 동행체험기

이석호 기자 동행체험기

날이 풀리자 영아원생들이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영아원 어린이를 안고 있는 신세계 남자직원과 기자(오른쪽에서 두번째).


서울 하왕십리 화성영아원… “큰 의미보단 작은 행동이 필요” ‘걱정이다. 대학 동아리 활동 이후 처음 가는 봉사활동인데….’ 수화기를 들고 전화 다이얼을 누르며 슬슬 긴장이 됐다. “애들하고 잘 놀아주기만 하면 돼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신세계 여직원의 낭랑한 목소리가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아, 예….” 지난 3월9일 오후 2시. 기자가 신세계 백화점 직원들과 함께 찾아간 곳은 성동구 하왕십리 2동에 위치한 화성영아원. “오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이번 봉사활동의 팀장 격인 김미경 대리가 따듯하게 맞아준다. 긴장된 마음이 좀 느슨해졌다. 이런저런 질문에 김대리는 “이 영아원은 5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고, 0세부터 취학전 아동(8세)까지 보호하고 있으며, 신세계 봉사단은 한달에 두번 온다”는 기초적인 정보를 말해줬다. 또 “아이들은 안아주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을 잘 따르며, 오늘은 자전거 타는 날이라 힘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안심도 시켜줬다. 팀장을 방패막이로 기자임을 암시하며 ‘오늘 좀 봐주면서 시키세요’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남자분, 이리 와서 자전거 좀 꺼내 주세요.” 말하는 사람을 먼저 보고, 뒤를 돌아보는데 근처에 남자라곤 나밖에 없었다. “저요? 예….” 스무대가 넘는 세발자전거가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몇 안 되는 남자 직원과 함께 자전거를 애들에게 나눠줬다. 모처럼 날이 풀려 자전거를 탄다고. 애들이 밖으로 나오자 몇몇은 들어가 청소를 했다. 대부분은 능숙하게 자전거를 탔다. 더러 의욕만 앞서는 애들도 있었다. 오늘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이런 초보 운전자들의 자전거를 끌어주는 일. 좁은 마당에서 이리저리 자전거를 끌고다니는데 운전자들의 요구 수준이 까다로웠다. 분명하지 않은 발음과 어휘로 방향을 지시하는 ‘상전’을 모시는 게 쉽지는 않은 일. 조금만 딴청을 피면 이 ‘상전’이 울었다. 애가 울면 봉사자와 선생님들의 시선이 몰린다. ‘야, 한번만 봐줘라.’ 봉사자 중 남자가 눈에 띄어 다가갔다. 스스로 ‘나이롱’ 참가자라는 권재린 대리다. “처음에는 일도 바쁜데 왜 이런 걸 시키나 생각했어요. 하지만 일단 한번 와 보면 사회공헌이니, 윤리경영이니 하는 명분보다 더 강력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는 거죠.” 일단 와 보라는 말이다. 한참 애들이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자전거를 몰고 있는데 씩씩한 아줌마 한 분이 다가왔다. 대뜸 “차 좀 태워줄 수 있냐”고 묻길래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타라”는 소리와 함께 갓난애기부터 7살 어린이까지 5명이 차에 올랐다.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조다. 그 씩씩한 아줌마는 영아원 선생님. 아이들 표현으로는 ‘엄마’다. 7살짜리는 아랫니가 흔들려서, 나머지 4명은 예방 접종을 하러 보건소로 가는 길이다. 서툰 길을 가는 와중에 기자라고 ‘자수’하니 그 ‘엄마’는 좀전의 씩씩한 모습과 달리 좀 다소곳한 어투로 “신세계 직원인 줄 알았어요”라고 한다. ‘음… 신세계 직원들은 보통 이 정도 대접을 받는군.’ 아직 젖먹이들도 많아 예방접종하러 갈 땐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조수석에서 7개월 된 남자아이를 안고 가는 이정원씨는 연신 “아이고, 이 이쁜 것을…”을 연발했다. 애가 있는 엄마다. “직원들이 봉사활동 귀찮아하지 않나요?”