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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지갑을 열었지만…

부자는 지갑을 열었지만…

요즘 나오는 경제지표를 보면 꽁꽁 얼어붙었던 내수시장에도 봄 기온이 완연한 듯하다. 실제로 현장에서도 소비 회복의 불씨는 댕겨진 모습이다. 불황에도 지갑을 닫지 않았던 부자들의 씀씀이가 커지고 있고 잔뜩 움츠렸던 중산층도 연말 상여금과 주가 상승 등으로 목돈을 만지면서 기지개를 켜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온기가 여전히 아랫목에만 머물고 있는 탓에 윗목의 서민에게는 봄 소식이 멀어 보였다.
토요일인 지난 3월 5일 오후 서울 용산 전자랜드 2층. 주로 수입가전 제품을 파는 이곳은 좁은 통로마다 오가는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와 MP3플레이어 등을 판매하는 코너에서 흥정을 벌이는 20, 30대는 물론 TV나 냉장고 등을 둘러보는 중장년층 부부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동부이촌동에 사는 40대 중반의 이모 씨는 대형 TV 코너에서 제품을 살피고 있다. 수백억 원대의 자산가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소니 매장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가 관심을 보인 제품은 베가(WEGA) 42인치 분리형 PDP로, 홈시어터 시스템 등을 더한 풀 세트는 750만원에 가까운 고가 제품이다.

“이왕 사실 거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본사 차원에서 특별 이벤트를 진행 중이거든요. 게다가….” 그냥 구경나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소니 용산전시판매장의 김준섭 주임은 숨돌릴 틈 없이 설명한다. 그는 “예전 같으면 둘러보러 온 손님이 대다수였지만 요즘은 구매 의사가 확실한 사람이 늘었다”고 말했다.

가격과 모델명을 확인한 이씨는 용산에서 살까 하다가 이날 저녁 강남의 모 백화점에 다시 들렀다. 이씨가 전자상가 얘기를 꺼내자 전자 매장의 매니저는 “풀세트 혜택 등을 더해 700만원에 맞춰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씨는 아내와 간단한 전화 통화를 끝낸 뒤 곧바로 계약했다. 그는 “요즘 돈깨나 있는 주변 친구들이 대형 PDP나 디지털 TV 등으로 바꾸고 있다”고 전했다.

3월 11일 오후 경기도 분당의 렉서스 센트럴 매장. 한 중년 남성이 고급 세단인 LS와 ES시리즈, 레저용 차량인 RX 330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다. 5층 건물에 1,500평 규모로 국내에서 가장 큰 렉서스 전시장인 이곳은 차종이 다양하고 전시장도 고급스러워 평소에도 판매량이 꾸준한 지점이다.
20분 정도 둘러보던 그는 3월에 출시된 3,000㏄급 중형 세단인 GS300 P-Grade의 견적서를 뽑아달라고 했다. 담당 딜러인 홍재호 과장은 “주문이 밀려 10일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잠시 멈칫하던 그는 계약은 하지 않고 전시장을 나섰다. 고객이 그냥 나갔는데도 홍 과장은 “한 대 팔았다”며 밝게 웃었다. 그는 “견적서까지 뽑은 사람 가운데 열에 아홉은 다시 들러 계약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12월에만 이 지점에서 100대 이상 팔았다”며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요즘도 꽤 바쁜 편”이라고 말한다. 서류를 주섬주섬 챙기던 그는 “1억3,000만원짜리 GS430 계약이 있어 가봐야 한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렉서스 매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현대자동차 중앙지점도 손님이 몰려들어 직원마다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얼마 전 ‘에쿠스 전문점’으로 문을 연 윤석현 지점장은 “신차 효과도 있겠지만 자동차 수요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며 “올해는 여름까지 계속 신차가 나오기 때문에 분위기는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기업서 풀린 돈이 불 지펴

소비심리가 확실히 풀렸다. 부유층은 그동안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남의 눈치가 보여 소비를 자제해왔는데 요즘은 ‘쓸 돈은 쓴다’로 돌아선 것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는 지난 설에 경제단체를 중심으로 선물 보내기 운동을 벌이는 등 사회 전반에 소비를 진작해야 경기가 산다는 인식이 퍼진 덕이 크다. 여기에 불을 지핀 게 지난해 말부터 올해 2월까지 국내 주요 그룹을 중심으로 연말 상여금, 성과급, 설 상여금 등으로 풀린 5조원가량이다. 돈이 돌면서 올해 들어 주가도 끌어올리고 소비도 진작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이모 부장의 경우를 보면 이런 돈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3,000만원에 가까운 상여금을 받았다. 그는 “부모님께 120만원가량의 전동안마의자를 사드렸다. 국악을 좋아하는 아내에게는 평소 갖고 싶어 했던 가야금을 사줬다”며 “지난 몇 달간 오랜만에 가장 노릇을 톡톡히 했다”고 밝혔다. 그는 한편 “400만원 정도 남은 자동차 할부금을 한 번에 갚았고, 일부는 요즘 인기 있는 적립식 펀드에 넣었다”고 말했다.
이 부장과 같은 중산층의 소득이 늘어나면서 소비에 가세하자 부유층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얘기다. 중산층은 그동안의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기운을 차리는 모습이다. 지금껏 선뜻 구매하기를 망설였던 물건도 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산층을 겨냥한 중저가 상품을 많이 파는 홈쇼핑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지난 3월 9일 저녁 서울 충정로의 LG홈쇼핑 콜센터. 천장에 매달린 TV에서 M사의 25만5,000원짜리 족탕기 판매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10만원대 중반인 경쟁사 제품보다 훨씬 비싸지만 방송 시작 5분여 만에 1,500대에 이르는 콜센터 전화가 곳곳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제품을 설명하는 소리가 뒤섞여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이날 LG홈쇼핑이 준비한 물량은 3,000대.

