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다른 신상품 살 수 있다
매일매일 다른 신상품 살 수 있다
A New Fashion Frontier 뉴욕 5번가 H&M 매장은 대목이 따로 없다. 신제품을 실은 트럭이 거의 매일 드나든다. 스웨덴 브랜드인 H&M은 2000년 처음으로 값싸고 세련된 상품을 뉴욕에 선보였다. 그러자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사는 부인네들이나 질겅질겅 껌을 씹는 10대들이 모두 반색을 했다. 그들은 아직 문도 열지 않은 가게 앞에 함께 줄을 서 기다리기 일쑤였다. 너나없이 스텔라 매카트니가 만든 99달러짜리 한정판 칵테일 파티 드레스, 49달러짜리 스키니 진을 가장 먼저 손에 넣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일반 소매점과 달리 H&M은 상품을 많이 쌓아놓지 않는다. 베스트셀러라도 예외는 아니다. 창고 정리 염가 판매는 않겠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은 신상품이 들어왔는지 알아보려 한 달에 한 번, 아니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매일같이 뻔질나게 가게를 드나든다. 이미 H&M은 미국 전역에 91개 점포를 개설했다. 올 한 해 전 세계에 150개 점포의 문을 열 계획이다. 미국은 H&M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이라고 한다. 이러한 H&M의 판매방식을 일컫는 용어가 있으니 바로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다. 이 개념의 탄생지인 유럽에서는 이미 굵직한 사업분야로 자리 잡았다. 독일·프랑스·영국·스페인 같은 나라에서는 전체 의류시장 중 5∼10%의 점유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틈새시장에 불과하다. 컨설팅 업체 베인&Co.의 2004년 보고서에 따르면 1720억 달러 규모의 미국 의류시장 중 1% 남짓을 차지할 뿐이다. 하지만 H&M과 스페인 경쟁 업체 사라(Zara)가 미국 시장에 빠르게 진출하면서 갭·월마트 등 거대 미국 기업들이 수세에 몰렸다. 미국 업체는 규모가 너무 큰 탓에 패스트 패션 사업모델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따라하기 힘들다. 따라서 계절에 따라 신상품을 출시하던 주기를 좀 더 짧게 단축시키는 등 몇 가지 요소만 흉내낸다. 하지만 이 정도 변화만으로도 전 세계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무엇보다 중국에 있던 생산공장을 멕시코 같은 나라로 옮겨 배송 시간을 줄이는 사례가 그렇다. “패스트 패션은 앞으로 미국 소매시장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유럽 수준만큼 성장할지 아직 미지수지만 어쨌든 지금보다는 분명히 훨씬 더 커지리라 본다”고 베인&Co.의 소매 컨설턴트 크리스 밀러는 말했다. 벌써 토착기업도 태어났다. 서부 해안에 근거지를 둔 베베·포레버21·샬럿러스 같은 회사가 유행에 민감한 소비자들을 겨냥해 패스트 패션 사업모델을 채택했다. 사실 용어 자체는 그리 정밀하지 못하지만, 어쨌든 이들 패스트 패션 기업들은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우선 제품 주기가 업계 평균치인 연간 4∼5회를 초과한다. “최소한 몇 개라도 매일매일 신상품을 상점으로 보낸다”고 포레버21의 래리 메이어 부사장은 말했다. “손님들이 항상 이곳에 오면 뭔가 새롭고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고 느끼길 바란다.” 그러한 고객들의 느낌은 재고 물량 감소로 이어진다. 패스트 패션 상품은 약 15%가 할인 판매되지만 업계 평균치는 49%다. 마진이 높다는 얘기다. 베인&Co.에 따르면 패스트 패션 소매점의 마진율은 16%에 이르는 반면 일반 의류 전문 매장의 마진율은 평균 7%에 불과하다. 이러한 신조류에 불을 지피는 고객층은 세계 유행에 민감한 젊은 소비자들이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대중 패션시장에 유럽만큼 관심이 많지 않았다. 