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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허점이 드러 났다

미국의 허점이 드러 났다

The Lost City

뜻밖의 충격은 아니었다. 올리버 토머스 뉴올리언스 시의회 의장은 폰샤트레인 호수의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을 지켜보며 “계속 이러진 않을 거야”라고 보안요원에게 말했다. 호수 수위는 계속 높아져 뉴올리언스를 재해로부터 지키기 위해 지은 콘크리트 방벽 하단의 흙벽을 갉아먹었다. 8월 28일 일요일 오후 4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까지 오려면 아직 14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바다에선 이미 격랑이 몰아쳤다. 토머스는 허리케인 상황실로 돌아간 뒤 “바닷물이 도시로 흘러들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 시간에 누가 그의 말을 듣건 상관없었다.

8월 30일 오전 이른 시각. 토머스는 의장 집무실 소파에서 자던 중 누군가 문을 쾅쾅 치며 “제방이 무너졌다!”고 고함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물에 젖은 카펫 위로 내딛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예측이 현실화할 때 엄습하는 공포에 꼼짝도 못했다고 그는 나중에 말했다.

허리케인 벳시가 1965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할 당시 집 지붕에서 구조된 토머스는 12년간 시의원으로 일했다. 그의 전문 분야도 물이다. 시청 공무원의 책상에 쌓인 각종 연구논문과 보고서, 암울한 경고에 대해 훤히 알았고, 토론만 있었을 뿐 예산이 배정되거나 집행된 적은 한 번도 없는 그 모든 구난·재건·복구 계획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오래된 도시의 불길한 운명도 알고 있었다.

일부 구난자는 구조 채비를 갖췄지만 그마저 극소수에 불과했다. 폭풍이 멕시코만 해안을 강타한 8월 29일 오전, 미 공군 예비군 사령부 920구난대의 팀 타칙 대령은 생각나는 기관들에 닥치는 대로 전화를 걸었다. 폭풍이 잠시 누그러진 틈을 타 휘하의 구조용 헬기 세 대를 재해 지역으로 급파하게 해 달라고 허락받기 위해서였다. 관련 기관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연방 차원의 재해담당 기관인 미 연방재난관리국(FEMA)은 자신들에겐 군대에 임무를 부여할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지시는 국방부 소관이라는 이유에서다. 타칙은 폭풍이 휩쓸고 간 지 24시간 뒤인 그날 오후 4시까지 관료주의의 벽을 뚫지 못했다. 그의 승무원들은 결국 지붕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주민 수백 명을 구출했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을 데려간 지정된 착륙 지점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음식도, 물도, 욕실도,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구조물도, 조직도, 지휘소도 없었다”고 타칙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절망감뿐이었다. 언론이 보도하는 소식도 최악이었다. 의료구호용 헬기를 향해 발포했다는 보도, 약탈자들이 구조 보트를 가로챘다는 소식, 경찰이 약탈자들을 멍하게 쳐다보거나 심지어 약탈에 가담했다는 보도, 흑인과 빈곤층이 대부분인 이재민 수십만 명이 임시 대피소인 수퍼돔 안과 옆 건물에 수용된 모습을 담은 TV 화면-.

가장 끔찍한 뉴스는 엎드린 채 오수에 둥둥 떠다니거나 휠체어에 앉은 채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담은 사진이었다(물 부족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다). 뉴올리언스와 멕시코만 해안의 많은 사람에게 기도는 그들이 가진 몇 안 되는 선택 중 하나였던 듯하다. C 레이 내긴 시장은 CNN에 출연해 미국민에게 “우릴 위해 기도해 달라”고 애원했다. 기도뿐 아니라 그 훨씬 이상을 필요로 한 생존자들도 그 같은 애원을 되풀이했다.

뉴올리언스는 감성이 풍부한 작가와 블루스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그곳에선 낭만이라곤 찾을 수 없다. 시인 대부분은 이미 고지대로 대피하고 없었다(전설적인 리듬 앤드 블루스 가수인 ‘뚱보’ 도미노는 남았다가 한때 실종됐다는 보도가 나온 뒤 다시 생존이 확인됐다). 남은 자들은 탈출할 수 없는 사람이거나, 대피를 거부한 현지의 일부 상류층이거나, 약탈에 나선 폭력단이었다.
아무도 사망자 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듯하지만 이번 사태는 1900년 허리케인이 텍사스주 갤버스턴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6000∼1만2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래 최악의 자연재해임은 분명하다.

