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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 30년 제철 도전 秘史 정몽구의 꿈과 ‘철의 눈물’

現代 30년 제철 도전 秘史 정몽구의 꿈과 ‘철의 눈물’

'정주영이냐, 박태준이냐.’ 1978년 10월 중순,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두 거물을 두고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했다. 포항제철(현 포스코)에 이은 제2제철(현 광양제철소) 사업권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놓고 박 대통령은 갈등에 빠졌다. 그해 4월까지만 해도 당연히 포철이 제2제철 사업자로 결정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5월 들어 상황이 역전됐다.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인천제철(현 INI스틸) 인수를 선언하고 제2제철 사업권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선 것. 이에 앞서 정 명예회장은 어렵사리 인천제철을 인수했다. 인천제철 인수는 정 명예회장이 제2제철 사업권을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먼저 성사시켜야 하는 사전 작업이었다. 당시 산업은행은 인천제철의 공개입찰에 참여한 업체가 현대그룹 한 곳뿐이라는 이유로 유찰시켰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달에 그룹 계열사를 끌어들여 복수 응찰하는 동시에 산업은행이 요구한 것보다 파격적인 인수조건을 내세웠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인천제철을 손에 거머쥐었다. 효과는 있었다. 인천제철을 인수한 후 박심(朴心)이 정 명예회장 쪽으로 기울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한편 그해 여름까지 일 년 가까이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한 박 회장은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보면 멀어진다’는 기우가 박 회장을 괴롭혔다. 당시 ‘제2제철 민영화’를 주창한 정 명예회장은 “민간기업이 제2제철을 맡아 국내 철강업의 경쟁체제를 갖추고 경쟁해야 가격도 낮아진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 회장은 “포철은 처음부터 수입 철강에 비해 20~40% 낮은 가격으로 공급해 왔다”며 “좋은 품질의 철강재를 싼 가격에 안정적으로 공급해 한국산업의 국제경쟁력 확보에 기여한다”고 반박했다. 세계 철강업계가 통합하는 추세라는 점도 포철이 제2제철을 가져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박심이 정 명예회장 쪽으로 기운다는 소문이 사실처럼 확산되자 박 회장은 대통령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실 문은 막혀 있었다. 그는 부산으로 출장 나온 최각규 당시 상공부 장관을 조용히 포항으로 오게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포철이 제2제철을 맡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10월 초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장관회의에서 제2제철 사업권 문제가 집중 거론됐다. 그런데 청와대 비서실장과 경제수석실은 현대그룹을, 상공부·건설부 장관은 포철을 밀었다. 그러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공은 결국 박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10월 중순 박 대통령이 박 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면담 직전 경제수석이 현대그룹에 사업권을 주자고 박 회장을 설득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양보할 수 없다며 맞섰다.

‘마지막 선물’과 ‘첫 번째 고배’

▶한때 티격태격했던 정주영과 박태준.

