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해병대 어린 병사들 이라크 양민 학살 의혹
미 해병대는 큰 전투를 앞두고 사기를 북돋우는 방법을 안다. 팔루자 전투가 있기 전인 2004년 11월. ‘서드 원’ 또는 ‘막강 3대대’로 더 잘 알려진 미 해병 1사단 3대대는 2륜 전차 경주를 펼쳤다. 저항세력 용의자들로부터 빼앗은 말로 전차를 만들었다. 해병대원들에겐 사력을 다해 경주에 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킬로 중대 소속 해병대원들(팔루자 전투가 벌어진 날 맨 먼저 그 시로 진격하는 영광을 누렸다)은 고대 로마 시민 복장에 마분지로 만든 투구를 썼다. 손에는 커다란 K자가 새겨진 방패를 들었다. 진행자가 헤비메탈 곡(‘Cum On Feel the Noize’)을 틀며 경기 개시를 알리자 킬로 중대원들은 끝에 갈고리가 달린 급조한 몽둥이와 M16 소총 탄알이 빼곡히 박힌 공이 달린 체인을 쥐었다. 중대장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에서 따온 문구를 읊었다. “제군들이 이곳에서 하는 일은 영원히 기억된다.” 로마인들이 야만인을 살육할 준비를 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표현이다. 팔루자 전투는 처참했다. ‘막강 3대대’는 집집마다 수색전을 펼치다가 단 열흘 만에 대원 17명을 잃었다. 그러나 해병대원들은 사전 교육을 받았다. 부상자가 생기면 일단 로프로 묶어 안전지대로 대피시킨 뒤 최대한 응사하라는 지시도 그중 하나다. 대원들은 또 적이 여성 복장이나 인간방패 등 계책을 쓰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응 방식엔 많은 자유가 허용됐다. 민간인처럼 보이는 자들이 길가에 숨겨둔 폭탄을 터뜨리는 일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지휘관 중 한 명은 반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다. “만일 휴대전화를 가진 자가 눈에 띄면 머리에 그대로 쏴라.” 팔루자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TV 카메라맨 한 명은 부상당한 비무장 남성에게 해병대원이 발포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그 해병대원은 나중에 징계를 받지 않았다. 팔루자 전투는 용맹성이 생명인 ‘막강 3대대’엔 또 한 차례의 승리였다. 3대대는 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 오키나와, 인천, 장진호(長津湖), 그리고 베트남의 후에시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올렸다. 그러나 하디타시는 달랐다. 킬로 중대는 2005년 초가을 바그다드에서 3시간 거리인 안바르주의 조용한 마을 하디타에 도착했다. 시리아 국경을 넘어 이라크를 빠져나가거나 들어오는 저항세력의 길목 차단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3년간 세 차례나 이라크에 투입된 나이 어린 해병대원들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막상 무슨 일이 닥칠지 확신도 없었다. 하디타는 낯선 데다 불길하기까지 했다. 현지의 저항세력은 주민이 미국에 협조한 사실이 드러나면 누구든 참수한다는 말도 나돌았다. 해병대원들은 터지지 않은 수십 개의 급조폭발물(IED)도 발견했다. 그러나 저항세력들은 이미 그곳을 빠져나갔거나, 집안에 숨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일반 주민들 속에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현지 주민 중 일부는 해병대원들에게 음료수와 사탕을 갖다주거나 폭탄 수색을 돕는 등 꽤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정말 믿어도 되는가? 그리고 11월 중순 길가의 공중전화기와 연결된 155m 포탄의 존재를 알려주는 사람은 왜 아무도 없었는가? 킬로 중대 해병대원들은 적을 사살하는 훈련만 받았다. 저항세력과의 싸움에 대비한 훈련은 전혀 받지 않았다. 지휘관이라고 해서 더 수준 높은 훈련을 받지도 않았다. 미국이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육군도, 해병대도 저항세력과의 싸움에 적용할 수칙이 없었다. 그 후에도 기껏 현지 민간인들의 신뢰를 얻을 방법을 간혹 교육받았을 뿐이다(사실 2006년 늦은 봄에야 미군은 대 저항세력전 수칙의 초안을 마무리 짓는 단계다. 그 정도 시간이면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걸린 시간과 맞먹는다). 