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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의 칼날 세운 최태원 SK 회장… “시련은 끝나고 도전만 남았

‘대전환’의 칼날 세운 최태원 SK 회장… “시련은 끝나고 도전만 남았

최태원 회장
지난 1월3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SK 신년 교례회
지난 2월 미국 SKC 조지아 공장을 방문한 최태원 회장(왼쪽에서 셋째)
위기는 새로운 도전을 낳는다. 2003년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분식회계와 경영권 위협이라는 ‘시련’을 만난 SK그룹은 과감한 지배구조 개혁과 시스템 경영이라는 실험을 시도했다. 시장은 이를 ‘포스트 재벌’ 실험이라고 부른다. 3월 11일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 고비’는 넘었다. 이제 최태원 SK 회장이 제시하는 ‘뉴 SK’의 실체를 보여줄 차례다. <편집자>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사암리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자리 잡은 ‘SK아카데미’는 1975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기업연수원이다. 지난해 4월 SK그룹 창립 51주년 기념식을 치른 곳도 이곳이다. SK아카데미 원장을 맡고 있는 이노종 부사장은 “(연수원이) 인근 사암저수지를 보듬듯 안고 있어 위에서 내려다보면 금계포란형(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길지(吉地)”라고 소개한다. 굳이 이런 해설이 아니더라도 연수원 건물 3개 동이 말쑥하게 들어서 있고 그 아래로 야트막하게 저수지가 보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저절로 평온함을 선사받는다. 그 저수지를 마주 보고 SK그룹의 1세대인 고(故) 최종건·종현 회장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그룹을 창업한 최종건 회장은 오른손을 들어 무언가 지시하는 모양이고, 최종현 회장은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한때 두 회장의 2세대들이 동상의 시선이나 표정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평온한 모습이다. 그 앞으로 조그만 표석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 SK그룹이 금과옥조처럼 아끼는 ‘SKMS’(SK 경영체계)가 곱게 새겨져 있다. SKMS는 79년 최종현 회장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된 이후 최태원 SK㈜ 회장 대에 이르기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수정돼 왔는데, 최근에 상징적인 변화가 생겼다. 최종현 회장이 주장했던 ‘기업의 존재 가치는 이윤 극대화’라는 경영 이념이 ‘이해 관계자들의 행복 극대화’로 바뀐 것이다.

