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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라면’파동에 수천억원 손해 국가상대 소송 내려니 온갖 압력

‘우지라면’파동에 수천억원 손해 국가상대 소송 내려니 온갖 압력

‘한국 라면의 창시자’ 전중윤(87) 삼양식품 회장은 이국(異國)에서 말년을 보낼 수도 있었다. 전 회장은 1997년 말많던 우지(牛脂) 파동에서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이때 전 회장은 “국가를 상대로 2000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소송을 하면 이민 갈 각오를 해야 한다”는 자문 변호사의 만류 때문에 ‘두 번째 전쟁’은 없었지만 전 회장에게 우지 파동은 지울 수 없는 악몽이다. 편집자 지난 45년 동안 대한민국 ‘라면 종가’의 역사를 써온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1961년 초근목피의 고난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삼양식품을 설립하고 숱한 우여곡절 끝에 ‘제2의 주식’인 라면을 선물했을 때의 환희와 자긍심은 여전했다. 강원도 대관령에 국내 최초의 목장을 운영해 낙농업과 목축업을 전파한 기록도 전 회장에게서 찾아야 한다. 전 회장의 회고를 듣기는 쉽지 않았다. 국민이 준 환희의 훈장보다는 권력에 당한 고통의 편린이 너무 잔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 회장은 미수(米壽·88세)의 나이에도 현업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내 유일한 기업인이다. 그러나 삼양식품의 역사는 순탄한 카펫 길만은 아니었다. 89년 이른바 ‘우지 파동’으로 회사는 도산하는 위기까지 갔다. 그가 정치적인 압박과 라면 산업에 무지한 일부 검찰의 여론 재판에 맞서 대법원 소송까지 가는 7년9개월간의 법정 싸움 끝에 무죄 판결을 받은 과정은 이 나라가 기업인에게 가한 참혹한 형벌이었다. 회사가 겨우 부활하자 이번에는 기업 사냥의 희생물이 될 뻔했다. 영남제분과 한국교직원공제회(교원공제회) 사건이 터졌을 때다. 사건과는 연관이 없었으나 일부 언론의 관련성 추측으로 심대한 고통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너무나도 잔인했던 7년9개월 수차례의 간청 끝에 그동안 묻혀있던 사건의 내막과 최근 이해찬 전 국무총리 골프 파동의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영남제분과 교원공제회 관련 비사, 그리고 인수합병(M&A)의 빌미를 제공한 신한은행과의 관계 등에 대해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법정 투쟁을 했으니 얼마나 타격이 심했습니까.
“법적 분쟁이 끝났다고 절대로 원상 회복되는 게 아니에요. 보릿고개를 해결해보려고 라면 사업을 시작했는데 우지 사건으로 본 피해는 엄청납니다. 60%에 달했던 시장 점유율이 졸지에 바닥을 쳤어요. 대부분의 시장을 경쟁사에 빼앗겼습니다. 수출을 맨 처음 시작했고, 세계 식품업계에서도 인정받아 수출 상품으로 각광받고 있었는데 일순간에 ‘불량 식품’으로 전락했어요. 거기다가 경쟁사는 미주지역에서 역선전을 시도해 그 피해는 말로 다 못해요.” 1000여 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났고 100억원이 넘는 제품이 반품됐다. 3개월 동안 공장 문을 닫아야 했다. 떠나는 직원에게 주어야 할 퇴직금만 70억원대였다. 서울 도봉동 공장을 팔아 퇴직금을 마련했다. 피해액만 해도 수천억원대에 이른다. “어떻게 견디겠어요. 재판이 끝나니까 외환위기가 터져서 700원, 800원 하던 달러 환율이 1600원대까지 갔어요. 계열사로 사료회사가 있었는데 사료 원가가 두 배로 늘고, 빚도 두 배로 늘어나는 겁니다. 우지 사건으로 그 난리를 겪었는데 무슨 도리가 있어요. 계열사였던 사료회사고, 유통회사고 다 날아가요. 당시만 해도 상호지급보증으로 묶여 있으니까 삼양식품도 부도를 안 낼 수가 없어요. 눈물을 머금고 법원에 화의신청을 했어요.” 화의신청을 하면서 일단 숨통은 텄다. 은행 이자를 조정 받았고 5년간 분할해 갚게 됐다. 전 회장은 45년 동안 토요일, 일요일 없이 출근했다. 부산 공장까지 팔아 4000억원대에 이르는 부채를 갚았다. 결국 지난해 3월 화의가 해제됐다. 그러나 삼양식품의 ‘고통’은 우지 사건에서 비롯됐다. 지난 세월을 더듬던 전 회장은 “내가 견뎌냈다는 게 신기한 거요”라고 조용히 읊조렸다.

