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암젠, 잠에서 깨어나다
'거인' 암젠, 잠에서 깨어나다
▶ 암젠의 R&D 책임자 로저 펄머터. 임상실험 책임자 월러드 디어. CEO 케빈 셰어러. 마케팅 책임자 조지 모로. 병리학자 데이비드 레이시 (왼쪽부터) |
생명공학업체 암젠(Amgen)은 25년 전 유전공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에 초점을 맞춰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출범했다. 현재 연간 매출 1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한 암젠은 근육질의 10대 히피족 같다. 기존 제약업체들은 100여 년 전 미 동부 연안에서 생겨나 여러 화합물을 생산하며 숱한 질병 퇴치에 앞장섰다. 그들 기업보다 몇 세대 뒤에 등장한 암젠은 할리우드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서 의약품이 아닌 인간 단백질을 복제·생산했다.
포브스가 ‘2004 올해의 기업’으로 선정한 암젠은 이름있는 몇몇 대형 제약업체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매출 기준으로 암젠은 제약업계 13위이지만, 시장가치 기준으로는 6위다. 암젠의 시가총액 800억 달러는 엘리 릴리(Eli Lilly)보다 150억 달러,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Bristol-Myers Squibb)보다 300억 달러 크다. 매출은 두 업체가 암젠보다 각각 40%, 120% 많다.
암젠의 CEO 케빈 셰어러(Kevin Sharer)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25년 역사의 생명공학업체 암젠은 동부지역의 100년 된 제약업체들과 다른 뭔가가 있다”며 “10대 같은 암젠은 앞날이 창창하다”고 말했다.
암젠은 그동안 빈혈과 암치료에서만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1991년 이후엔 베스트셀러 신약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파킨슨병·루게릭병·혈소판 감소증 치료제에 수백만 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
전립선암 치료제는 임상실험까지 거쳤지만 당국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일은 식욕억제 호르몬 렙틴(Leptin)을 2000년 암젠 자체의 임상실험에서 폐기한 것이다.
월스트리트는 암젠이 그려낸 희비의 쌍곡선을 잘 알고 있다. 지난해 암젠의 주가는 3%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해 맞수 지넨테크(Genentech)는 44%나 올랐다. 4개 분야에서 신약 10종을 승인받은 지넨테크는 현재 시장가치가 암젠의 두 배다. 지넨테크의 주식은 주당순이익(EPS)의 74배, 암젠은 38배에서 거래되고 있다. 도이체방크는 암젠의 주가가 올해 10% 하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머크(Merck)의 진통제 바이옥스(Vioxx)가 리콜되고, 파이저(Pfizer)의 소염진통제 셀레브렉스(Celebrex)가 심장발작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오면서 제약업계 주식이 전반적으로 된서리를 맞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암젠은 ‘연구의 르네상스’를 눈앞에 두고 있다. 어느 때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신약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뇨병·관절염·낭창·비만·암을 겨냥한 40종의 신약 후보가 임상 전 단계나 임상단계에 들어가 있다. 회사 역사상 신약 후보가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다. 90년대를 통틀어도 22종에 불과했다. 암젠의 연구책임자 로저 펄머터(Roger Perlmutter)는 “보물창고 위에 앉아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르네상스의 징후는 최근 몇 달 사이에 나타났다. 암젠은 지난해 3월 혁신적인 신약 한 가지를 승인 받았다. 신장투석에 따른 합병증을 치료하는 센시파(Sensipar)는 연간 매출 7억 달러의 효자상품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골수이식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쇠약증세 치료제인 암젠의 신약 케피반스(Kepivance)도 승인했다. 케피반스는 화학요법 후 골수를 이식받은 환자의 입안이 타는 듯한 증세(구강 점막염)를 예방·치료하기 위해 유전공학으로 재조합한 대체 단백질이다. 매출은 3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골다공증 치료제인 ‘AMG 162’는 이보다 훨씬 짭짤한 수익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AMG 162는 이미 9,000여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최종 임상실험에 들어갔다. 암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임상실험이다. AMG 162는 약이 아니다. 골 흡수에 관여하는 단백질인 오스테오프로테제린(OPG)을 본뜬 단(單)클론 항체, 즉 실험실에서 만든 항체 단백질이다. OPG는 뼈를 부서지게 하는 제2의 단백질을 무력화한다.