킬로 중대가 도착한 첫 몇 주 동안 조용하고도 위협적인 하디타의 분위기는 전면전이 벌어진 팔루자보다 훨씬 더 정상적이었다. 하디타에서 킬로 중대 대원들은 때때로 아이들에게 사탕을 건네주기도 했지만 주로 험비(지프와 경트럭을 합친 군용차량)를 타고 순찰 활동을 벌였다. 약간의 무력시위를 겨냥한 활동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론 손쉬운 공격 표적이 됐다. 2005년 11월 19일 아침 하디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적어도 해병대원 한 명과 이라크인 24명이 사망한 사실만은 분명하다. 현지인들은 미군이 냉혹하게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주장한다. 뉴스위크와 기타 언론기관이 입수한 비디오 화면에 등장하는 목격자의 설명대로라면 미군의 비도덕성과 잔인성은 차마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해병대 측은 처음엔 미겔 테라자스(20) 일병을 포함해 민간인 15명이 IED 폭발로 사망했으며 나머지는 저항세력과의 교전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후 공식적인 설명이 바뀌었다(거기엔 타임지의 3월 기사도 한몫했다). 미 국방부가 일부 의원에게 브리핑한 내용에 따르면 미군은 현재 전쟁 범죄 여부를 가리려고 킬로 중대를 수사 중이다. 소름 끼치는 사진을 본 수사관들은 은폐 여부도 수사 중이다. 설상가상으로 다른 곳에서도 잔인한 학살을 저질렀다는 보도도 있다. 최전선도 없고, 민간인과 저항세력을 식별하는 손쉬운 방법도 없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주는 압박감에 자제력을 잃은 어린 병사들이 학살을 저질렀다고 알려졌다. 베트남전 때는 마을이 불타고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미국인 다수는 미군을 욕했다. 사람들은 참전용사가 귀국하면 침을 뱉고 “아기 살인자”라고 불렀다. 미국은 당시 자신들의 불명예스러운 행위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은 대개 해병대와 육·해·공군 병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미국민은 갈수록 지도자들을 비난한다. 어린 미군 병사에게 적절한 훈련도 시키지 않은 채 감당하기 힘든 상황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군이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늘면서 부시 행정부로선 단지 군인들의 목숨을 보호하기보다는 그들의 명예와 품위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철군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질 듯하다. 하디타는 미 라이 양민 학살 사건 이후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될지 모른다(베트남전 당시 미 보병 부대는 미 라이 마을에서 대원 중 일부가 부비 트랩을 건드려 전사하자 보복으로 민간인 수백 명을 무차별 사살했다). 이라크인들의 분노도 전적으로 정당화될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이번 비극의 규모가 과장돼선 안 된다. 논란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미국은 아직 역사상 가장 규율 있고 인간적인 군대를 전장에 투입한다. 확보한 노획물에 탐닉한 고대 군대나, 부주의하게 민간인과 수감자를 사살하는 훨씬 더 현대적 군대에 비하면 미군은 자제력의 본보기다. 하디타에서 사망한 이라크인 24명은 1968년 미 라이에서 줄지어 살해된 300명이 넘는 희생자와 비교하면 소수다. 지금까지 이라크에서 전사한 약 2500명의 미군이 베트남에서 전사한 5만8000명에 비하면 소수인 점과 같다. 그럼에도 하디타는 이라크전의 꺼림칙한 진실을 웅변한다. 젊은이들이 해병대에 자원하는 이유는 모집 광고마따나 숭고한 전투에 참가하는 용감한 기사와 같은 전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군대판 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일원이 돼 인도주의적 활동가가 되는 모습은 꿈에도 꾸지 않는다. 훈련받을 때도 무기를 다루고 적을 사살하는 법을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언어와 종교가 다른 외국인들에게 관용과 친절을 베푸는 방법은 그리 오래 배우지 않는다. 하디타에서 IED 폭발로 부상당한 킬로 중대 제임스 크로산 병장은 이렇게 말했다. “치안유지 업무를 맡기려고 우릴 그곳에 보냈다면 매우 불쾌하다.