남북전쟁(1861~1865) 당시 리치먼드(버지니아주)와 애틀랜타(조지아주) 주민들을 대피시킨 이래 미국의 주요 도시에 대피령이 내려진 적은 없다. 갤런당 3달러를 넘는 휘발유 값부터 시작해 경제적 대가는 엄청날 듯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가혹한 정치적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른다. 8월 30일 부시를 태운 공군 1호기가 대통령이 창문 밖으로 재앙을 직접 보게끔 일시 급강하했다. 그 장면은 제왕적일 만큼 불편한 이미지였다. 소탈한 성격의 부시는 사흘 뒤인 9월 2일에야 재해 지역을 직접 방문해 일부 피해자를 포옹했다. 하지만 그는 드물긴 하지만 꼭 필요한 행동을 했다. 구난 노력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시인했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기진맥진한 가족과 울부짖는 자녀들이 시신 주변에서 마실 물과 호송 버스를 애타게 찾는 모습을 연일 소개했다. 자신들의 통제 범위를 크게 벗어난 자연의 위력 앞에 그들은 무력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신속한 대응이 자취를 감추자 미국과 전 세계인은 어떻게 미국 도시가 모가디슈(소말리아)나 포르토프랭스(아이티)와 닮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100만 명이 집·직장·학교를 잃은 이 같은 난민 사태는 부시가 꿈꾸는 ‘강대한 미국’의 모습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대체 뭐가 잘못됐을까? 거의 모든 부분이 잘못됐다. 구난 체계가 실패로 돌아간 과정은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근본적 원인은 갈수록 분명해진다. 시청에서 백악관에 이르기까지 팽배한 미적거림, 관료주의적 경쟁의식, 지도력 상실에 엄청난 불운까지 한데 어우러져 재앙이 초래됐다는 사실이다. 사태 발생 초기인 지금은 모두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 아니다 약탈자들에게 있다. 관료들에게 있다, 아니다 현지 정치인들에게 있다. 만일 미 국토안보부의 잘못이 아니면 FEMA의 잘못이다, 아니다 국방부 잘못이다.

어쨌건 정부는 확실히 실패했으며 이번 재앙은 전 세계인의 눈앞에 미국의 고질적인 인종 분열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부시의 비판자 중 다수는 상황이 이런데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았고, 휴가 중이었으며, 이라크에 정신이 팔려 가난한 흑인들의 욕구에 둔감했다고 비난할 듯하다. 행정부의 내부 사정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기 위해 익명을 요구한 부시의 한 고위 측근은 백악관은 이번 재앙의 원인을 폭풍 자체의 규모, 현지에 대한 불충분한 정보, 혼란스러운 지휘 체계에서 찾는다고 말했다. 아마도 진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른다. 부시는 현재 전쟁 중이고, 때론 대응 속도가 느리며, 뉴올리언스가 최악의 폭풍은 면했다는 초기 보고에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모두 합법적인 핑계다. 그럼에도 미국인은 대통령에게 그 이상을 기대한다.

대자연도 주된 이유 중 하나다. 카트리나와 같은 허리케인은 10메가톤급 핵폭탄이 가진 에너지를 20초마다 터뜨린다. 바다의 온도가 오르고 내리는 자연적인 주기도 열대성 폭풍의 잦은 발생과 관련 있다. 60년대 중반에서 90년대까지 허리케인의 소강 상태는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도 폭풍을 악화시키는 주범일지 모른다. 지구의 온도가 높아질수록 허리케인은 더욱 강력해진다.