다시 대통령 집무실. 박 회장이 들어왔다. 고민 중이던 박 대통령이 제2제철소 프로젝트를 탁자에 올리면서 박 회장에게 말했다. “자네 의견도 들어야겠어.” 박 회장이 대답했다. “현대가 들어오면 ‘기술자 빼내기’는 뻔합니다. 공격과 방어에 돈이 개입되고 결국 공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포철 하나만을 키운다 해도 세계 철강업계의 압력을 막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은 박 대통령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박 대통령이 연필로 톡톡 탁자를 두들겼다. 숨막히는 순간이 지나가고, 독백 같은 말이 나왔다. “정주영 회장은 불도저같이 일하는 분이지. 공헌도 크고…. 그러나 철강은 역시 박태준이야.” 결국 박 대통령은 박 회장에게 제2제철 사업권을 줬다. 박 회장은 그것을 대통령이 자신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히기도 했다. 제2제철 사업권은 박 회장에게는 박 대통령의 ‘마지막 선물’이었지만 정 회장에게는 철강 꿈이 좌절된 ‘첫 번째 고배’였다. 그 후 꼭 일 년 후인 10월 26일 총성이 울렸다. 84년 제2제철 입지로 광양이 확정됐다. 하지만 현대는 광양제철소 건설에만 참여해야 했다. 사업자가 되고 싶었던 정 명예회장은 경쟁자인 포철의 공장을 지어주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현대제철’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 가슴 속의 용광로는 식을 줄 몰랐다. 10년 후인 94년 정 명예회장은 제3제철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해 7월 철강공업발전민간협회에서 그는 “정부의 수급 전망이 현실성이 없는 데다 독점 공급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민간기업이 제철소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부지까지 콕 찍어 부산 가덕도에 제3제철소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정부는 “수급 전망을 감안해 철강 공급 과잉이 우려된다”며 사실상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남의 집 아궁이만 지으란 말인가 그런데 이듬해인 95년 5월 통상산업부는 “철강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단기간에 건설이 가능한 포철에 고로 1기를 신설해 달라”고 현대 측에 요청했다. 정 명예회장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불과 1년도 내다보지 못한 정부의 수급 전망도 한심하지만, 이번에도 남의 집 아궁이만 지어주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해 9월 정 회장은 다시 문제 제기를 했다. 철강공업발전민간협의회를 통해 “2001년에 조강 부족량이 1000만t 이상이 예상되고 독점체제 방지를 위해 민간기업이 제철소 건설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번에도 공급 과잉 우려를 이유로 반대했다. 철이 부족하면 포철에 고로를 증설하도록 해 주면서 현대그룹이 제철소를 짓겠다고 하면 반대하는 정부 측 태도에 정 명예회장은 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당시 정권을 잡았던 YS가 92년 대선 경쟁자였던 정 명예회장에게 정치적 보복을 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돌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77년 처음 현대종합제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연산 1000만t 규모의 제철소를 건립하겠다던 정 명예회장의 20년 가까운 ‘제철 도전’은 사실상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식지 않는 ‘가슴속 용광로’를 2세에게 건네줬다. 몽필씨의 작고로 사실상 장남이 된 2남 정몽구 회장은 96년 1월 현대그룹 회장에 올랐다. 정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취임사에서 “2000년대 국내 철강 공급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 우리의 일관제철소 건설은 불가피하다”며 제철사업에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밝혔다. 86년 인천제철 대표를 맡으면서 철과 인연을 맺은 정 회장은 아버지가 왜 그토록 제철사업을 하고 싶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 회장의 일관제철소 설립 구상은 즉각 실천에 옮겨졌다. 그는 ‘종합제철사업 프로젝트팀’을 발족했다. 그리고 이계안 당시 부사장에게 팀장을 맡겼다. 프로젝트팀은 종합기획실 인원을 비롯해 INI스틸·현대건설 등 관련 계열사 40여 명의 핵심 멤버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부지 선정, 자금 조달 등의 방안을 짜내는 역할을 맡았다. 프로젝트팀은 96년 2월 당시 전남 율촌, 경남 하동, 전북 군산 세 곳을 유력 후보지로 선정했다. 정 회장의 판단은 빨랐다. 그는 이 세 후보지 가운데 경남 하동을 마음속에 점 찍어 놓고 있었다. 하동 갈사 간척지는 천혜의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대규모 철광석과 철강을 실어나를 배가 접안할 수 있는 충분한 수심(23m)을 가진 바다와 인접해 있다. 하동이 정 회장의 본관이라는 점도 더욱 애착을 갖게 했다.

▶97년 10월 10일 정몽구 현대그룹 회장(오른쪽)과 김혁규 당시 경남지사가 고로제철소 건설을 위한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프로젝트팀은 몇 달 못 가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정 회장은 하동에 일관제철소를 짓는다는 결심을 굳힌 후, 비선 조직으로 운영할 특수팀을 꾸리기로 마음먹는다. 이 조직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외부에 알려져 있지 않다. 모두 18명으로 구성된 특수팀에는 INI스틸과 포스코, 한보철강 등지에서 온 베테랑급 인사들도 다수 있었다. 정 회장은 우선 당시 국내영업본부 경기지역본부장을 맡고 있던 이동룡 전무(전 기아차 부사장, 현 한국노사문화연구원장)를 방으로 불렀다. 그는 이 전무에게 “하동에 제철소를 지어야겠으니, 나를 도와 달라”며 특수팀을 맡겼다. 그에게 사실상 하동 제철소 설립 준비의 총책을 맡긴 셈이다. 정 회장이 이 전무를 특수팀장으로 발탁한 것은 그의 이력 때문이었다. 진주 출신인 이 전무는 당시 김혁규 경남지사의 부산대 2년 선배로 친분이 두텁다. 경남도의 협조도 중요했지만, 김 지사를 통해 당시 현대 측에 적잖은 부담이 됐던 YS가 제철소 건립을 승인해주도록 설득하려는 주도면밀한 전략이었다.