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니까.” 용맹한 전사와 우호적인 구호요원 간의 갈등은 저항세력과의 싸움에 이미 내재돼 있다. 이 두 가지 모습은 굳이 서로 모순되지도 않는다. 현지인의 마음을 사려면(다시 말해 은밀한 저항세력이 위협하거나 지배하는 마을을 평화로운 마을로 만들려면) 현지인에게 선택을 제시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최고의 친구 아니면 최악의 적이 되라는 선택 말이다. 그러나 당근과 채찍의 균형은 빈번하게 미묘해진다. 또 그런 균형을 이루려면 대개는 고도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인이 요구된다. 저항세력과 싸우는 훈련을 받는 미 특수부대는 대체로 일반 해병대원보다 나이도 많고, 더 성숙할 뿐 아니라 교육 수준도 더 높고, 외국어 구사 능력도 더 뛰어나다. 그러나 이라크에 투입될 특수부대 병력(전 세계적으로 약 2만 명)은 수가 충분치 않다. 바꿔 말하면 나이 어린 육군 병사와 해병대원들에게 그 일이 맡겨졌다는 뜻이다. 2003년 봄 이라크 침공 직후 제임스 매티스 중장(당시 미 해병 제1사단 사령관)은 점령 하의 이라크 주민을 상대하려면 부대원들이 더 신중하고 창조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기갑 차량 속에서 작전을 펼치는 일부 보병 부대와 달리 매티스 휘하의 병력은 직접 거리로 나가 현지인들과 접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병대원들은 아이들과 축구 시합을 하고, 집과 학교 재건도 도왔다. 또 이들은 자신을 침략군처럼 보이게 하던 선글라스도 벗어던졌다(사소한 듯 보여도 중요한 사실이다). 매티스는 제101 공수사단의 데이비드 페트레우스 중장 등 가장 눈에 띄는 몇몇 장군만 제외하면 저항세력과의 싸움에 필요한 전술에서 매우 진취적이었다. 그러나 매티스는 휘하 장병들에게 엇갈린 신호를 보냈다. 지난해 자신의 옛 본부인 펜들턴 기지 근처 샌디에이고의 한 조사위원회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들과 싸우는 일이 재미있다. 정말 끝내준다… 나는 싸움을 좋아한다.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고 여성을 5년간 두들겨 패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남자로서 자격이 없다. 그래서 그런 친구들에게 총질하는 일이 너무 재미있다.” 그 발언 때문에 매티스는 고위 장성으로부터 질책당했다. 그러나 그렇게 엄한 질책은 아니었다. 부시 대통령이 그를 막 해병대 제1 원정군 사령관 겸 해병대 중앙 사령부 책임자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매티스의 발언이 19세의 평범한 해병대원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지 상상이 간다. 그들은 살인이 비디오게임처럼 재미있다고 여겼으리라. 해병대는 충성과 군기로 유명하지만 ‘총부터 먼저 쏘고 질문은 나중에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몇몇 사병이 뉴스위크에 전했다. 해병대원들은 2004년 팔루자 전투의 느슨한 교전규칙(한 사병의 말마따나 ‘개척시대의 서부’처럼)에 만족스러워 했다. 그리고 그 후 하달된 더 엄격한 일반 시가지 정찰 규칙에 별로 괘념치 않았다. 메릴랜드주 출신의 해병대원 칼리드 아지즈 병장은 그 규칙을 비웃었다. “그 규칙을 따르려면 손을 흔들고, 섬광 수류탄을 던지고, ‘안녕’이라고 인사해야 한다. 그 후 차의 앞면을 쏘고, 타이어를 쏘고, 다른 쪽 타이어를 쏘고 엔진을 쏜 뒤 앞 유리창을 쏴야 한다. 대체 실전에서 그럴 여유가 어디 있는가.” 그런 규제는 도처에 도사리는 위험과 함께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지난해 12월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귀국한 몇몇 육군 사병을 뉴스위크가 인터뷰했다. 바그다드에 있는 슬레이어 기지의 전차 대대에서 근무한 클리프 힉스는 병사들이 벤즈헥솔을 한번에 다섯 알씩 삼켰다고 말했다. 지루함과 혐오감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일반적으로 파킨슨병 치료제로 사용되는 이 약은 많이 먹으면 강력한 환각 작용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스테로이드제와 신경안정제를 복용했다. 또 진통제에 중독되고 술도 마셨다. 완전히 약에 취한 채 기습공격과 정찰에 나서곤 했다.” 18세 생일을 6개월 앞두고 자원 입대한 힉스의 말이다. “우리는 항상 엉뚱한 사람들을 죽인다. 주로 실수다. 우리 대대의 한 친구는 전차로 일가족을 짓밟았다.” 힉스의 혐오감은 2004년 1월 정찰 도중 극에 달했다. 