허리케인이 비교적 잠잠한 기간 중 주민과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허리케인이 지나는 통로인 미국 남부와 동부의 해안 지역으로 몰려갔다.
인간은 미시시피강 삼각주(델타)로부터 폭풍에 맞서는 자연적인 보호 기능을 빼앗았다. 범람을 막기 위해 그렇게 만든 점은 역설적이다. 만일 그대로 뒀더라면 강물이 토사와 함께 바다로 흘러나가 뉴올리언스를 에워싼 작은 만(灣)과 섬들을 형성했을지 모른다(그래서 허리케인에 대한 일종의 방어벽으로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둑과 제방은 토사가 바다로 흘러들지 못하고 서서히 강의 진흙 바닥에 스며들도록 했다. 멕시코만을 따라 위치한 습지대에선 매일 미식축구 경기장 33개만 한 면적이 사라져 왔다.

미 정부는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대형 허리케인에 대한 대비책을 수립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론 말이다. 연방·주·현지 정부 관리들은 최근 가상의 허리케인 ‘팸’이 미칠 충격을 예측하는 훈련을 실시했다. 이를 통해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와 멕시코만에 입힐 충격을 꽤 정확히 예견했다. 그러나 자연적 재앙이든, 인위적 재앙이든 간에 모든 재앙에 대한 구난 활동을 지휘해야 할 국토안보부는 테러 위협에 신경을 더 곤두세웠다(갈수록 조직이 커지는 이 기관은 9·11 사태 후에 생겼다).

그 결과 의회나 행정부로부터 예산 확보가 보다 용이한 고차원적인(하지만 예측은 더 어려운) 생물화학과 일명 ‘더티 밤’(dirty bomb·독가스 등으로 불특정 다수의 목숨을 노리는 폭탄) 공격의 대비에 더욱 주력했다(카트리나 상륙 이후 정부의 대처를 보면 이 같은 테러 공격에 대한 정부의 대응력도 의심이 간다).

남으론 미시시피강, 북으론 폰샤트레인 호수 사이에 끼인 뉴올리언스는 대부분 지역이 해수면 아래다. 마치 수프로 채워지길 기다리는 컵받침 같은 형상이다. ‘빅 이지’(Big Easy)란 별명을 가진 뉴올리언스는 나른하고 한가한 도시다. 주민들도 지금의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땅의 습기 때문에 시신을 땅 위에 묻는 ‘공동 묘지’의 도시로도 유명한 뉴올리언스는 언뜻 딴 세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곳은 오랫동안 효율성보다는 부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뉴올리언스시는 범람을 막기 위해 수년간 수백㎞에 이르는 동쪽 제방과 콘크리트 방벽, 그리고 배수 펌프장을 지었다. 루이지애나주 정치인들도 제방을 강화하고 높이는 한편 삼각주로 이뤄진 해안선 전체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루이지애나주가 지역구인 메리 랜드루 연방 상원의원은 지난 6월 어린 학생 25명을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프렌치 쿼터’로 데려와 구명조끼를 착용하게 한 뒤 쇠로 된 아름다운 장식이 달린 건물 발코니에 서게 했다. 그러곤 물이 어디까지 차는지 보여 주기 위해 그들 아래로 방수천을 드리웠다. 지난주 바닷물도 거의 그 정도까지 차올랐다(단 푸른색이 아닌, 오물·기름·화학물질로 가득한 바닷물이었지만).

미 육군 공병사단은 뉴올리언스를 위한 예산 증액을 요청했으나 받지 못했다. 이라크전 때문에 예산이 쪼들려 정부의 지출 감소와 감세를 표방한 부시 행정부는 실제로 뉴올리언스의 제방 보강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줄였다.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이 있는 노후한 제방 체계는 원래 3등급의 허리케인을 견디도록 지어졌다(허리케인은 등급이 높을수록 위력이 강하다). 시속 224㎞의 강풍을 동반한 카트리나는 8월 29일 뉴올리언스를 강타할 당시 4등급 허리케인이었다.