그토록 엄청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봤는데, 손해배상 청구는 하지 않았습니까.
“무죄 판결이 났을 때 소송을 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보복이 두려워서 안 했어요. 내가 손해배상 청구를 하려면 이민을 가야 해요. 이 땅을 떠날 순 없지요. 그런데 참으려니까…. 정말 참는다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쓰라렸어요. 피오줌을 봤을 정도예요. 평생을 일궈온 공장들이 날아갔으니 수천억원을 피해 봤어요. 그런 걸 생각하면 국가를 상대로 배상 청구를 해야 하고, 정치권력을 남용한 사람이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하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강모, 김모 부장검사도 옷을 벗고 뉘우치도록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나 전 회장은 소송을 접었다. 이유는 뜻밖이었다. “또 당할까봐서”다. “보복을 당해본 사람은 알아요. 우리 변호사가 와서 소송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그래요. 담당 검사도 우리 회사를 이 잡듯이 파악했을 것이고, 가령 탈세가 있건 없건 세무당국에 자료를 넘기면 세무사찰이 나올 수도 있지 않으냐고 말이지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회사가 어딨어요?”
‘뽀빠이’ 캐릭터로 빨갱이 누명

▶1989년 11월 우지 파동 사태로 위기를 겪고 있던 삼양라면 판매촉진 운동을 벌이고 있는 강원도 원주시 공단협의회 회원업체 임직원들. 지역민과 협력업체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삼양식품은 10년 가까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60%에 이르던 시장 점유율도 급락했다.



권력과 안 좋은 기억이 있나 봅니다.
“그때 문득 72년인가, 이후락씨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때 엄청난 고초를 당했던 일이 떠올랐어요. 정말 쓰러질 정도로 당했어. 그때 우리가 ‘뽀빠이’ 캐릭터를 상품 포장지에 써서 굉장히 히트를 쳤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정보부에서 들이닥치더니 뽀빠이 캐릭터가 이북(북한)에서도 TV에 나오고 남한으로 침투하는 그림에도 나온다면서 내가 이북과 내통한다느니, 빨갱이라느니 하면서 이건 뭐 감당할 수 없도록 몰아붙여요. 처음에는 가만있다가 난데없이 연행해가서 그게 무슨 짓이냔 말이에요. 반공법 위반으로 잡아넣겠다는 소리만 하는 게 아니야. 조총련 자본이 들어왔다느니, 미국에 달러를 유출했다느니 하는데, 이건 죽는 게 오히려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이후락씨 고향이 울산인데 경쟁 회사를 키워주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김종필(JP)씨 하고 가깝게 지내니까 자신의 정적이었던 JP 자금줄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속은 모르지만…. 이 부장 조카가 중정 감찰실장이었는데 얼마나 고통을 주는지 생지옥 같았어요. 부도내고 회사문 닫으라는 압력까지 넣었으니까 말이오.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데, 도저히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못 내겠어요. (소송을) 내면 우리가 배상을 받겠지요. 그런데 회사를 생각하고 참으려니, 참 쓰라렸어요.”

