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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 없는 대북사업’ 어디로 가나

‘실리 없는 대북사업’ 어디로 가나

개성에서 북한 여성들이 술을 팔고 있다.
롯데관광은 최근 일본을 통해 북측으로부터 ‘아태’라는 발신자 이름이 적힌 팩스 한 장을 받았다. 북측의 팩스 내용은 간단했다. ‘현대아산과 더 이상 협의할 필요를 못 느낀다. 개성관광 협의를 위해 북에서 만남을 갖자.’ 그러나 롯데관광은 북측의 이 같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롯데관광의 이순남 이사는 “지금 우리가 나서면 ‘북한에 이용만 당할 수 있다’는 국민적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며 “현대아산과 북한 간의 계약관계가 분명히 정리되고 정부 당국의 승인도 따라야 추진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북측이 하고 많은 남쪽 기업 중 롯데관광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알려진 대로 현대의 재정난으로 북측이 금강산 관광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기대에 못 미치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롯데관광을 택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북한은 현대와 30년을 계약 기간으로 9억4200만 달러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현대그룹은 자금 사정으로 북측에 지불하는 관광요금 액수까지 자꾸 줄였다.

왜 롯데관광이었나? 금강산 관광 요금은 1인당 100달러에서 해로(海路) 대신 육로가 활성화되면서 50달러로 내렸다. 북한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수익을 늘리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 바로 ‘체인징 파트너’라는 설명이다. 현대 쪽에서는 더 나올 게 없다는 걸 깨달은 북한이 ‘롯데관광’이라는 새 파트너를 찾았다는 것이다. 롯데관광 관계자는 “북측이 8월 말 평양에서 열린 ‘2005 평양오픈골프대회’ 참관차 평양을 찾은 김기병 회장에게 개성 관광사업을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구두로 했다”고 밝혔다. 또 일부 전문가는 북측이 그동안 금강산 관광사업을 해오면서 ‘관광사업은 진짜 굴뚝 없는 알짜사업’이라는 걸 체감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북측은 현대보다 오랜 관광사업 역사(롯데는 창립한 지 34년이 됐다)를 가진 롯데관광과 계약해 노하우를 전수받는 걸 원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북한은 8월 26일부터 현대와 세 차례에 걸쳐 개성 시범관광을 실시하며 “우리가 알아서 진행할 테니 너희(현대)는 모객만 하라”는 주문을 했다고 전해졌다. 북측이 앞으로 관광사업으로 쏠쏠한 수익을 올리려면 언제까지 현대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롯데’가 먼저 수차례에 걸쳐 대북 관광사업에 입질을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이에 대해 롯데관광 측은 “지난 3월 정부에서 대북 접촉 승인을 받은 것 외에는 대북사업에 대해 물밑 접촉을 시도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7월 16일 북한 원산에서 있었던 현대 현정은 회장과 김정일 위원장의 첫 대면. 이 만남에 제목을 붙인다면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닐까? 김 위원장은 정주영·정몽헌 회장에 이어 대북사업 바통을 넘겨받은 현 회장을 “김윤규 부회장과 앞으로도 잘 해보라”는 의미로 만난 것인 반면, 현 회장은 실세 김윤규 부회장이라는 ‘혹’을 떼고 대북사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김 위원장을 만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 감정 상한 게 이유? 북한은 9월에 금강산 관광객 수를 하루 1000명 수준에서 절반 정도인 600명으로 축소하겠다고 발표해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더니, 이달엔 개성관광을 현대가 아닌 롯데관광에 제의하고 나서 파장을 일으켰다. 북한 전문가들은 이 모든 논란의 불씨는 바로 김 위원장과 동상이몽을 꾸었던 현 회장에 대해 북에서 ‘괘씸죄’를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현대가 김 위원장에게 정면도전했다는 점에서 가만히 있을 북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 회장은 김 위원장과 만나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안돼 김윤규 부회장을 실권이 없는 자리로 좌천하더니 결국 완전히 퇴출시켜 버렸다. 한 북한학 교수는 “김윤규 인사 조치를 들은 북에서 현정은 회장의 대북사업 자체에 의문을 갖고, 대북사업에 대한 현 회장의 진정성과 태도를 확인해 보기 위해 제3자인 롯데관광을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김윤규 부회장에 비해 현재 윤만준 사장 체제를 북측에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말도 전해진다. 화통하고 과감하게 대북사업을 추진했던 김윤규 부회장에 비해 북에서는 윤만준 사장의 신중함을 ‘그릇이 작다’고 여기고 앞으로 현대 쪽에 기대할 게 크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북에서는 현 회장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일어난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현대의 대북사업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이다. 대북사업은 국민의 염원이 담긴 것이라 초미의 관심사다.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북한 전문가는 “이번 논쟁을 계기로 대북사업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북사업 정상화의 칼자루는 ‘정부’가 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그동안 북한과 기업 간의 뒷돈 거래 등 구걸하는 식의 대북사업을 근절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경제 질서에 입각한 철저한 비즈니스 룰을 따르지 않는 사업은 상대가 현대든 롯데든 똑같이 북한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갈아타기 식’ 대북사업은 사업자를 바꾼다고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것이다. 롯데관광이냐, 현대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대북 관광사업을 제대로 성사시켜 남북관계의 화해 분위기를 만드는 게 국가적 차원에서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정부는 지난달 금강산 관광객 축소 발표 때도 북쪽에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현재 금강산 관광에 정부 자금(한국관광공사)이 개입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뒷짐만 지고 있는 상태다. 10월 12일 CBS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이봉조 통일부 차관은 “현대와 북측이 2000년 합의한 7개 사업 독점권에 대한 효력이 유효하다”며 “당사자 간의 합의를 존중해야 지 정부가 지금 적극적으로 나설 입장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대북 뒷거래 없애는 계기 삼아야 대북사업은 우리 쪽 입장에선 당장 실리를 챙기는 사업이 아니다. 10년 뒤, 20년 뒤를 내다보고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함부로 손을 내밀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현대가 2000년 북한과 금강산 관광 7대 사업 독점 운영권을 합의한 이후 금강산 관광 개발에 투자한 돈은 조 단위가 넘는다. 만약 현대 대신 다른 기업이 북에 들어가려면 그동안 개발비를 쏟아부은 현대에 권리금을 줘야 하는 실정이다. 제2의 현대가 아닌 이상 큰 경제적 실리도 없는 대북 관광사업에 어느 기업에서 권리금을 지불하면서까지 나서겠느냐는 것이 전문가들 시각이다. 북한의 ‘체인징 파트너’ 카드는 금강산을 시작으로 백두산·개성 등으로 지역을 다각화해 남쪽 기업 간 경쟁 시스템을 만들어 협상의 우위를 점하겠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 국민 여론이 좋지 않은 현 상황에서 북측의 이런 계산이 언제까지 먹혀들지는 의문이다. 결국 아직까지는 현대를 대신할 파트너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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