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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문’ 문제로 다시 관심 … 나승렬 전 거평 회장

‘청대문’ 문제로 다시 관심 … 나승렬 전 거평 회장

나승렬 전 회장은 “환자복 입고 쪼그리고 앉아 사진을 어떻게 찍느냐”며 촬영을 거부했다. 사진은 1996년 「이코노미스트」 인터뷰 때 찍은 것이다.
나승렬(61). 1994년 민영화 1호 공기업이었던 대한중석을 인수하면서 신흥재벌 대열에 올랐던 거평그룹의 선장이다. 외환위기 때 좌초했지만 나승렬 전 회장은 제철화학·새한종금·한남투신 등 10여 개 회사를 거푸 인수하면서 ‘인수합병(M&A)의 마술사’로 불렸다. 그러나 나 전 회장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공차(空車·무임승차) 타고 상경해 재벌 됐다가 지금은 용도 폐기된 인물”이다. ‘잊혀진 기업인’이었던 그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96년 거평이 주도해 건립한 청대문(옛 거평프레야) 소유권 공방 때문이다. 나 전 회장 측이 청대문의 소유권을 가진 거평산업개발 지분을 기업 구조조정 회사인 KD인베스트먼트에 매각하자 상가임차인연합회 측에서 “계약 무효”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 일로 나 전 회장은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억울하고 섭섭한 사연만 듣겠다”는 조건을 달아 11월 16일 오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나 전 회장은 “(인터뷰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좋든 싫든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며 입을 뗐다. “외부에서 보면 이것도 ‘쇼’로 볼 수 있겠지만 더 많은 왜곡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나섰다)”라는 것이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2000년에 협심증이 왔는데 그것이 심근경색이 됐어요. 고혈압도 있고 눈도 안 좋아요. 지금은 형집행정지로 집과 병원만 오갈 수 있는 신세입니다. 주치의로부터 1시간만이라는 조건으로 인터뷰를 허락받았어요.” 시쳇말로 그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협심증 치료제 주사를 맞았다. 주치의인 정남식 박사는 “뇌경색으로 반신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겨울에는 산책도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냥 화병(火病)이라고 써도 되지요?
“…….” ‘억울하고 답답한 사연’을 먼저 듣는 것이 순서였다. 96년 ‘동대문 최초의 현대식 쇼핑몰’로 개장한 청대문(옛 프레야타운)은 거평이 부도나면서 미로에 빠졌다. 상인들로부터 받은 1900억원대 임차보증금이 문제였다. “자기네들이 피해자라면서 나한테 마치 피해를 본 것처럼 세상에 대고 떠들고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피해자입니다. 사글세 살던 사람이 집주인에게 ‘안방 내놔라’고 하는 격입니다. 98년 회사가 부도나자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임차보증금(1945억원)을 내놓으라며 협박해 왔습니다. 전깃줄로 몸을 묶은 채 가스통을 세워두고 협박하기도 했어요. 7개월 이상 이런 폭력과 협박에 견디다 못해 운영권을 넘겨줬습니다.” 그는 98년 12월 임차인연합회에 ‘안방 경영권’을 내줬고, ‘자치 경영’을 내세운 배관성씨가 청대문 운영권을 행사해왔다. 나 전 회장은 “주차장 수입이 연간 100억원이 넘고 임대수입도 꽤 많다”며 “지금까지 수백억원대의 고정 수입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최근 문제가 불거진 것은 이 건물의 소유권 때문이다. 법적으로 이 건물을 소유한 회사는 거평산업개발(현 KD알앤디)이다. 당초 나 전 회장 측은 거평산업개발을 배씨 측에 넘기려고 했다. “협박에 시달리는 것이 지긋지긋해서”였다. 양도 금액을 100억원으로 하고 계약금 60억원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배씨 측이 잔금을 마련하지 않은 것이다. “배관성씨에게 팔면서 세입자 보증금 문제가 안 생기게 해달라, 부채·세금 등 설정채권을 해결해 달라고 했어요. 운영권을 넘겼기 때문에 (소유권까지) 팔았던 거지요. 최소 3000억원이 생기는데 그럴 이유가 없잖습니까. 3000억원이면 나승렬이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엄청난 돈입니다.” 3000억원이 생긴다는 말은 이 건물의 가치 때문이다. 최근 청계천 개발과 맞물려 청대문은 7000억~1조원대로 가치가 껑충 뛰었다. 그러니까 1945억원의 임차보증금과 1400억원대 금융권 빚만 해결하면 3000억~6000억원을 벌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리먼브러더스 같은 외국 자본도 이 건물에 군침을 흘려왔다. 한편으론 ‘나승렬의 안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곳이 원래 덕수중·덕수상고 자리인데, 대낮에 살인사건이 나도 모를 만큼 슬럼가였어요. 이런 음습한 폐허의 땅을 ‘동대문 쇼핑 1번가’로 개발한 것입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고 이후 나 전 회장은 KD인베스먼트(대표 문홍성)와 계약했다. 지난 9월 말 나 전 회장은 KD 측에 거평산업개발 지분 70%를 100억원에 넘겼다. 이후 KD 측은 2006년 2월 22일까지 임차보증금 전액을 돌려주고 부채 1400억원을 일괄 변제하는 것을 시작으로 상가 정상화에 나선다고 밝혔다. 그러자 배씨 측이 나 전 회장을 횡령재산 은닉 등 비리 의혹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배씨 역시 운영비리와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일이 시끄럽게 됐습니다.
“왜 배관성이와 매듭짓지 못하고 KD한테 갔느냐, 그거지요. 배씨가 3월 말까지 잔금을 가져오기로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이렇게 큰 거래를 하는데 40억원도 못 만드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이 사람이 ‘또 책임 전가할 것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KD는 2000억원 조달을 약속했습니다. 이 돈으로 일단 세입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거지요.”