카트리나는 믿기 힘들 정도로 위력이 갈수록 강해졌다. 지난 주말 멕시코만을 휩쓸 당시엔 시속 264㎞의 강풍을 동반한 5등급으로 커졌다. 허리케인은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빨대처럼 강력한 파도를 일으킨다. 멕시코만을 강타한 약 9m 높이의 파도는 관측 이래 최고치다. 카트리나는 뉴올리언스 동쪽을 휩쓸고 지나가며 미시시피주 빌럭시의 대부분을 날렸다. 빌럭시에서 살아남은 케빈 밀러라는 이름의 한 해군 예비역은 사람들이 둥둥 떠다니는 순간(일부는 “이미 사망했다”) 나무를 붙잡고 버텼다고 말했다. 그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한 여성의 머리채를 붙잡았으나 거센 물결에 그만 놓치고 말았다고 울먹였다. 집과 함께 섬 전체가 사라진 멕시코만 해안을 휩쓴 카트리나는 인간의 삶 자체를 파멸시킬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초래했다.

2004년 허리케인 ‘팸’을 가상한 대피 훈련 당시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뉴올리언스에 대피령이 내려질 경우 전체 주민 50만 명 중 약 30%는 그대로 남겠다고 대답했다. 따라서 약 8만∼10만 명의 주민이 폭풍이 들이닥치기 전인 8월 27일 내긴 시장이 내린 대피령을 따르지 않은 사실은 놀랄 게 못 된다. 일부 사람은 자신의 뜻에 따라 남았다. 71년 뉴올리언스의 유명한 축제 마디그라에서 ‘카니발의 왕, 렉스’로 뽑힌 브룩 던컨(81)은 남북전쟁 전에 선대가 최초로 이주해 온 그 도시에 남기를 원했다. 그러나 바닷물이 프렌치 쿼터에 위치한 집으로 밀려오자 그는 애완견과 총 한 자루를 갖고 친구 집으로 피신했다. “우린 무기를 갖고 있었고, 그 사실을 창밖으로 알렸다”고 던컨은 말했다. 현재 그는 신시내티에 머무른다.

뉴올리언스 주민 약 5분의 1은 극빈층이며 5명 중 한 명꼴로 자동차가 없다. 이들 빈곤층의 압도적 다수는 흑인이다. 가난한 흑인과 허리케인에 관한 한 남부는 추한 역사를 갖고 있다. 1927년 미시시피강 범람 당시 흑인들은 상류 지역인 그린빌(미시시피주)로 말 그대로 죄인처럼 떼거리로 끌려갔다. 백인 승객을 절반가량 태운 증기선 한 척은 안전을 이유로 아예 흑인을 태우지 않은 채 떠났다[그때 선상 밴드는 흑인들을 비꼬며 ‘검은 새여, 안녕’(Bye-Bye, Blackbird)이란 곡을 연주했다]. 인종적 긴장은 이번에 훨씬 더 악화됐을지 모른다. 1927년 당시의 대 범람을 다룬 역사서 ‘조류 상승’(Rising Tide)의 저자 존 M 배리는 “흑인들은 버려졌다고 느꼈으며 실제로 버려졌다”고 말했다.

뉴올리언스를 떠나지 못한 사람들에겐 임시 대피소인 수퍼돔으로 가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곳은 순식간에 최악의 지옥으로 변했다. 처음엔 냉방이 안 되더니 불까지 나갔다. 나중에 발전기를 들여왔지만 거대한 경기장을 어슴푸레 밝히는 정도에 불과했다(낮이 되면 폭풍에 찢긴 천장 구멍으로 따가운 햇살이 쏟아졌다). 구세군은 수천 명 분의 임시 구호 식량(햄·소시지·굴 등을 넣고 지은 밥이나 스파게티, 태국식 닭고기 요리 중 택일)을 나눠 줬지만 마실 물은 태부족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불결한 몸에서 나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8월 31일이 되자 물 공급이 일체 차단되고, 변기들의 오물이 역류해 악취가 났다.

칠흑같이 어두운 화장실의 벽과 바닥은 배설물로 흥건했다. 암시장은 커졌다. 최고 인기 품목은 한 갑에 10달러씩 하는 담배와 오랫동안 소변을 참도록 해 주는 항이뇨제였다. 간혹 총소리도 들렸다. 남자 한 명은 경기장 위 열에서 아래의 콘크리트 바닥으로 뛰어내려(혹은 떨어져) 사망했다. 축축한 화장실에선 누군가가 납파이프로 주방위군을 공격해 자동 소총을 뺏으려 했다. 주방위군 병사는 격투 과정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수용소 바닥엔 크랙(싸구려 마약의 일종) 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강간 사건도 최소 두 건 보고됐다(그중 한 명은 아동 강간).