암젠 연구진은 10여 년 전 쥐의 배자(胚子) 내장에서 OPG 유전자를 우연히 발견했다. AMG 162는 언젠가 50억 달러에 달하는 골다공증 치료제의 시장 판도를 바꿀 것이다. 매주 복용해야 하는 머크의 포사맥스(Fosamax)와 달리 1년에 두 번 주사를 맞으면 되고, 효과도 훨씬 크기 때문이다. 셰어러는 “AMG 162가 대박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애널리스트들은 AMG 162 등 암젠의 신약이 시장에 선보이려면 3년 정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암젠에서 신약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은 5년 전 셰어러가 CEO에 취임한 뒤 추진한 조직 재정비의 덕이다.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나 미 해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70년대 해군에서 잠수함 엔지니어로 복무했다. 82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컨설팅업체인 매킨지(McKinsey), 제너럴 일렉트릭(GE), 장거리 전화회사 MCI 등의 컨설턴트로 일하다 92년 암젠에 합류했다. 2000년 5월 암젠의 3대 CEO로 취임했다.
그는 CEO에 취임한 뒤 고위 임원 10명 가운데 8명을 교체했다. 2002년엔 이뮤넥스(Immunex)를 110억 달러에 인수해 관절염 치료제 시장에 진출했다. 2003년 13억 달러에 툴라릭(Tularik)도 사들였다. 툴라릭은 암겢榮?치료제에 주력하는 캘리포니아주 베이에어리어에 소재한 제약업체였다. 기업인수로 연구인력은 종전의 두 배인 4,000명으로 늘었다. 신약개발에 집중할 만한 여력이 생긴 셈이다.
암젠은 80년 4월 8일 네 명의 벤처캐피털리스트가 설립했다. 최초의 생명공학업체인 지넨테크가 설립된 지 4년 뒤였다. 이들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애봇 래버러터리스(Abbott Laboratories)에서 화학자 조지 래스만(George Rathmann)을 영입해 암젠의 경영까지 맡겼다. 래스만은 그 뒤 10년간 암젠에 몸담게 된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사우전드오크스에 암젠의 터를 잡았다. 그리고 자금이 거의 바닥나자 83년 기업공개(IPO)로 4,000만 달러를 끌어모았다. 암젠은 애초 유전공학으로 혈암(頁岩)에서 석유를 추출하는 유기물질, 닭의 성장 촉진을 위한 인공 단백질, 청바지 염색용 천연 염료 대체품인 남색 인공 염료 같은 신종 특수 화학물질 제조에 손댔다.
IPO 이후 래스만은 획기적인 빈혈 치료제 개발에만 매달렸다. 빈혈 환자는 적혈구 수치가 떨어져 기력이 쇠하게 마련이다. 암젠의 분자생물학자 린푸쿤(林福坤)은 83년 적혈구를 만드는 호르몬인 에리스로포이에틴(erythropoietin) 유전자를 복제했다. 린은 인간의 에리스로포이에틴 유전자를 햄스터의 난소 세포에 주입해 다량의 에리스로포이에틴 호르몬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암젠은 빈혈치료제 에포젠(Epogen)을 개발해 85년 임상실험에 착수할 수 있었다. 에포젠은 89년 신장질환자의 빈혈치료제로 승인받았다.
그러는 사이 재정적 압박을 받게 된 암젠은 85년 에포젠 라이선스를 존슨 앤 존슨(J&J)에 판매했다. 빈혈이 아니라 화학요법으로 기력이 쇠한 암환자에게 약을 만들어 팔 수 있는 권리였다. 90년 J&J는 에포젠의 복제품인 프로크리트(Procrit)의 시판 승인을 얻었다. 암젠의 몫 수십억 달러가 J&J로 흘러들었다. 그 뒤 수년 동안 암젠과 J&J는 법정 다툼을 벌이게 된다. 98년 후반 암젠에 매우 유리한 쪽으로 법원의 중재결정이 내려졌다.