유행을 타는 옷보다는 기본적인 청바지나 티셔츠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동질성을 불만스러워 한다. 가게마다 모두 똑같아 보이는 기본 제품에 소비자들이 싫증을 낸다”고 뉴욕의 커트샐먼어소시에이츠의 소매 부문 분석가 데이비드 배수크는 말했다. 패스트 패션 판매점은 디자이너의 책상을 출발해 상점 판매대에 도착하는 상품의 이동 속도가 일반 상점보다 훨씬 빨라야 한다. 사라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대적 대세를 거슬렀다. 모두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는데 거꾸로 동유럽과 서유럽으로 이전했다. 이렇게 해서 평균 1개월 이상 걸리던 배송 시간을 2주까지 줄였다. 속도는 높은 임금 비용을 상쇄한다. 미국의 패스트 패션 업체는 영업 비밀을 이유로 상품과 원자재 조달처를 밝히지 않지만 포레버21의 메이어 부사장은 흔쾌히 대답했다. “우리는 캘리포니아에 넓은 거래처를 구축했다. 그 덕에 가장 참신한 상품들을 매장으로 가져오게 됐다.” 그렇다고 최근 수십 년 동안 아시아 업체에 밀려 거의 고사지경에 이른 미국의 섬유업계가 화려하게 부활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미국 노동자의 임금은 동유럽에 비해 너무 높기 때문에 전 제품을 미국에서 생산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섬유업계의 일자리가 외국으로 넘어가기 쉽다. 이미 H&M·올드네이비·월마트 등은 미국 내 상점에 물건을 채워줄 생산지로 멕시코를 주목한다. “아시아보다 임금은 높지만 배송에서 3주가 절약된다. 따라서 유행에 민감한 상품은 멕시코가 합리적 선택”이라고 모건스탠리의 경제분석가 그레고리 멜리히는 말했다. 요즘은 월마트도 패스트 패션 전략을 구사한다. 일부 상품을 월간 계획이 아닌 주간 계획에 따라 입점시킨다. 월마트의 패션 지향적 여성 의류 브랜드 메트로7은 올해 매장을 500개에서 1000개로 늘린다. 그리고 타깃이라는 브랜드는 이윤이 높은 한정판 제품의 종류를 늘려간다. 2월에는 영국 디자이너 루엘라 바틀리의 컬렉션을 시작했는데, 타깃의 제품 중에서 매장에 단 90일만 진열되는 경우는 이 제품이 처음이다. 다른 유명 상점들도 소비자를 끌어들이려고 희소성의 매혹을 포함한 패스트 패션의 특징을 차용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제이크루는 악어가죽 숄더백 같은 최고급 한정상품을 많이 내놨다. 한편 패스트 패션때문에 갭과 같은 소매업체들은 제품공급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디자인과 생산 속도를 높이려고 생산 능력이 더 나은(무조건 더 싸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소수의 업체들과 거래를 한다. JP모건의 경제분석가 브라이언 투닉은 미국의 많은 대규모 소매업체들이 2006년 공급망에 엄청난 투자를 하리라고 내다봤다. “모두 제품 주기를 단축하기 위해서다. 여태껏 미국 소비자들은 할인판매 때까지 기다리는 데 길들여졌다. 그러한 습성을 변화시킬 유일한 대안은 매장에 신제품을 보다 빨리 갖다 놓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조류는 소비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할인 판매가 줄어드는 대신 최신 유행의 멋진 옷을 싼 가격에 사게 된다는 뜻이다. 애버크롬비&피치는 매주 두세 가지 신제품을 내놓는다. 품질 좋은 기본 제품으로 유명했던 바나나 리퍼블릭 같은 곳도 보다 유행에 민감한 제품을 늘려간다. 비교적 나이 든 소비자를 상대하는 치코 같은 판매 체인점도 요즘은 ‘매일매일 신상품을 만난다’고 크게 떠든다. 미국인이 유럽인처럼 다 함께 유행의 첨단을 걷는 옷을 사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조금은 더 멋있어질 듯하다. 이정명 ikk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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