“이윤 극대화에서 행복 극대화로” 지난해 4월 최태원 회장은 신임 임원과의 대화에서 “이해 관계자의 행복 극대화가 기업 경영 성공의 열쇠”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제주도에서 열린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경영의 목표를 이윤 극대화에서 직원과 주주, 모든 이해 관계자의 행복 극대화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기업의 존재 이유가 ‘고객의 가치’에서 비롯되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치를 창출하는 주체인 구성원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고객과 구성원을 우선적인 가치로 제시한 것이다. ‘토론해서 분석하고 협의해서 합의한다’는 그룹 특유의 스타일대로 CEO들의 분과 토의를 거쳐 ‘행복 극대화’가 결정됐다. ‘행복’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표현에 대해 SK 관계자는 “복잡다단해진 사회에서는 기업이 이윤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회사와 고객, 주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행복-. 최태원 회장은 이 말 앞에 어느 누구보다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아이로니컬하게도 SK의 최고 가치로 ‘행복’을 내세웠지만 정작 그룹의 선장인 자신은 최근 몇 년간 행복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3년 ‘하늘이 내려주신 시련’이라고 표현했던 SK네트웍스(옛 SK글로벌)·SK해운 분식회계 사태가 터졌고, 소버린자산운용이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 지분의 14.99%를 매입하면서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 놓인 것이다. ‘소버린 악몽’에서 벗어난 것은 3월 11일. 이날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SK㈜ 주주총회에서 최태원 회장의 이사 재선임안은 60.63%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외국인 주주 40% 이상이 최 회장에게 지지를 보냈다. 소버린 측은 의결권 주식의 34.8%, 표결 참가 주식의 38.16%를 얻는 데 그쳤다. 불과 1시간25분 만의 완승이었다. 이로써 SK㈜는 소버린의 경영권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가운 소식은 또 있다. SK네트웍스 경영 정상화 차원에서 시장에 매물로 내놓은 워커힐호텔에 대해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쪽으로 채권단 의견이 굳어지고 있는 것. SK네트웍스는 지난해 매출 13조6000억원에 당기순이익 4600억원을 올렸다. 세전영업현금흐름(EBITDA)이 4478억원으로 채권단이 제시한 목표치(3994억원)를 훌쩍 넘겼다. 실적이 호전되면서 시장에서는 SK네트웍스가 내년 초에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졸업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예정보다 2년가량 앞당겨진 것이다. 이에 따라 SK 오너 일가의 애정이 담겨 있는 워커힐호텔을 굳이 매각할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가 나온 것. 73년 SK에 인수된 워커힐은 최종건 창업 회장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추진한 사업이었고, 최 회장을 비롯해 SK 오너 일가가 자주 찾는 ‘고향’같은 곳이다. 무엇보다 최태원 회장과 SK의 지배구조 개혁 ‘실험’이 합격점을 얻고 있다는 데 주목된다. 2003년 6월 SK그룹은 개혁을 선언했다. 그룹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했고,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선포했다. 지난해 10월에는 ‘포스트 재벌’을 선포하면서 “그룹 체계는 브랜드를 공유하는 네트워크”라고 정의했다. 이름하여 ‘뉴 SK’ 선언이다.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오너의 독단적인 경영을 견제하기 위해 최 회장이 채택한 새로운 시스템은 ‘이사회 중심의 경영’이었다. SK㈜는 지난해 1월 주총에서 사외이사 비율을 50%로 확대했다. 그런데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지배구조 개선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그 비율을 70%로 늘렸다. 사외이사들로 하여금 감사위원회를 직접 감독하도록 했으며, 1000만 달러 이상의 내부거래는 사외이사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사외이사로는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조순 전 경제부총리 등 명망가가 영입됐다. 분식회계 사태, 소버린의 M&A 위협에 따른 ‘수세적’인 투명경영 방침 발표였지만 내용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일부에서는 한국 재벌 개혁의 시금석이 될 수 있는 사건이라고까지 칭찬했다.

“이젠 내실 넘어 성장으로” 이런 ‘파격’은 최 회장에 의해 주도됐다. 최 회장은 사외이사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이사회 사무국을 신설하고, 자신의 집무실을 옮기면서까지 사외이사에게 별도 사무실을 제공했다. 그는 “이사회 중심 경영은 이제 싫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이는 생존의 문제이고 왕도가 없다”고 설득했다. “지금은 비효율적으로 보여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고, 장기적으로 보면 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2004년 11월 ‘팀장과의 대화’) 이런 시스템 개혁에 대해 사외이사인 조순 전 경제부총리는 “이사회 멤버 10명 가운데 7명의 사외이사가 아시아 최대 정유회사인 SK㈜의 조타수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SK의 이사회 중심 경영이 투명 경영의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지배구조 개선 노력 덕분인지 SK㈜는 지난해 매출 17조3900억원, 당기순이익 1조6400억원 등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렸고, 국내외 신용평가기관들도 SK㈜의 신용등급을 잇따라 상향 조정했다. 이제 최 회장의 또 다른 관심사는 사업구조 개편이다. 화두는 ‘글로벌 SK’다. SK 관계자는 “최 회장이 SK㈜ 회장에 취임한 뒤 지난 6년 동안 내실 강화에 중점을 뒀다면 이제는 성장에 초점을 맞춰 신규사업과 해외사업에 주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중국 지주회사를 설립하면서 SK는 중국에 ‘제2의 SK’를 설립한다고 선언했다. 최근엔 미국 사업에 적극적이다. 최 회장은 지난 2월 미국을 방문, SKC의 필름 생산공장인 조지아 공장과 어스링크 등 현지 사업장을 둘러보면서 직접 미국 비즈니스를 챙기고 있다. 이에 발맞춰 SK는 ▶SK㈜가 지분을 참여한 페루·브라질 유전에서 생산한 에너지를 미국에 공급하고 ▶SK텔레콤과 미국 어스링크의 합작법인인 ‘SK어스링크’를 통해 미국에서 이동전화 서비스를 실시하며 ▶신약 개발 사업을 강화한다는 내용의 미국 진출 3대 전략을 확정한 바 있다. 이런 사업구조 개편에 따라 SK는 조만간 있을 그룹 임원 인사에서 핵심 라인을 미국·중국 등에 전진배치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부가가치가 낮고 미래 전망이 불투명한 사업은 정리한다는 방침도 잡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일부 계열사에 SK㈜ 투자회사관리실 임원이 투입돼 경영 컨설팅을 받고 있는 상태다. 이렇게 조직과 사업을 ‘수술’하고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최태원 체제가 강화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 새로운 시작의 무대가 3월 25∼26일로 예정된 ‘CEO 춘계 세미나’가 된다. SK그룹은 3월 25∼26일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에서 CEO 세미나를 연다. SK는 정례 CEO 세미나를 통해 그룹의 어젠다를 제시하고 있는데, 지난해 10월 제주도 세미나에서 최 회장은 앞서 지적한 대로 ‘뉴 SK’를 주문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경영권 방어가 훨씬 더 절박한 과제였다. 세미나 프로그램에 ‘만약 내가 TC라면’(If I were TC, what should I do? TC는 최태원 회장의 영문 약칭), ‘TC vs. 이해 관계자 간 역할극’ 등이 주요한 비중을 차지했을 만큼 당시 SK의 사정은 ‘절박함’ 자체였다. 그러나 이제는 분위기가 완연히 다르다. 이번 세미나에서 최 회장은 이사회 중심 경영과 글로벌 사업 강화를 재삼 강조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태원 식 경영’의 서막이 오르는 것이다.