제약·의료 정보솔루션 제공업체 IMS 헬스(IMS Health)는 현재 암젠의 아라네스프가 미국의 빈혈치료제 시장 중 26%, 프로크리트가 38%를 점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라네스프의 시장점유율은 꾸준히 올라가고 있다. 이들 치료제가 나오기 전엔 빈혈 환자들이 위험이 따르는 수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의사들은 중증 환자에게만 수혈했다.
88년 래스만은 CEO 자리를 내부 인사인 고든 바인더(Gordon Binder)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2년 뒤 암젠에서 나와 아이코스(Icos)를 설립했다. 아이코스는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Viagra)의 경쟁제품인 시알리스(Cialis)를 제조하는 업체다.
91년 암젠은 두 번째 안타를 날렸다. 백혈구 수치를 높여주는 유전자 조작 단백질인 뉴포젠(Neupogen)의 승인이 떨어진 것이다. 이어 투여 횟수를 더 줄인 후속타 뉴래스타(Neulasta)도 내놓았다. 뉴포젠과 뉴래스타는 화학요법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암환자의 염증을 막아준다.
2000년 바인더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은 셰어러의 눈에 암젠은 나사가 좀 빠진 듯했다. 암젠은 J&J의 강력한 마케팅 공세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느슨한 조직이었다. 셰어러는 “독점 기업이 완전경쟁 환경 속에서도 번창한 유례가 없다”고 경고했다.
2001년 초반 셰어러가 취한 조치 가운데 하나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GlaxoSmithKline)의 마케팅 귀재 조지 모로(George Morrow)를 영입한 일이다. 모로는 잘나가는 편두통 치료제 이미트렉스(Imitrex)를 출시하는 데 한몫한 인물이다. 셰어러는 캘리포니아주 지도와 학교 안내서를 한아름 안고 어느 토요일 오전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모로의 집으로 찾아갔다.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하라고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암젠에 합류한 모로는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같은 대형 암센터와 계약하기 위해 판매인력 800명을 총동원했다. 그는 팀 실적에 따른 보너스 대신 성적이 좋은 개별 직원에게 많은 보너스를 지급하는 제도로 전환했다.
셰어러는 2001년 면역학자 펄머터를 R&D 부서 책임자로 끌어들였다. 펄머터는 암젠의 문제는 아이디어 부재가 아니라 주력 부문 부재에 있다고 판단했다. 암젠은 인력이 자사의 세 배 정도 되는 대형 제약업체에서나 시도할 법한 기초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성공 가능성이 떨어지는 초기 단계 프로젝트를 모두 폐기했다. 또 자신이 일했던 머크의 화학자 폴 레이더(Paul Reider)를 전격 영입했다. 레이더는 머크에서 에이즈 치료제인 크릭시반(Crixivan)의 생산공정을 설계한 주인공이다. 레이더는 현재 생물학자 토머스 분(Thomas Boone)과 함께 ‘하이브리드’ 개발을 책임지고 있다. 하이브리드는 생명공학 기술로 만든 복잡한 단백질 의약품의 효능과 기존 의약품의 유동성을 함께 지닌 독특한 신종 화합물이다.
셰어러는 펄머터의 연구 재조정이 효과를 발휘하는 사이 기업인수로 눈을 돌렸다. 2001년 후반 워싱턴주 시애틀의 생명공학업체 이뮤넥스가 휘청거리자 잽싸게 달려들어 110억 달러에 인수했다. 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거래인 이뮤넥스 인수는 대도박이기도 했다. 이뮤넥스는 류머티스성 관절염 치료제인 엔브렐(Enbrel)의 수요를 터무니없이 낮춰잡는 실수를 범했다. 엔브렐 복용자는 8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약을 사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성난 고객이 4만 명이었다. 덕분에 엔브렐 매출은 8억 달러 선에서 맴돌고 있었다.