바그다드의 한 주택개발지구에서 유혈 현장을 목격했을 때다. 결혼식 축포를 공격으로 오인한 미군 몇 명이 대대적인 포격으로 응수했다. 결국 소녀 한 명이 사망했다. “문 안을 들여다봤더니 여자 아이가 목에 관통상을 입고 숨져 있었다. 엄마도, 할머니도 모두 넋이 나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정말 몹쓸 짓이야,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어’. ” 힉스는 말라리아 치료제 복용을 중단했다. 병에 걸리면 후송되리라는 기대에서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매복공격을 받을 때 보병들이 간혹 험비 차량 밖으로 다리를 내놓는다고 한다. 치명적이지 않은 부상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힉스의 주장은 계속 이어졌다. “이라크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는 병사가 많다. 돈과 가재도구를 훔쳐 자랑하고 다닌다. 휴대식량 가방 속에 대변을 본 후 음식을 구걸하는 노인에게 던져주는 사병도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나 장애 판정을 받아 귀국하는 힉스를 비롯한 일부 참전용사의 설명은 분명 반감이 깃들어 있으며 과장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라크 지도자들은 오래전부터 미 점령군의 월권에 항의했다(사석에선 미군에게 떠나지 말고 남아 이라크가 내전에 빠져들지 않도록 막아달라고 애걸한다). 지난주 뉴욕 타임스는 누리 카말 알-말리키 총리의 말을 인용했다.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의 많은 군인이 “이라크 국민을 존중하지 않는다. 차량으로 깔아뭉개고 단지 의심 때문에 사살한다. 절대 용납하지 못할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나중에 말리키는 자신의 말이 잘못 인용됐다고 말했지만 타임스는 극히 사소한 오역이 있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말리키의 말 중 폭력이 ‘일상적 현상’이란 부분은 ‘자주 발생하는 사건’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사미르 수마이다예 이라크 주미대사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미군의 잔혹 행위를 직접적으로 비난했다. 자기 가족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수마이다예에 따르면 1년 전 미 해병대원들이 그의 사촌 집을 기습 공격했다. 사촌은 안바르주 작은 마을의 교장이었다. 해병대원들은 집에 와 있던 사촌의 대학생 아들을 사살했다. 그 집에 있던 무기라곤 공포탄이 장전된 AK-47 소총뿐이었다. 수마이다예는 연합군 사령관 조지 케이시 대장에게까지 항의했지만 미군의 총격은 정당방위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그리고 수사기록을 보고 싶으면 정보자유법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수마이다예는 “그것은 무자비한 살상이었다”며 “살인자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가차없이 제거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라크에선 모호한 상황에서 민간인이 살해되는 일이 다반사다. 저항세력과의 총격전 도중이나 검문소에서 속도를 늦추거나 정지하지 않으면 그런 일이 생긴다. 그처럼 부당하거나 가위 전쟁범죄라고 불릴 만한 공격이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조사가 시작돼도 질질 끌다가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언론에 보도되는 횟수가 늘었다. 이샤키 마을의 기습공격을 이끈 육군의 한 지휘관은 지난주 미 수사관들로부터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미국의 추산에 따르면 그 공격에서 민간인 아홉 명이 피살됐다. 당초 미군이 민간인을 처형한다고 이라크 경찰이 고발했었다. 피해 민간인 중에는 75세 할머니와 생후 6개월 된 아기도 있었다. 또 다른 사건으로 해병대원 여러 명과 한 명 이상의 해군 하사관이 캠프 펜들턴의 영창이나 기지 내에 감금돼 있다. 이들은 4월 26일 한 이라크 남성을 살해한 혐의가 있는지 판정을 기다리는 중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해병대원들은 그 남자를 집에서 끌어내 총을 쏜 다음 시체 옆에 무기를 놓아둠으로써 그가 반군인 듯 보이게 하려 했다. 