비밀의 ‘하동 프로젝트’ 특수팀 현대그룹이 일관제철소 부지로 하동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하동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 경남지역 주민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재정자립도에서 낙후된 서부경남지역에 포항제철소나 광양제철소에 버금가는 대형 제철소를 유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순식간에 경남 전역으로 확산돼 갔다. 일각에서는 “‘현대특별시’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지역 주민들의 환호에 부응이라도 하듯 96년 10월 10일 정 회장은 헬기를 타고 하동으로 날아간다. 김혁규 지사의 초청으로 이뤄진 전격 방문이었다. 이에 앞서 두 사람은 이 전무의 알선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정 회장은 섬진강 하구변의 한 식당에서 재첩국과 재첩회로 점심을 한 후 바로 김 지사의 안내를 받으며 갈사 간척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그곳에서 하동군수의 브리핑을 받은 정 회장은 상기된 얼굴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 회장은 그때 이미 아버지가 꿈에 그리던 고로제철소의 설계도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YS였다. 봄부터 특수팀의 이 전무가 공들인 끝에 그해 가을 김혁규 지사가 전국체전 참석차 경주에 들른 YS와 현대제철 건으로 면담하는 데 성공했다. 해군본부 내 별장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으면서 YS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거 지자체에서 알아서 하는 것 아니야”라고 말했다고 이 전무는 전했다. 미온적이었지만 부정적이지는 않은 반응이었다.

S, “지자체가 알아서 할 일” 그러나 YS의 말처럼 되지는 않았다. 같은 달 10월 24일 통산부 장관이 한 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대그룹이 사업계획서를 내면 공업발전심의회(이하 공발심)에서 심의한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발언이 나왔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정 회장의 꿈이 깨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과 한 달도 안 된 11월 12일 현대의 제철소 설립을 불허할 수도 있다는 경제부총리와 재경원 차관의 입장이 나오면서 불길한 망령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15일 현대의 제철소 사업계획서가 공식적으로 제출되지도 않았는데도 통산부가 공발심 심의를 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급기야 이틀 후 심의가 열렸고 통산부 장관은 “현대그룹의 제철소 건립은 허용하지 않겠다”고 최종 발표했다. 역시 ‘공급 과잉’이 주된 이유였다. 대를 이은 현대의 ‘철강의 꿈’이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트럭 3대 분량의 지지 서명록

▶현대제철소 유치 지지 서명운동 모습.