문홍성씨와는 어떻게 접촉했습니까.
“기업 구조조정회사 사장인데, 2002년 이용수(전 거평그룹 임원)씨의 소개로 만났어요. 젊은 사람이 보통이 아니더군요. 코스닥 회사를 인수하자고 했는데 당시엔 그럴 사정이 못 되었지요. 그러다가 배관성씨 측과 협상이 결렬되자 ‘제가 해보겠습니다’하고 왔어요.” 나 전 회장이 매매의 첫 번째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임차보증금을 전액 반환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그러나 배씨 측에서 “나승렬씨가 상가를 재탈취하려고 한다. 문홍성씨가 나씨의 대리인”이라며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무조건 저한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어요. 운영권까지 줬으면 경영을 잘해야지, 심심하면 ‘나승렬은 악덕 기업주’라며 ‘인민재판’을 하고 있어요. 신문에 비난 광고도 엄청나게 해대고 있는데, 그런 돈이면 임차인을 위해 써야지…. 최근엔 세입자들에게 돈을 주려고 하니까 이것까지 가로막고 있어요. 이게 무슨 ×같은 경우입니까.”

“전깃줄 묶여 협박당해” 거평이 부도나면서 나 전 회장은 2004년 1월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배임죄로 2년6개월 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지난해 11월 심장병이 악화하면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상태. 건강이 호전되면 남은 형기인 1년5개월을 더 ‘감옥살이’해야 한다. 그는 “외환위기 때 부도난 기업인 가운데 실형을 사는 이는 내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이제 거평 얘기를 해보지요. 불과 4년 만에 10여 개 회사를 인수한 재계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부도가 났습니다.
“새한종금이 화근이었습니다. 새한은 5조원대 자산을 가진 회사였는데, 이 회사가 부실해지자 유동성이 풍부하다는 한남투신을 인수했습니다. 두 회사를 합병해 증권사로 전환, 살려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종금사에 유동성 위기가 왔습니다. 이것이 그룹 전체로 미친 것입니다.” 그는 “새한종금 인수가 결정적인 화근이었다”면서도 “당시 거평은 제철화학 같은 우량회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재기할 수 있었다. 지금쯤 재계 10위권이 되지 않았을까”라며 아쉬워했다.