하디타 사건은 군의 형사사법 절차를 밟을 동안 분명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된다. 아직 아무도 범죄행위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사를 받고 있는 두 해병대원의 변호사는 “정보를 흘리는 놈은 광장에서 목을 매달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 변호사는 1980년대 해병대의 최고 변호사로 활약한 데이비드 브람스 퇴역 준장이다. “앞으로 놀라운 사실이 몇 가지 밝혀지겠지만 국방부 쪽에서 나올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내용인지 밝히지 않았다. 하디타 마을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간담을 서늘케 한다. 11월 19일은 쾌청하고 쌀쌀한 날씨의 “눈부신 아침”이었다고 타에르 타비트 알-하디티는 돌이켰다. 당시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커다란 충격음이 벽을 뒤흔들었다. 주방 창문으로 달려가 길 건너편을 내다봤다. 부근에서 IED가 폭발해 미군 한 명이 사망했지만 타비트는 그 내막을 몰랐다. 집 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군인들이 영어로 크게 상스러운 욕을 해댔다(그는 그 욕이 ‘f---’라고 생각했다). 고함소리가 더 커지더니 다른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두두두두 하는 기관총 소리와 섬광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였다. 그러곤 이웃인 압델 하미드 하산의 집으로 향하는 미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병대원 몇 명이 하산의 집으로 들어갔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곧 창문 밖으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신참 기자인 타비트는 이튿날 아침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시체보관소를 찾아갔다. 하산의 집에선 11명의 가족 중 일곱 명이 죽은 채 발견됐다. 그 집의 최고 어른은 부인과 함께 근거리에서 총탄을 맞았다. 맹인이며 휠체어에 의지하던 노인이었다. 해병대원들은 두 집을 더 공격해 가구를 부수고 거주자에게 총질을 했다고 타비트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중 한 집의 주인은 중고차 영업사원인 자말 아예드 아메드(40)였다. 그는 경찰관, 현지 관료, 그리고 대학생인 형제 셋과 함께 집에 있었다. “미군이 쳐들어와 자말에게 물었다. ‘에르하브? 에르하브? (테러리즘? 테러리즘?)’ 그는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자말의 부인 아스마아는 돌이켰다. 뉴스위크가 취재차 고용한 인권 조사원이 그녀와의 인터뷰를 비디오테이프에 담았다. 그 테이프에 따르면 해병대원들은 “무기를 갖고 있느냐”고 캐물었다. 형제들은 AK-47 소총 두 정을 내놓았다. 그중 하나엔 탄환이 다섯발 들어 있었다. 현장은 아비규환이 됐다. 집안 여자 중 한 명은 방문 하나를 미친 듯 밀어댔고 미군들은 그 여자가 비명을 못 지르게 막으려 애썼다.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려퍼진 뒤 미군들은 떠났다. 형제 네 명은 작은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또 다른 하디타의 주민 히바 압둘라도 비디오테이프에 증언했다. 남편 라시드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집 앞에서 IED가 폭발했다. “내가 눈을 뜨고 라시드를 쳐다보자 그는 ‘우리는 분명 죽을 거야’ 라고 말했다.” 히바가 “왜 그런 말을 해요”라고 되물었지만 이미 유산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히바는 회상했다. “비가 내리는 듯했다.” 미군들은 곧 히바네 집 문에도 총격을 가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와 가족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두 발의 총성이 들린 후 ‘아, 안돼’ 하는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히바에게 들렸다. 총성이 몇 발 더 울린 후 라시드가 외쳤다. “우리 엄마를 죽였어!” 히바는 남편의 입을 막으려 했고 한 미군 병사가 시아버지에게 “너, 너” 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시아버지가 일어서려 할 때 가슴에 총을 쐈다고 회상하며 히바는 카메라 앞에서 울부짖었다. 