3월 30일 공판이 마지막 고비? 그렇다고 100% 안심할 처지는 아니다. 증권가에서는 SK의 지배구조 개선은 ‘미완성’이라고 분석한다. 모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아직까지 계열사와 특수관계인의 SK㈜ 지분이 15.71%에 불과해 최 회장이 SK㈜에 대한 안정적인 지분을 가진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최 회장 측이) 자체적으로 지분을 늘렸다기보다 삼성전자·팬택과 기관투자가 등 ‘백기사’가 있었기에 경영권 방어가 가능했다”며 “보다 근본적인 방법으로 오너 측 지분을 늘리지 않는 한 SK그룹은 적대적 M&A 위협에 계속 노출돼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뉴 SK호(號)’‘뉴 최태원호’에 완벽한 시동이 걸리려면 또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 분식회계 사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3월 30일, SK네트웍스·SK해운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보석으로 풀려난 최 회장의 결심 공판이 열린다. 현재로선 1심 때보다는 형량이 낮아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그러나 결과에 따라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최태원의 봄’은 4월부터다. 봄바람은 먼저 불었는데, 진짜 봄은 올 것인가?

최태원 회장 '시련에서 도약까지' 1998년 9월 최태원 SK㈜ 회장 취임
2003년 2월 SK글로벌 등 분식회계 혐의로 손길승·최태원 회장 구속
“좀 더 나은 지배구조 갖는 회사 만들려고 했다”
4월 소버린자산운용, SK㈜ 지분 14.99% 매입
5월 SK글로벌 실사 결과 발표 (4조3000억원 자본잠식)
6월 18일 그룹 구조조정본부 해체
12월 “지배구조·사업구조·재무구조 개선에 전념하겠다”
-임직원에게 보낸 e-메일에서
2004년 1월 30일 SK㈜, 지배구조 개선방안 발표
2월 12일 최태원 회장, 지배구조 개선 의지 표명
“사외이사 70%의 독립적인 이사회 구성하겠다”
2월 24일 SK텔레콤 오너 일가 사의
3월 12일 SK㈜ 정기주총, 소버린과 표 대결서 승리
4월 “이해 관계자의 행복 극대화가 경영 성공의 열쇠”
-신임 임원과의 대화에서
10월 ‘뉴 SK’ 출범 선언
그룹을 ‘브랜드와 기업문화 공유하는 네트워크’로
10월 25일 소버린, SK㈜ 임시주총 소집 요구
2005년 3월 11일 SK㈜ 정기주총, 경영권 방어 성공
3월 25일 그룹 CEO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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