인접한 경기장으로 불결하긴 마찬가지인 뉴올리언스 아레나에선 사람들이 비닐 봉지로 발을 감싸고 곳곳에 생긴 소변 웅덩이를 건넜다. 그럼에도 마치 네덜란드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히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에서나 나오는 장면이 연출됐다. 새뮤얼 톰슨(34)이란 이름의 한 남자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꺼내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 1번 G단조’를 연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LA 타임스의 스콧 골드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내겐 바이올린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위해 연주한다. 그들도 뭔가는 받아야 하니까.”

처참한 상황에서도 삶은 계속 이어졌다. 왈드리카 네이선(19)은 8월 29일 밤 홍수로 가득 찬 집 다락방에서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아기는 아버지와 조부모가 함께 받았다(그들은 케이블 TV에서 아기 받는 법을 본 적이 있다). 조부는 “탯줄을 자르는 부위와 ‘구두끈’으로 묶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한 병원의 대변인은 나중에 뉴올리언스 타임스 피카윤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가족들은 아기를 시원하게 하기 위해 세탁물 바구니로 유아용 침대 겸 보트를 만들어 거실에 가득 찬 물 위에 띄웠다.

수위는 8월 30일과 31일 내내 높아졌다. 방벽의 균열은 최소 세 군데에서 발생했다. 육군 공병사단은 17번가 수로에 난 직경 91m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거대한 모래주머니와 콘크리트 구조물을 헬기에서 투하했다. 그러나 헬기가 지붕 위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차출되면서 범람 속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뉴올리언스의 ‘커낼 스트리트(운하 거리)’는 다시 수로로 변했다. 약탈당한 한 여행사 사무실에선 갈 데 없는 남자 몇 명이 둘러앉아 감자칩에 밀러 라이트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주민들의 수완도 늘어 갔다. 사람들은 의자 다리를 뜯어 야간 횃불로 사용했다. 일부 사람은 쓰레기로 가득 찬 물을 휘젓고 다니는 거대한 쥐를 마주칠 때면 비명을 질렀지만 일부 사람은 임기응변을 발휘해 텅 빈 냉장고로 보트를 만들었다.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빈민 거주 지역에 악어가 헤엄쳐 다닌다는 소문, 시내 수족관을 빠져나온 상어가 돌아다닌다는 소문… 모두 소문에 불과했지만 독사의 일종인 늪살모사와 물독사들은 눈에 띄었다.

로어 가든 지구에 들어선 초대형 소매점 월마트는 높은 위치 덕분에 홍수 피해는 보지 않은 대신 뜻밖의 ‘손님’들로 붐볐다. 약탈자들이다. 일부 사람은 카트에 음식·식수·의료품을 가득 싣고 가게 문을 나섰다. TV와 DVD를 훔쳐 나온 자도 있었다. 한 여성은 가게 앞에 도착하자 “모두 공짜예요?”라고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에 그녀는 환호성을 질렀다. “TV! TV! TV!” 약탈자들은 전기톱과 낚싯대도 가져갔다. 한 폭력단은 경비원들을 몰아낸 뒤 월마트에 있는 총기류와 탄약을 싹쓸이해 갔다. 1개 중대 병력을 무장시키기에 충분한 분량이었다.