합병 소식이 새나가자 주가가 13%나 곤두박질쳤지만 암젠은 이뮤넥스의 생산 지연을 바로잡기 위해 ‘해결사’ 100명을 파견했다. 이들은 새는 파이프를 보수하고 맞지 않는 부품도 교체, 2002년 12월 이뮤넥스 공장을 재가동했다. 엔브렐의 지난해 매출은 46% 급증한 19억 달러로 추산된다. 공급이 늘어난 데다 마른버짐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는 주장 덕이다. 애널리스트들은 엔브렐의 연간 매출이 최고 4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엔브렐보다 더 유망한 암젠의 새 화합물 가운데 하나가 패니투무맵(panitumumab)이다. 현재 패니투무맵은 결장암 치료제로 최종 임상실험 단계, 폐암 치료제로 중간 단계에 접어들었다. 패니투무맵은 암세포만을 겨냥해 죽이는 ‘표적지향성’ 약물이다. 원리는 임클론 시스템스(ImClone Systems)의 에르비툭스(Erbitux)와 비슷하다. 하지만 에르비툭스와는 달리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 같지는 않다.
또 다른 암치료제 ‘AMG 706’은 1세대 표적지향성 의약품을 개선한 약물이다. 1세대 의약품이 암 유발 단백질을 하나만 차단했다면 AMG 706은 동시에 6개나 차단한다. 임상실험은 폐암 치료제로 초기, 희귀성 위암 치료제로 중간 단계에 있다.
암젠의 연구진이 발견한 단백질 BAFF는 면역체계를 자극해 항체 생성에 나선다. 연구진은 2000년 BAFF 수치가 높은 쥐들이 낭창 같은 증상을 일으키기 쉽다는 사실에 접했다. BAFF가 소모성 자가면역질환인 낭창이 발생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강력한 정황 증거였다. 자가면역질환이란 ‘자가항체’가 자신의 조직을 공격해 생기는 질병이다. 암젠은 현재 BAFF 차단제의 초기 임상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낭창과 류머티스성 관절염 치료제로 출시하기 위해서다.
빈혈·화학요법·관절염과 관련된 암젠의 매출은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암젠의 매출 증가율은 무려 25%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EPS는 30% 증가할 것 같다. 여기에는 이뮤넥스·툴라릭 인수와 관련된 대손상각비 9억 달러는 포함되지 않았다.
암젠의 앞날이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일부 애널리스트는 지난해 암젠의 매출 증가율이 15%에 그칠지 모른다고 분석했다. 암젠의 핵심사업인 빈혈치료제 매출이 감소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트랜스캐리오틱 세러피스(Transkaryotic Therapies)와 로슈 홀딩(Roche Holding) 등 암젠을 추격하는 경쟁업체도 훨씬 많아졌다. 트랜스캐리오틱은 1년 뒤 유럽에서 에포젠의 경쟁제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로슈의 빈혈치료제 CERA는 최종 임상실험 단계에 들어갔다. 일반 의약품 제조업체들 역시 에포젠을 카피약으로 저렴하게 생산할 계획이다. 암젠이 IPO를 할 때만 해도 몇 안 됐던 미국의 상장 생명공학업체 수가 지금은 314개에 이른다.
암젠이 동부의 기존 업체들보다 여전히 뛰어나고 혁신적임을 입증하는 데 앞으로 2년은 매우 중요하다. 셰어러는 신경이 더러 곤두서는 일도 있다고 털어놓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제품들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껏 극적인 성장을 일궈냈기 때문에 앞날도 낙관한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선미' 없는 선미 NFT?...가격 폭락에 발행사 "로드맵 이행"
2데브시스터즈 ‘쿠키런: 모험의 탑’, 일본 현지 CBT 시작
3美 유통업체 세대 교체?...아마존, 월마트 분기 매출 제쳐
4주부부터 직장인까지…BC카드 서비스 개발 숨은 조력자
5고려아연 운명 3월초 갈린다...법원, 임시주총 가처분 결론
6"부산, 식품은 다른 데서 사나?"...새벽배송 장바구니 살펴보니
7테무, 개인정보 방침 변경…“지역 상품 파트너 도입 위해 반영”
8알트베스트, 비트코인 재무준비자산으로 채택…아프리카 최초
9조정호 메리츠 회장 주식재산 12조원 돌파…삼성 이재용 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