결국 M&A로 일어나서 M&A로 화를 자초한 셈이네요.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새한종금만 해도 납입자본금이 500억원인데 연 600억원 흑자가 났어요. 종금사 운전사 연봉이 6000만원이었어요. 회사 측에서도 ‘명분만 있으면 언제든 돈 빼가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산업은행 자회사였던 새한종금을 인수한 것입니다. 당시는 재벌들이 종금사를 가지는 것이 꿈이었고, 그래야 재벌이었어요. 그것이 ‘독약’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부도난 다음이 더 안 좋았습니다.
“회사가 망하자 내 권위가 죽었고, 재산과 인격이 다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망했다고 했을 때 한강 다리 밑에서 거적 뒤집어쓰고 있거나 죽기를 바랐습니다. 망한 기업인은 깡통을 차야 속이 시원한 거지요. 그동안 검찰 조사도 받고, 국세청 세무사찰도 받았습니다. 중수부와 예금보험공사에서 3년을 찾아다니면서 예금 계좌를 모조리 뒤졌어요. 아들에 대한 증여 문제가 소송 중입니다만, 은닉 재산에 대해서는 대검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배임 혐의로 2년6개월형을 받은 것입니까.
“나는 횡령도 탈세도 안 했어요. 배임으로 옥살이하는 경우도 드물 겁니다. 집행유예가 고작일 것입니다. 돈은 여유 있는 회사에서 부족한 회사에 빌려주는 것입니다. 거평 계열사 실무자끼리도 하루 300억원을 빌려준 적이 있어요. 내가 귀신도 아닌데 이런 일을 어떻게 압니까. 그러나 나도 우리나라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법에 불평을 해야 되겠습니까.”

“내 새끼 깡통 안 차게 하려고…”

한때 거평 계열사였던 한국시그네틱스를 되찾아오겠다고 소송을 걸기도 했습니다.
“워크아웃 신청할 때 산업은행 임원이 다시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시그네틱스만 해도 주식이 담보로 잡혀 있었던 것이지 채무 담보는 아니었어요. 회사는 멀쩡했던 거지요. 그래서 이의 신청을 한 것입니다. 당시 나선주 부회장이 금융감독 당국 고위임원을 면담했는데, 1∼2개 기업의 운영권은 주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새한종금 부도 전에 회사 소유의 아파트를 친인척 명의로 옮겼지요.
“역시 보증 채무입니다. 회사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봐줄 수는 없나요? 집은 지키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고, 내 새끼 쌀 걱정 안 하고 깡통 안 차게 하는 것이 부모 마음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는 소리 소문 없이 재기했다. 부인인 박문자씨는 대구의 한 고등학교 이사장이며, 장남인 영돈씨는 중견제과업체인 ㈜기린의 오너다. 그의 측근인 우병수씨는 만강개발을 경영하고 있다.

세간에선 ‘나승렬이 부활했다’고 합니다.
“부활은 무슨? 아직은 보따리 장사지. 만강개발은 부동산 개발 전문회사입니다. 기획력이 중요한 거지 밑천 없어도 합니다. 내가 감옥에 있어 행동 반경이 제약돼 있지만 편지나 면회는 가능합니다.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가족들에게 코치해줄 수 있지요. 아비 잘못 만나 밥 굶는 불쌍한 신세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도 종자돈은 있어야 하잖아요. 기린 인수는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인수하는 데 수십억원은 들어갔습니다. 마누라가 했어요.”

부산에 본사를 둔 기린은 ‘알짜배기 회사 터’로 주목받고 있는데요. 개발 사업을 하면 가치가 높다고 하던데요.
“우선 회사 정상화가 먼저지요. 공장을 이전해도 새 건물 지어야지, 제품 개발해야지, 광고해야지…. 정상화에도 돈이 들어갑니다. 재벌이 되려면 돈벼락을 한두 번은 맞아야 하는데…. 푼돈 아니겠습니까.”

다시 재벌 되고 싶지 않습니까.
“아이고, 골치 아파. 왜 이 고생하느냐. 재벌 돼서 누구 좋은 일 하라고? 그렇게 쫓아다니던 사람들, 면회 한 번 안 오더이다. 몇 년 전에 아는 사람이 회고록을 쓰자고 왔어요. 그때 좀 더 살아보자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유행가 가사처럼 부평초처럼 살아왔어요. 지금이야 내가 ‘용도 폐기’됐지만 한때 5년 만에 28위 재벌이 된 사람입니다. 다시 재벌이 될지, 쪽박 찰지 모릅니다. 나도 나를 구경하고 싶습니다.”

청대문(옛 거평프레야)에 무슨 일이? 1998년 5월 : 거평산업개발(청대문 소유 회사) 부도 보증금 1945억원·채무 1400억원 지급 불능 12월 : 임차인연합회(대표 배관성)에 운영권 이양 2005년 4월 : 나승렬-배관성 간 거평산업개발 인수협상 결렬 9월 : KD인베스트먼트, 거평산업개발 인수 10월 : KD, “보증금과 채무 해결하겠다” 발표, 배관성씨 측, “원인 무효”라며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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