미군들은 시체를 헤아리는 동안 “오케이” “좋아”를 연발하며 웃어댔다. 히바는 방바닥에 누운 채 양손을 허공으로 뻗은 시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전했다. 미군은 그렇게 누워 있는 그녀에게 총질을 했다고 한다. 사파 유니스라는 12세 소녀가 뉴스위크 기자에게 전한 이야기는 가장 슬프고 추악했다. 그날 아침 해병대원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소녀는 엄마와 함께 침실로 도망쳤다. 군인 한 명이 뒤를 쫓으며 총격을 가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군인들이 떠난 후 소녀가 말을 건넸지만 엄마는 이미 피범벅이 돼 있었다. “엄마, 엄마” 울부짖던 소녀는 비로소 엄마가 숨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빠도 주방 문 근처에 누워 숨진 채로 발견됐다. 숙모와 다섯 형제 자매도 모두 사살됐다. “욕실에 숨어 있었던 게 잘못이다. 다른 가족들처럼 죽었어야 했다”고 사파는 돌이켰다. 지금은 사촌과 함께 사는 그녀는 “미국인들은 살인자, 범죄자들이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울부짖었다. 하디타 사건에 직접 연루된 미군들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킬로 중대의 민사팀(전투 후 민간인 문제를 다루는 해병대원들)에서 일한 상병 한 명이 뉴스위크에 전한 얘기는 달랐다. 허술한 부분이 훨씬 더 많은 이야기였다. 11월 19일 아침,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에 휩싸였다”고 스콧 젭슨은 말했다. 그는 하디트에 있는 킬로 중대의 기지에서 무선 교신을 감청 중이었다. 현재 뉴저지주의 보안관인 젭슨은 이라크 가정의 피해 실태 파악을 위해 파견된 팀의 일원이었다. 그 팀은 나중에 가족을 잃은 민간인들에게 돈으로 보상했다. 미군의 발포로 부상 또는 사망한 민간인이나 가족에게 보상하는 일은 일반적 관행이다. 보상금은 민간인 1인당 최대 2500달러였다. 하디타에서 해병대 측이 피해자 가족 15명에게 지급한 보상금은 총 3만8000달러였다. 해병대가 진입한 가옥들을 점검한 젭슨은 이혼 변호사로 일하는 한 주민과의 대화를 돌이켰다. “그는 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희한한 일이었다”고 젭슨은 말했다. 젭슨은 조사에 응한 이라크인들은 “저항세력이 개입됐음을 알았으며… 몇몇 집이 저항세력에게 문을 열어준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폭발현장에 있던 택시에서 내려 도망치던 중 총격을 받아 숨진 남자 대학생 네 명과 택시 운전사도 저항세력이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현지 주민들이 미 해병대에 밝힌 바에 따르면 그들은 등교 중이었다. 그러나 “그날 문을 연 학교는 한 곳도 없었다”고 젭슨은 주장했다(인권 조사원이 카메라에 담은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학생들은 바그다드에 있는 한 기술대학에 등교하는 길이었다). 젭슨은 하디타의 이라크 민간인들이 거짓말로 사실을 숨기려 한다며 “처형은 없었다”고 말했다. 미군 고위 간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현재 진행 중인 공식 수사는 몇 달이 더 걸릴지 모르지만 사건 은폐 의혹을 조사한 결과는 더 빨리 나올 가능성이 있다. 미 국방부는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포로 학대 사건 때처럼 관련 사진이 공개되고 적절한 대응에 실패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중량급 간부에게 수사를 맡겼다. 노련한 특수부대 간부로 델타포스 특공대를 지휘한 경험이 있으며 엄격하기로 소문난 엘든 바지웰 육군 소장이 바로 그다. 합참의 한 고위 장교는 이번 수사가 “고위급에 의해 신속하고 독립적으로 진행될 계획”이라고 말했다. 펜들턴 기지에선 쉬쉬하지만 해병대원과 그 가족들 사이에는 킬로 중대 내부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두고 소문이 무성하다. 