하지만 정 회장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 회장에게는 정부의 방침을 바꿀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그건 여론밖에 없었다. 실제로 공발심의 현대제철 불허 방침은 현대그룹뿐 아니라 경남도에도 적잖은 실망을 안겨줬다. 곳곳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누구라도 불만 댕기면 여론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우선 하동군에서 청년회의소(JC)를 중심으로 군의회, 하동 정씨(氏) 종친회 등이 주축이 돼 ‘현대제철 하동 유치 범군민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추진위는 11월 하동군민 2만6465명의 서명을 받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하동 출신 현대차 영업사원인 강호상씨(현 기아자동차 특판팀장)는 이 캠페인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사람이다. 하동뿐 아니라 진주 등 인근 지역에서도 유사한 민관 합동 추진위원회가 우후죽순 생겨나더니 어느새 ‘현대제철 유치’는 범경남도민 캠페인으로 확산됐다. 경남지역에 거주하는 현대그룹 직원들과 경남지역을 연고로 한 직원들도 서명운동에 참가했다. 당시 서명에 참석한 현대차의 한 임원은 “92년 대선 때보다도 더 활발한 캠페인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현대그룹과 경남지역 관민 합동으로 이뤄진 가두 서명운동은 97년 가을 정점에 이른다. 당시까지 서명한 인원은 전국적으로 무려 280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수거한 서명록 분량은 2.5t 트럭 3대에 싣고도 남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수거한 서명록이 너무 방대해 일부만이 복사돼 11월 19일 청와대·국회·통산부·건교부·국무총리 앞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12월 9일 통산부로부터 ‘제철소 신규 건설 불가’라는 답변이 최종 회신됐다. 일 년 가까이 경남도 전역에서 울려퍼진 현대제철 설립 지지의 목소리는 허망한 메아리가 돼 돌아오고 말았다. 가두 서명운동이 한창이던 97년 가을 정 회장은 경남도민들의 폭발적인 지지에 힘을 얻어 제철사업에 다시 불을 붙였다. 9월 10일 ‘코리아 서밋’ 주제 연설을 통해 제철업 추진 의지를 재천명하고 나섰다. 25일에는 독일 티센제철소를 방문하고 합작투자 제의를 받아오기까지 했다. 10월 28일 마침내 경남도와 고로제철소 건설을 위한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조인식이 열리기 며칠 전부터 경남도 지역에는 산골짜기 곳곳까지 ‘현대제철 유치하여 경상남도 살찌우자’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3000여 명의 경남지역 유지들과 정 회장이 서울서 이끌고 간 40명의 계열사 사장들이 참석한 조인식은 현대정공(현 로템)의 ‘탱크쇼’와 축포를 동반한 축제로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거품이 된 ‘하동의 꿈’ 조인식을 마친 정 회장은 본격적인 제철소 건설 작업에 착수한다. 우선 현대건설·현대엔지니어링 등 제철소 건설을 지원할 수 있는 12개 계열사 부사장·전무급 임원들로 구성된 그룹 차원의 ‘고로제철소 추진 특수팀’을 신설하고 현대엔지니어링 주관 하에 해외업체에 용역을 주어 타당성을 검토했다. 동시에 직원들을 하동으로 파견했다. 부지 매입을 위해 지주들의 리스트를 확보하고 매입 금액도 산출했다. 당시 지주 조사를 맡았던 특수팀의 강호상 팀장은 “구입자금만 8000억원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이제 정 회장이 김 전무에게 했던 말처럼 ‘말뚝 박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일이 벌어졌다. 제철소 설계 도면은 물론이고 모형까지 다 만들어놓은 97년 말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DJ정부 출범을 앞둔 98년 2월 중순 어느 날. 정 회장은 특수팀장인 이 전무를 방으로 불렀다. 침통한 표정으로 정 회장은 무거운 입을 뗐다. “외환위기 때문에 하동에 제철소 짓는 게 힘들 것 같아. 다음 기회에 하지….” 이 전무는 “회장실을 걸어나오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는 말로 당시의 허탈함을 표현했다. 이것이 정 회장이 2년 여에 걸쳐 혼신의 힘을 쏟았던 하동 프로젝트의 전말이다. 당시 모든 팀은 해체됐고 정 회장이 아버지의 뜻을 받아 그토록 갈망했던 고로제철소 건설의 꿈은 기나긴 경제위기의 늪으로 사라져 갈 것만 같았다. 당시 창원에 있는 현대차 경남지역본부에서 보관하던 서명록 원본은 창고가 비좁고 곰팡이가 슬어 더 이상 보관할 수 없어 2003년에 하동군청으로 이관됐다. 지금도 하동제철소설립 준비 작업을 맡았던 강호상 부장이 관리하고 있다. 경남지역에서 캠페인을 주도했던 500여 명의 활동가들은 ‘제철소 유치의 불씨를 남겨두자’는 취지로 산악회(청록)까지 조직했다. 이 산악회는 현재 5000여 명으로 늘어 국내 최대 규모가 됐다. 최근까지 전·현직 하동군수가 현대제철 유치에 기대를 걸고 정월 초하루마다 하동 정씨 제각에 절을 올렸다는 웃지 못할 일화까지 있다. 강 부장은 “아직도 하동군민을 비롯한 많은 경남도민들은 현대제철소 유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만큼 당시의 프로젝트는 큰 가능성이 있었다”고 전했다. 정 회장 역시 아쉬움이 컸다. 2003년 국내서 철강 원자재 품귀현상이 일자 “그때 하동에 제철소를 지었다면 지금쯤 쇳물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 이름으로 철강 꿈을 이뤄 정 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아버지(정주영 명예회장)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철강 꿈을 끝내 이룬다. 강원산업·삼미특수강에 이어 2004년 포스코와의 경쟁 끝에 한보철강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정 회장의 과감한 인수가격 베팅으로 성사시킨 쾌거다. 2001년 포스코와의 이른바 ‘핫코일 전쟁’을 치르면서 정 회장은 고로제철소 건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과제로 받아들인 것 같다. 한보철강 인수 후 울산보다 당진공장을 더 자주 방문할 정도로 품질력 강화에 공을 들였다. 급기야 이곳을 기반으로 한 고로제철소 건설의 확신을 갖게 된다. 올해 1월 그는 당진에 일관제철소를 지을 수 있게 됐다. 16일 충남도는 현대INI스틸이 일관제철소 건설의 1단계로 신청한 당진 송산산업단지 조성 계획을 승인했다. 옛 한보철강으로부터 인수한 당진공장에 일관제철소를 건립키로 하고 당진군 송산면 일대 96만 평에 대한 산업단지 지정을 충남도에 요청했다. 정 회장은 약 5조원을 투자, 2011년까지 송산면 일대에 연산 700만t 규모의 고로 2기를 건설키로 했다. 올해 1호기 건설에 착공해 2010년 완공하고, 2호기는 2008년 공사에 들어가 2011년 준공키로 했다. 이렇게 되면 그룹의 총 철강생산량은 2180만t으로 늘어 세계 6위의 철강그룹으로 도약하게 된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루지 못한 세 가지 꿈이 있다. 통일을 위한 대북사업,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유로운 경영, 그리고 고로제철소를 만드는 것이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세 가지 꿈은 그 아들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대북사업을 추진했던 5남인 정몽헌 회장은 대북 비자금 문제에 부닥치자 자살해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6남인 정몽준 의원도 낙마하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하나 철강의 꿈을 이제 사실상 장남인 정몽구 회장이 실현시킨 것이다. 정 회장은 실질적 장남이면서도 부친으로부터는 인정을 못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현대그룹의 정통성은 5남인 고 정몽헌 회장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살아생전 이루지 못한 아버지의 꿈을 이뤄줌으로써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라도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정 회장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제 ‘자동차의 쌀’인 철강을 본격 생산하게 됐다. 모내기는 마친 것 같다. 풍년일지는 가을이 되어야 알 수 있다.