우지 사건은 89년 11월 3일, 삼양식품을 비롯해 식품 5개사 대표와 실무자들을 검찰이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식품위생법’ 위반을 이유로 구속 입건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공업용 우지라는 말 자체가 없는데 왜 그처럼 잔인한 형벌을 받도록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처음부터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무죄 판결이 났으니까 이제는 말할 수 있어요. 정치적인 핍박을 받았어. 그것밖에 달리 설명할 아무런 위법이 없었어요. 내가 5공화국 때 전(全)씨 종친회장을 지냈어요.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되니까 새삼스럽게 종친회장을 한 것처럼 말하는데, 그게 아니야. 그전부터 해왔지요. 노태우 정권이 들어와서 전두환씨를 막 칠 때 우지 사건이 터지는 겁니다. 89년 아니오.” 기획 수사한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이게 얼마나 이상한가 말이야. 그때 우리 삼양식품이 5000억원 매출에 점유율이 60%였어요. 그렇게 성장해오는 동안 똑같은 우지를 계속 써왔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서 새삼 새로운 우지를 쓴 게 아니라고.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수출까지 같은 우지를 넣은 라면을 만들어 팔았어요. 63년에 첫 생산을 해서 사건이 터진 89년 11월까지 26년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왜 느닷없이 공업용 우지야?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검찰이 공업용 우지를 썼다고 발표한 게 11월 3일인데, 11월 16일에 당시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김종인 장관은 ‘우지를 사용해 튀긴 라면은 인체에 전혀 무해하다’고 발표했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이미 검찰 발표로 라면에 대한 유해·무해 논쟁이 일어나고 가공식품 전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증폭돼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들고 우리 삼양식품을 비롯해 5개사는 존폐 위기까지 가고 있는데 말이지.”

라면에 쓰는 기름이 결국 팜유로 바뀌었지요.
“우지보다 팜유가 더 쌉니다. 당시에도 팜유가 있었고 훨씬 가격이 쌌어요. 그러면 우지를 쓸 게 아니라 팜유를 써야 이익이 더 남아요. 솔직히 팜유는 말이 식물성이지 우지보다 하등급인 기름이오. 그래서 싸요. 그런데 왜 비싼 돈 주고 우지를 썼겠소! 내가 지금도 소신으로 가지고 있는 창업정신과 국민 건강 때문이야. 일본에서는 지금도 우지·돈지·팜유를 3대 3대 3의 비율로 사용하고 있어요.”

전씨 종친회장을 하면서 노태우 정권 때 정치자금을 요구받지는 않았습니까.
“전두환 정권 때도 정치자금이라는 걸 멀리했어요. 기업인으로서 고용을 해주고, 열심히 벌어서 경제에 도움이 되고, 세금을 납부하고, 식생활에 도움을 주면 내가 기업인으로서는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치자금 같은 건 기억에 없어요. 그런데 검찰에서 우리 직원 몇 사람 불러가더니 30여 분 만에 공업용 우지를 썼다고 발표해요. 그러니까 조선일보를 필두로 언론이 확인도 안 하고 냅다 써요. 조선일보는 라면 사업하다가 문을 닫았던 악연이 있는데…. 어쨌든 그때 보니까 나는 강원도 사람 아니오? 삼립은 황해도, 서울식품은 함경도, 오뚜기도 함경도고. 그런데 경상도 출신 기업인은 하나도 안 걸렸어. 그게 뭘 얘기하는 거요. 정치권력하고 무관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하지 않소. 왜냐, 그때 B유지라고 우리한테 납품하던 회사의 본사가 부산이야. 그런데 삼양을 포함해 입건된 5개 회사는 말할 것도 없고 농심이니 뭐니 전부 똑같이 그 회사 우지를 납품받아서 라면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런데 경상도 기업은 하나도 안 걸리고 5개 회사 대표만 구속이야. 회장이 울산인 농심은 미리 알았는지 한두 달 전에 팜유로 바꿨고. 그때는 장관도, 차관도 전부 영남 사람이야.”
형사사건 1심을 5년씩 끌어