라는 의도적인 질문에 “이런 일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라는 반문이 돌아왔다. 애 엄마인 정원씨에겐 사회공헌이라는 단어보다는 불쌍한 애들이 눈에 먼저 들어오는 듯했다. 보건소에 도착하니 치과에 갈 7살짜리 여자아이와 기자만 남겨졌다. 7살쯤 되면 말귀 알아듣고 사리분별이 있어 애 보는 일이 힘들진 않다. 문제는 이 ‘와이 걸’(why girl)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 주는 일. ‘말 몇마디 해주는 게 뭐 어려울까?’라고 생각하지만 7살짜리와 대화해 본 사람들은 그 난감함을 짐작할 것이다. 끝도 없는 질문들…. 10여명의 ‘엄마’들이 50여명의 어린이들에게 일일이 해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대화다. 그제서야 원장 선생님과 김미경 대리가 말한 ‘잘 안아줘라’는 말이 생각났다. 다시 영아원으로 돌아왔다. 자전거 시간이 끝나고 이제는 자유시간이다. 모두 애들 하나씩 안고 있었다. ‘나에게도 안길까?’ 이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한 애가 팔을 들어올리며 다가왔다. 얼씨구나 안아줬다. 혼자 멀뚱멀뚱하게 있는 것보다 나으니까. 팔이 슬슬 아파왔다.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애를 간신히 내려놓자 또 다른 아이가 다가왔다. 이번에 4살쯤 돼 보이는 ‘대형’이었다. 못 본 척 눈을 돌리는데 4살은 그렇게 느리지 않다. 어느새 앞에 서 있었다. 주위의 시선도 신경쓰이고, 애도 끈질기게 다가와 외면할 수가 없었다. 품만 비어 있으면 애들이 달려든다. ‘음… 팔힘이 중요하군.’ 아이를 안고 봉사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병철 과장은 “처음에 한번 왔다가 다시는 안 오려고 했다”고. 헤어질 때 우는 애들이 괴로웠고, 가끔씩밖에 올 수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 하지만 그는 이제 “그런 복잡한 생각보다는 일단 와서 단 몇시간이라도 애들과 재밌게 놀아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바꿨다. “여기서 이렇게 여러 부서 사람 만나면서 몰랐던 면도 많이 보게 돼요. 회사에서 별로였던 사람도 좋게 보이기도 하고….” 신세계 백화점의 자율봉사대 ‘짱가’의 회장이기도 한 강은희씨의 설명이다. 봉사활동이 자칫 팍팍해지기 쉬운 회사 생활에 윤활유도 되는 셈이다. 신세계에선 1년간 12시간씩 봉사활동을 권장한다. 봉사활동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불이익은 없지만 열심히 참가하면 평가 때 가산점이 있다. 회사는 봉사활동 팀에서 요구하는 물품이나 인력을 지원한다. 크리스마스·어린이날 선물이나 영아원의 보호벽 등은 회사에서 지원해 준 것. 또 직원들이 한 달 동안 성금을 모으면 그 액수만큼 회사에서 똑같이 성금을 낸다. 매칭그랜트(matching grant)제도다. 보통 매월 직원들이 1백20만원 정도 모으고 회사에서 그만큼 돈을 내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가장 등을 돕고 있다. 상당히 젊은 ‘엄마’로 보이는 김미난 선생님은 자원봉사자로 왔다가 눌러앉은 경우다. 김선생님은 “최근 2∼3년 사이에 기업체에서 꾸준히 봉사활동 오는 경우가 늘어났다”고 했다. 기업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이 늘어난 것과 때를 같이한다. 매일 50명과 싸우는 김선생님이 봉사자에게 하는 부탁 한마디. “와서 편안하게 있을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애들과 놀아주세요.” 괜히 큰 뜻 품지 말고 애들이랑 장난이나 열심히 치란 얘기다. 영아원에선 사회공헌은 잊고 애들만 생각하면 될 일이다. 오후 5시쯤 되자 봉사자들은 한 사람씩 슬금슬금 도망쳤다. 한꺼번에 나가면 애들이 울기 때문. 다시 회사로 들어가면 이들은 협력업체에 아쉬운 소리도 하고 상사의 눈치도 보는 직장인으로 돌아간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직장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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