단독 입수 l 경남 하동 갈사 현대제철소 모형 “이런 제철소 만들고 싶었다”
1997년 정몽구 회장의 지시로 만들어진 경남 하동 갈사 ‘현대제철소’ 모형. 정 회장은 96년 10월 하동을 전격 방문해 한눈에 갈사 간척지가 고로제철소를 건설하기에 천혜의 부지임을 알아차렸다. 철광석과 철강재를 실어나르는 20만t급 선박들(붉은색 원)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수심 23m의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이 모형은 정 회장의 하동 프로젝트가 거의 실행 단계 직전까지 진행됐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꿈꾸던 제철소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위쪽에 보이는 두 동이 고로 1·2기이고, 그 아래로 제강공장과 열연공장이 들어서 있다. 그 밖에 폐기물처리장·폐수처리장을 비롯해 도로·철도 등도 눈에 띈다. 또 제철소 변으로 폭 50m의 완충녹지대를 설치하는 등 친환경적으로 설계한 노력이 엿보인다. 그런데 이 모형은 계동사옥 내 정 회장의 비선 조직인 특수팀 사무실에 보관돼 있다가 98년 2월 하동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당시 특수팀의 핵심 멤버였던 강호상씨(현 기아자동차 특판팀장)가 2년 가까이 추진했던 제철사업이 중도하차한 것이 아쉬워 모형을 촬영해 사진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을 「이코노미스트」가 단독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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