나이트 리더지의 나탈리 폼필리오 기자에 따르면 약탈은 경찰에 의해 촉발됐다. 월마트의 섀런 웨버 대변인은 그 기자에게 경찰과 비상 관리 요원은 위기 시 필요한 물건을 종류에 관계없이 사용해도 된다는 “묵시적인 허가”가 주어져 있다고 말했다. 단 “나중에 비용 지급이 가능하도록 가져간 물건의 목록은 남겨 놓아야 한다.” 로어 가든 지구의 그 월마트에선 수십 벌의 티셔츠·DVD·개 먹이를 경찰차로 실어나르는 장면이 목격됐다. 나이트 리더지는 “경찰들이 물건을 가지러 들어가자 인종과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약탈에 나섰다”고 보도했다(뉴올리언스의 한 고위 공무원은 사안의 민감성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하며 그 보도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일부 약탈자는 상표를 세심하게 읽으며 카트를 밀고 다녔다. 한 여성은 자신은 얼굴 화장품만 골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통로 사이로 카트를 황급히 몰며 닥치는 대로 담았다.
8월 31일 밤 내긴 시장은 사실상 뉴올리언스시 경찰 전체에 해당하는 경찰관 1500명의 투입을 명령했다. 다락방과 지붕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이재민 구출 작업을 중단하고 약탈 행위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는 “경찰은 호텔·병원 등 인구 밀집 지역으로 간다. 곧 약탈 행위를 막겠다”고 말했다.

9월 1일이 되자 뉴올리언스는 무정부 상태에 접어들었다. 경찰관들은 또다시 약탈자들을 상대하는 대신 경찰 배지를 자진 반납했다(경찰관 중에도 다수가 집을 잃었다). 교도소 수감자들은 시 외곽으로 옮겨졌지만 그들의 범행 기록은 물에 잠겼다. 죄질과 죄목에 따라 그들을 구분하는 일은 악몽과 같을지 모른다. 가게에서 물건을 슬쩍 훔친 사람이 강간범과 함께 수용될지도 모르고, 일부 용의자의 경우 풀어 주라는 압력이 높아질지도 모른다.

내긴 시장은 연방정부에 ‘필사적인 구조 요청’을 했다.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그는 연방정부 관리들이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빌어먹을 기자회견’에만 매달린다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에겐 할 일이 또 있었다. 수천 명의 이재민을 수용하기 위해 수퍼돔을 개방하긴 했지만 이재민을 어떻게 보호하고 언제 어디로 소개할지에 대한 계획은 그 누구도 세우지 않았다. 약속된 버스도 오지 않았다. 주방위군 약 500명이 질서 유지에 나섰지만 겁을 낸 어린 병사들은 무기를 마구 흔들며 다녔다. 그러자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죄수냐며 불평했다. 캐슬린 바비노 블랑코 루이지애나 주지사는 상황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나태하게 대응한 듯하다. 주저 없이 계엄령이나 비상 사태를 선포했다면 국방부의 더 많은 지원도 가능했다.

워싱턴도 위기 대처에 느렸다. 도널드 럼즈펠드 장관 지휘 하의 국방부는 군대가 재난 구호를 주도하는 상황을 꺼렸다. 원래 그 일은 FEMA나 주지사의 지휘를 받는 주방위군의 몫이다. 부시 대통령은 지체 없이 주방위군을 연방정부 차원으로 확대했어야 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92년 LA 폭동 당시 그렇게 했다. 당시 법무부는 해병대 출신에다 턱이 튀어나와 완강해 보이는 로버트 뮬러(현 FBI 국장)를 책임자로 현지에 급파해 곧 기갑부대가 당도한다는 사실을 미리 주지시켰다. 그러나 마이클 브라운 FEMA 국장은 주어진 임무도 벅차고 상황 파악도 안 된 듯 보였다. 이런 모습은 9·11 당시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이 보인 책임 있는 자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까지 부시 행정부는 재소자 인권 문제 등에서 법률가들의 의견을 주저 없이 무시해 왔다. 그런데 카트리나가 밀려오자 이상할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토의 내용의 민감성을 이유로 익명을 요구한 백악관 관리 3명은 부시의 최고위 보좌관들은 책임 소재를 두고 법적 공방만 벌이다 며칠을 낭비했다고 전했다. 이번 주 초 법무부 소속 변호사들은 주방위군의 연방군화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지만 국방부 측 변호사들은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19세짜리 병사들을 현지 법 집행에 투입하길 꺼렸다고 한 고위 관리는 말했다(그도 논의 사안의 민감성을 이유로 익명을 요청했다).