남편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익명을 요구한 ‘막강 3대대’ 소속 하사관의 아내는 2005년 초 팔루자 주둔 부대가 귀환하고 제프리 체사니 중령이 대대장에 부임한 후부터 부대 기강과 사기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뉴스위크에 전했다(고향 콜로라도주에 사는 체사니의 친구들은 그를 애국심 강하고 헌신적이며 신앙심이 두터운 해병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킬로 중대에는 마약, 술, 신참 괴롭히기 등 문제가 많았다”며 “하디타에서 양민을 학살할 때 군인들이 마약에 완전히 취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팔루자와 하디타 두 지역 모두에서 킬로 중대와 함께 7개월을 보낸 프리랜서 사진작가 루시안 리드는 그런 끔찍한 일을 예고하는 어떤 조짐도 발견하지 못했다. 리드는 이렇게 말했다. “부대원들의 사기가 낮지는 않았다. 다만 모두들 운명을 하늘에 맡긴 듯한 모습이었다. 전쟁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식이었다. 그들은 행복해하지도, 즐거워하지도 않았지만 화가 나있지도 않았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그런 끔찍한 사건을 예고하는 조짐은 전혀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정말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지난해 겨울 펜들턴 기지로 돌아온 ‘막강 3대대’ 대원들은 지역 주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감수성 훈련’을 받았다. ‘학살자’나 ‘살인자’라는 공격적인 단어를 쓰면 안 되고 해병대 특유의 으르렁대는 고함소리도 내지 말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앞서 인터뷰한 3대대 하사관의 아내는 “모두들 ‘왜 우리가 그런 나약한 일에 신경 써야 되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디타 사건이 터진 이후부터는 3대대 대원뿐 아니라 모든 해병대원들이 ‘핵심적 가치’ 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라크에 주둔한 모든 해병대원과 미군에게 절실한 부분은 보다 효과적인 저항세력 진압 훈련이다. 미국이 1960년대와 70년대 초 동남아에서 게릴라전에 패배했는데도 국방부는 이상하게도 실책에서 교훈을 얻지 않기로 결정한 듯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첨단기술에 의존하는 재래식 전쟁에 초점을 맞췄다. 게릴라전은 한 특수부대에 맡겨졌다. 일반 육군·해병대 지휘관 대다수는 그 특수부대를 ‘뱀 잡아 먹는 사람들’로 부르며 경멸했다. 2년 전 이라크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케이시 대장은 참모들에게 본부의 저항세력 진압 전문가와의 회의를 소집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런 전문가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이야기는 더글러스 맥그리거 퇴역 대령이 쓴 글 ‘장성들을 파면하라(Fire the Generals!)’에 나온다. 맥그리거는 간소하고 지능적인 이라크 침공의 초기 전략을 입안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라크전 초기 후세인의 형편없는 군대가 곧바로 맥없이 무너지자 미군은 잘못된 우월감에 빠졌다. 일부 고위 지휘관들은 그 승리가 무의미하다는 점을 알았다. 저항세력이 세를 정비하자 당시 육참총장 대리이던 잭 킨 대장은 동료 장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미군은 대규모 전쟁에 익숙하다. 그 어떤 나라보다 그런 전쟁에 강하다. 그러나 저항세력을 진압할 기술은 없다.” 2003년 7월 중동 지역 주둔 미군 전체를 지휘하는 존 아비자이드 중부군 사령관은 미국이 “전형적인 게릴라전”에 직면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아비자이드는 미군의 배치나 전술을 바꾸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맥그리거는 지적했다. 오히려 아비자이드는 이렇다할 군경력이나 경찰 경력도 없는 이라크인에게 자치를 맡기자고 주장했다. 합참본부는 새 이라크군 창설에 필요한 훈련팀을 파견하는 데 시간을 질질 끌었다. 맥그리거는 미군 장성들이 순찰 시 소대장이나 분대장을 대동하지 않은 점도 지적했다. 이는 정확한 현지 상황과 병사들이 그런 곳에서 생존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는 데 필수적 조치다. 라마디에서 정찰을 돌던 한 병장은 한 기자에게 “내 임무는 간단하다. 당신도 할 수 있다. 누군가 내게 폭탄을 던질 때까지 하루 종일 차를 몰고 돌아다니면 된다. 단 아랍 사람들을 미워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만일 장성들이 현지 상황을 더 잘 파악했다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으리라고 맥그리거는 썼다. 미 해병대원들은 알아서 살아남도록 내버려 두면 스스로 방법을 찾아낸다. 킬로 중대원들은 IED를 사용하면 처절한 보복이 따른다고 하디타 주민들에게 “경고하려는 심산”이었는지 모른다. 저항세력을 다루는 해묵은 원시적 전술이다. 먼 옛날 로마인들이 야만인들에게 썼던 수법처럼 말이다.