그런데 사법부 판단까지 왜 8년 가까이 끌었을까요.
“그래서 내가 정치권력의 핍박을 받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세상에 형사 사건을 1심에서만 5년여를 끌었다는 게 말이나 돼요? 우리 변호사도 사법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그럽디다. 담당 검사가 과학에 대해서는 너무도 문외한이었는지, 당시 우지하고는 무관한 약학을 전공한 학자를 불러 우지에 관련된 증언을 요구했어요. 그 증언을 토대로 기소를 했는데 이건 기소 요건도 안 된다고 봤어요. 사건 자체가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서울지법에서 5년여 동안 재판부를 다섯 번이나 교체하면서 판결을 늦췄으니 그걸 내가 어떤 근거로 이해해야 되겠어요. 삼양을 잡으면 회장이 경상도 출신인 경쟁 회사가 큰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한 사건을 한 법원에서 5년을 끌 수 있느냔 말이오.” 그러더니 결국 유죄 판결이 났다. 전 회장은 항소했고 고등법원에 갔다. 이때 전 회장은 비로소 정치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고등법원의 재판관이 정읍 사람이에요. 지금도 계셔. 그 양반한테 검사가 찾아오겠다는 걸 만나주지 않았대요. 검사가 왜 판사를 찾아가려고 하지요? 정치적인 사건이니까 알아서 하시오, 그런 얘기 하려고 가나? 좌우간 고법 판사가 철저히 심리를 하더니 무죄 판결을 내려요. 이게 95년 7월 14일이에요. 근데 검찰이 또 반성하는 기색은 없고 대법원에 상고를 했어요. 그게 또 2년이나 걸렸는데 대법원에서도 무죄예요. 97년 8월 26일이오. 그러면 우지 사건을 지휘했던 강모, 김모 부장검사는 옷을 벗어야 이 땅의 법질서가 살아있는 것이고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오? 근데 오히려 승승장구야. 세상이 참 요지경이지.” 고려 말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우리나라 사람이 솜이불을 덮고 잘 수 있게 했다. JP는 일본에서 밀감을 처음 들여와 제주 도민의 소득을 증대시켰다. 전 회장은 라면 생산기술을 최초로 들여와 4000만 인구의 식품이 되게 했다. “밀가루가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굶어 죽었을 겁니다. 그걸 받아서 수제비 해먹고, 국수 해먹고 그럴 때였는데, 그것만 먹어선 안 되잖아요. 누군가 나서서 대안을 세워 해결해줘야 할 텐데 정치가에게만 기대할 수도 없고, 정말 애정을 가지고 걱정하던 중인데 내가 도쿄에 출장 갔다가 라면을 먹어본 겁니다. 그게 59년이지요. 이때 우리나라에도 라면을 보급하면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제일생명 사장으로 있던 그는 회사 경영 때문에 라면 사업을 벌일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때 전 회장은 일본 라면을 하나 끓여서 JP를 만났다. “맛이 어떠냐고 했더니 맛있다고, 이게 뭐냐고, 라면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국민 배부터 채워줘야 할 거 아니냐 했더니 빨리 하라는 겁니다. 빨리! 허허허. 그게 시작입니다.” <계속>


삼양식품은

‘라면 원조’우지파동 당시 시장 점유율 60%
1960년대 초반 전중윤 당시 제일생명 사장은 서울 남대문 시장을 지나가던 중 사람들이 꿀꿀이죽을 사먹으려고 줄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평소 일본을 자주 드나들던 전 사장은 일본에서 맛보았던 라면을 국내에 소개하기로 결심, 회사를 접고 라면 개발에 몰두한다. 이렇게 해서 63년 선보인 것인 국내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이다. 커피가 35원 하던 시절 개당 10원에 내놓았던 라면은 인기 상종가를 기록하면서 삼양을 종합식품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다 ‘우지 파동’이라는 파도를 만났다. 사건 초기 검찰이‘공업용 우지’라고 발표하고 매스컴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라면 유해 논쟁’이 일기도 했다. 삼양식품뿐만 아니라 국민이 대혼란에 빠졌다. 한편으론 지루한 법정 소송에 들어가고, 한편으론 새 삼양라면을 선보이면서 재기의 깃을 세웠으나 이번엔 외환위기를 만나면서 부도가 나고 만다. 98년 법원으로부터 화의 인가가 결정됐다. 삼양유지를 CJ에 넘기고 부산 공장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통해 지난해 3월 화의에서 벗어났다. 현재는 라면류를 비롯해 유아식품·장류 및 각종 스낵류와 축산물 가공품인 치즈·우유, 빙과류 등을 제조·판매한다. 2005년 말 현재 총자산 1930억원, 매출액 2745억원, 순이익 1226억원을 기록했다. 계열사로 라면 수프인 파·마늘·참깨 등을 가공 수급하는 삼양농수산, 제품 포장용 박스를 만드는 삼양판지공업, 강원도 대관령목장을 운영하는 삼양축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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