워싱턴이 논쟁을 벌이는 동안 뉴올리언스와 멕시코만 일대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부시는 현지로 내려가 지역 관리들과 보다 명확한 명령 체계를 수립하는 등의 일을 수행했다. 주말이 되자 연방 관리들은 수만 명의 군대가 즉시 파견된다고 말했다. 9월 3일 부시는 다시 현지 방문을 약속한 뒤 국방부 지휘 아래 현역 군인 7000명을 추가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그 같은 지원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셈이었다. 관리들은 주말 내내 관할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 가슴을 치는 피해 소식만 늘어갔다. 뛰어난 에이즈 연구가로 툴레인대에 재직 중인 제임스 로빈슨 박사와 아내 모니크는 학교에 남아 지난 수십 년의 연구 성과가 고스란히 담긴 세포들(에이즈균이 배양된 백혈구 세포)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연구실에 음식과 물을 잔뜩 쌓아 놓고, 자체 발전기에 의지해 냉동고와 배양기를 계속 가동시켰다. 부부는 태풍이 가라앉자 그럭저럭 와인도 마시며 컴퓨터로 DVD도 봤다.

그러나 8월 31일 점점 더 많은 물이 시내까지 흘러들었고 발전기도 멈췄다. 강도를 당하거나 물에 잠길 가능성을 우려한 로빈슨 부부는 주방위군이 지키는 툴레인대 주차장 한 곳으로 가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 있는 딸에게 현재로선 무사하다는 전화를 걸었다. 딸 리세트 도르시는 “연구실은 어떻게 됐느냐고는 감히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며 “아마도 전부 유실되지 않았을까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최소한 로빈슨 부부는 안전한 듯했다. 걸을 때 지팡이가 필요한 셰리 존슨(52)은 집에서 달랑 몸만 빠져 나와 고립의 공포에 휩싸인 채 세인트 클로드 다리 위에서 8월 30일 밤을 꼬박 지새웠다. 아침이 되자 다리를 벗어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존슨은 컨벤션 센터까지 지팡이를 짚고 장장 5㎞를 걸었다. 도착해 보니 그곳은 말 그대로 파괴와 폭력의 도가니였다.

누군가 총을 쏘자 군중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존슨은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 어떤 안전조치도, 물도, 의료진도 없었다. 컨벤션 센터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단 두 명의 간호사만 있었을 뿐 조직화된 구호작업은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취재 중인 카메라맨에게 그저 “도와달라!”고 외칠 뿐이었다. 존슨은 뉴스위크 기자에게 애처롭게 물었다. “적십자사는 어디 있나요?”

뉴올리언스의 하늘은 점점 수색과 구조 헬리콥터로 가득 찼지만 구조대를 통솔할 지휘본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뉴스위크 기자는 애리조나주 공군 예비군 소속의 헬리콥터 한 대에 탑승한 채 대원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들은 이재민 두 명을 내려놓은 뒤 뉴올리언스의 루이 암스트롱 공항을 막 빠져나갈 참이었다. 승무원 중 한 명이 말했다. “빌어먹을, 저 인간은 우리 얘길 듣고나 있는 거야?”(항공교통 통제관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상관이 말했다. “나도 몰라, 어쨌든 이륙해야 해.” 그러자 엔지니어가 말했다. “우린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조직 체계로 보면 차라리 거기가 훨씬 낫습니다.”

당황한 현지 관리들은 질서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10번 주간(州間) 고속도로가 제퍼슨 카운티의 제방도로와 만나는 교차로는 조악한 분류 심사구역으로 바뀌었다. 옷이 더럽혀진 채 망연자실해 있는 수백 명의 이재민을 헬기가 내려놓자 루이지애나주 의무책임자인 조엘 엘드리지 박사는 임시 병원을 설치하고 환자 분류 체계를 세웠다. 9월 1일 그는 지친 목소리로 약품은 있지만 물도 없고 화장실 설비도 없다고 개탄했다. “아이들은 물을 달라고 하는데 줄 수 없어 비참한 심정이다.”