방송 예정 시간은 30분이었지만 20여 분 만에 모두 팔렸다. TV 화면에는 ‘매진’이라는 붉은 글씨가 깜빡였다. 숨돌릴 틈 없이 진행된 방송이 끝난 뒤 담당 MD 황규란 씨는 “족탕기는 재고가 없어 못 팔 정도”라며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예약판매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사 신형범 팀장도 “웰빙 관련 제품 수요는 꾸준한 데다 연말 상여금 등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혼수시장도 최근 꽤 분주해진 모습이다. 윤년이었던 지난해 결혼을 미뤘던 예비 부부가 올해 봄에 대거 결혼할 전망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6일 롯데백화점 명동점 9층의 가전 매장. ‘수입 혼수가전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한쪽 코너에서 50대 주부인 맹모 씨가 카탈로그 2, 3장을 펼쳐 놓고 판매원과 상담 중이다. 한남동에 사는 그는 “5월에 결혼하는 딸 혼수품을 보러 나왔다”고 말했다. 맹씨는 수입 냉장고 가운데 가장 비싸다는 714ℓ짜리 RCA 양문형 냉장고에 관심을 보였다. 정수기와 홈바까지 갖춘 고급 모델로 가격은 498만원.

잠시 망설이던 맹씨는 “현금 일시불이면 VIP고객 혜택을 더해 추가 할인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곤 현금일시불로 냉장고를 구입했다. 그는 가스오븐레인지 매장에서도 100만원이 넘는 모델을 현금으로 10%가량 할인된 가격에 샀다. 맹씨의 사례처럼 혼수 관련 매출이 제법 늘고 있지만 혼수시장에 큰 장이 열릴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백화점 혼수 매장의 한 매니저는 “요즘 들어 고가 브랜드의 판매가 숨통을 트면서 실적 경쟁이 다시 시작됐다”며 “솔직히 지난해에는 본사에서도 거의 포기한 상황이었지만 올해는 달라졌다”고 털어놨다.

윗목은 온기 덜 느껴져

이와 달리 서민들이 주로 찾는 재래시장 등에서는 소비 회복의 온기가 덜 느껴진다. 3월 7일 오전 서울 강서구 이마트 가양점. 이 점포 인근에는 10평대 소규모 아파트가 많다. 지하 1층 식품매장에서 만난 50대 후반 주부 남모 씨는 사과와 배를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시아버지 기일이 며칠 뒤라 제수용 과일을 사러 나왔다는 그는 “너무 비싸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경기가 풀리고 소비가 살아난다지만 서민에게는 먼 나라 얘기”라고 투덜댔다. 그는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뛰지만 남편 월급은 제자리인데 어떻게 씀씀이가 커지겠느냐”고 되물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3월 12일 늦은 오후.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서울 남대문시장도 썰렁한 편이었다. 포목점을 하는 신성수 씨는 난로에 손을 녹여가며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님이 없어 일찍 파하는 중이라는 신씨는 “설에 반짝하다가 손님이 다시 줄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싼 물건만 찾는 손님이 많아 정말 소비가 살아나는지 피부로 못 느낀다”며 “지난 설에도 예단 같은 고가품은 별로 안 팔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경기가 풀린다는 뉴스를 접하면 반갑지만 돈이란 게 돌아야 하는 법인데 나도 돈을 만져야 다른 데 가서 쓰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소비가 살아나고 있다’와 ‘몇몇 지표에서 나타난 착시 현상을 대세로 보지 말라’는 엇갈린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처럼 계층 간 소비 회복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 몇 개월간 경기 지표가 상승세를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좀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다. 한국경제연구원의 배상근 박사는 “내수 회복을 보여주는 지표는 고소득층과 20대 등 일부 계층에 국한된 자료”라며 “서민까지 포함한 모든 계층에서 실질소득 증가가 나타나야 내수가 본격적으로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 회복세가 얼마나 이어질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하나경제연구소의 곽영훈 연구위원은 “연초부터 이어진 주가상승과 부동산가격 상승세 등이 소비자에게 부(富)의 효과를 제공했기 때문에 내수가 다시 침체 국면에 빠지는 더블딥(이중침체) 가능성은 작다”고 말한다. 그러나 JP모건의 임지원 상무는 “여전히 나쁜 고용시장 상황이 가계 수입 개선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며 낙관론을 경계한다.

다만 부유층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온기가 모든 계층으로 번지려면 실질소득이 늘어나야 한다는 점에서는 한목소리를 낸다. 서강대 최운열 경영대학원장도 “지금은 시중자금이 돌기 시작하는 상황”이라며 “소비의 발목을 잡았던 가계부채 증가세가 주춤하는 것도 다행스런 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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