With SARAH CHILDRESS in Baghdad, SALIH MAHDI in Haditha, JOHN BARRY, DAN EPHRON and MICHAEL HIRSH in Washington, MICHAEL HASTINGS in New York, JAMIE RENO in San Diego, ROD NORDLAND in London, STEFAN THEIL in Berlin and BABAK DEHGHANPISHEH in Beirut 강태욱·차진우 tkang@joongang.co.kr
3차례의 학살 의혹 |
지난해 11월 하디타에서 발생한 민간인 살해 사건을 계기로 이라크 내 다른 곳에서도 미군이 민간인을 살해했을 가능성에 관심이 쏠린다.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는 지난주 미군의 폭력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이라며 분노했다. 최근 발생한 가장 논란 많은 3건의 사건을 살펴본다. 교도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미군 사병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 1명 *사건 발생 지역: 하만디야 *사건 개요: 미 해병대원들은 이라크인 한 명을 집에서 끌어내 사살한 뒤 AK47 자동소총과 삽 한 자루를 시신 옆에 놓아뒀다고 알려졌다. 피살자가 죽기 직전 급조폭발물(IED)을 설치하려 했다고 오도하려는 목적이다. *현 상태: 미 해군 수병 한 명과 해병대원 7명이 팬들턴 기지 내 영창에 수감됐다. 영창에 갇힌 해병대원 한 명의 변호사는 이들에게 살인·납치·음모 혐의가 적용될 듯하다고 말했다. 미군 측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 최대 11명 *사건 발생 지역: 이샤키 *사건 개요: 미군은 3월 15일 한 집을 습격하던 중 공격을 받자 공군에 폭격을 요청해 집을 산산조각내고수 미상의 거주자를 사살했다. 그 과정에서 이라크인 폭탄 제조자 한 명이 죽고, 알카에다 지도자 한 명이 체포됐다. 이라크인들은 그 후 미군이 여성과 아이를 포함해 집안에 있던 이라크인 11명을 사살한 뒤 범행을 감추려고 집을 완전히 쓸어버렸다고 주장했다. *현 상태: 미군은 교전수칙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라크인들은 독자적인 수사를 요구했다.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 24명 *사건 발생 지역: 하디타 *사건 개요: 지난해 11월 19일 미군 행렬이 하디타시를 통과할 당시 IED가 폭발해 미 해병대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날 하루 동안 이라크 민간인 24명이 살해됐다. 미 해병대는 처음엔 이라크 민간인 15명이 사살됐으며 나머지는 저항세력과의 교전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 수사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24명 전원이 사살됐다. *현 상태: 미군은 사건 자체뿐 아니라 은폐 여부도 수사 중이다. 말리키 이라크 총리는 지난주 이라크 당국의 독자적인 수사를 요구했다. 하디타 민간인 사살 사건의 목격자는 사건 당일 아침에 끔찍한 일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①IED 공격 IED 공격으로 미겔 테라자스 일병이 피살되자 킬로 중대의 동료 해병들은 그 폭발을 일으킨 저항분자 색출에 나섰다. ②가택 수색 폭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하산 가족의 집이 있었다. 미 해병대원들은 그 집으로 쳐들어가 가족원 11명 중 7명을 살해했다고 알려졌다. ③집집마다 찾아나서다 폭발 지점에서 다음으로 가까운 곳이 요우니스의 집이었다. 미 해병대원들은 그곳에서 8명을 사살하고 12세의 사파만 살려뒀다. ④계속된 가택 수색 아예드 가족은 미 해병대원들이 자신의 집 두 채에 들이닥쳐 형제 4명을 다른 방으로 끌고 가 살해하고 떠났다고 말했다. ⑤불법 살해 미 해병대원들은 택시로 바그다드로 향하던 대학생 4명을 내리게 한 뒤 운전사와 함께 사살했다고 이라크인들은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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