얼마 안 되는 세간을 스티로폼 조각 위에 싣고 끄는 몇몇 사람의 모습 또한 애처로웠다. 현지 주경찰을 위해 일하던 스탠리 그리핀 대령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과 진흙으로 뒤범벅된 교차로의 관리를 맡았다. 9월 1일 첫 번째 버스 행렬이 도착하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서로 밀치는 가운데 그는 소동의 한복판으로 뚫고 들어갔다. 여성 한 명이 아이를 버스에 태웠는데 자신이 타기도 전에 버스 문이 닫혔다며 극도의 공포 속에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리핀으로선 버스 앞 유리창을 망치로 두드려 운전사에게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버스 대열이 휴스턴에 도착하면서 비탄에 빠진 승객들을 두 번째 돔(애스트로돔)에 내려놓자 절망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니콜 윌리엄스(41)는 “대체 아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두 살밖에 안 됐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가족을 찾도록 도와달라는 글귀를 적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등판에는 가족 4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주와 주를 잇는 고속도로 I-10 교차로에서 헤어졌다고 말했다. 윌리엄스는 버스에 오른 뒤 밖에 있던 아이를 데려오려 했으나 주경찰관이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도록 얼굴에 최루가스를 뿌렸다고 말했다. “그들은 어머니와 내 딸에게도 최루가스를 뿌렸다. 그러곤 문이 쾅 닫혔다”고 그녀는 말했다.

절망감은 단지 이재민들만의 몫은 아니다. 9월 2일 오후 뉴올리언스 범죄 담당 보안부서의 부책임자 빌 헌터는 올리버 토머스 시의회 의장을 불러세우곤 말했다. “이렇게 말하긴 정말 싫지만 토머스, 이제 우리 뉴올리언스는 끝장났네.” 토머스는 우울한 마음을 억누르며 “아냐, 우린 다시 세울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헌터는 고개를 내저으며 “최소 20년은 걸리겠지”라고 말했다.

뉴올리언스의 이재민들에게 지난 주말은 보다 나은 삶의 터전으로 가는 길고도 힘든 여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러나 희망의 징조도 더러 보였다. 인기 웹사이트 Craigslist. com에는 전국에서 답지한 주거시설 지원과 각종 구호의 손길이 봇물처럼 쏟아진다(얼마나 많은 이재민이 인터넷을 이용할지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프랑스인들도 구호의 손길을 보냈다. 언젠가 도시는 재건되리라. 토머스는 뉴올리언스를 구해내지 못하리라던 데니스 해스터트(공화·일리노이주) 하원의장의 말을 비웃으며 보란 듯 말했다.

“이 세상의 수많은 해스터트에게 당당히 보여 주겠다. 우린 재건한다. 최고의 재즈와 최고의 요리, 그리고 최고의 마르가리타와 최고의 문화 지역이 있다. 옛날 어느 때보다 훨씬 잘 살게 된다.” 수많은 도시가 망한다. 그러나 부활도 가능하다.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가 생생한 예다. 시카고는 1871년 대화재 이후 재건됐고, 샌프란시스코는 1906년 지진을 겪고도 보란 듯 되살아났다.

화재와 지진도 대사건이지만 물로 인한 참화는 더욱 무섭다. 서서히 스며들어 파괴하고 썩게 한다. 뉴올리언스의 물에는 치명적인 화학약품, 석유, 수인성 병균이 뒤섞여 있다. 물을 퍼내는 데만 몇 달이 걸린다. 그러나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지난 수세기 동안 뉴올리언스 사람들이 영국의 침공, 북부군의 점령, 홍수, 그리고 수차례의 태풍을 겪으면서도 잃지 않았던 쾌활함과 풍부한 감성을 다시 한번 발휘한다면 언젠가 훨씬 더 빛나는 미래가 펼쳐지리라는 사실을. 21세기를 위한 뉴올리언스의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With reporting from T. TRENT GEGAX
in Baton Rouge; JONATHAN DARMAN with the National Guard; CATHARINE SKIPP
and JOSEPH CONTRERAS in New Orleans; JOHN BARRY, PAT WINGERT, MARTHA BRANT, DANIEL KLAIDMAN, MARK HOSENBALL, MICHAEL ISIKOFF, HOLLY BAILEY, SUSANNAH MEADOWS and STEVE TUTTLE in Washington; CAROL RUST and STACI SEMRAD in Texas, and ANDREW MURR and JESSICA SILVER-GREENBERG
강태욱·이정명 t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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