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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쿠퍼 프루덴셜 금융 아시아총괄본부 사장

크리스토퍼 쿠퍼 프루덴셜 금융 아시아총괄본부 사장

두 번째 바토크 주인공은 프루덴셜 금융 크리스토퍼 쿠퍼 사장이다. 8월 2일 오후 8시 청담동 이태리 음식점 ‘안토니오’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첫마디는 “분명 말하겠는데 전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사람입니다”였다. 정장 재킷을 벗은 채 짧은 머리를 뒤로 넘긴 쿠퍼 사장은 전형적인 미국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토크가 끝날 무렵에는 그가 평생 외국 한번 안 나가봤을 것 같은 한국 ‘토박이’ 같았다.

청담동 이탈리아 음식점 ‘안토니오’에서 와인으로 시작된 두 번째 바토크. 쿠퍼 사장은 의례적인 ‘인사’를 하기도 전에 “나중에 또 만나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하죠”라고 했다. 외국인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소주 한잔 하자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소주는 좋아하세요?”라고 물었다. “길거리(street)에서 마실 땐 소주가 최고죠. 근데 일반 음식점(house)에선 산사춘이나 백세주를 훨씬 좋아해요. 달콤한 게 입에 착착 달라붙더라고요.” 기자는 할 말을 잃었다.

와인을 주문하면서 “‘마씨’라는 와인인데 전 세계에 6병밖에 없죠. 600달러 정도 하는데 사 주실 거죠?”라면서 씩 웃는다. 그러더니 “농담이에요, 농담. 같은 마씨 상표지만 제가 평소에 마시던 걸로 하죠”라고 너스레를 떤다.

와인을 잔에 채우자 훈제 연어가 안주로 나왔다.
건배후 잔을 내려놓은 쿠퍼 사장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전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어요. 부인과 3남매를 두었죠. 8세인 아들 제이콥과 6세인 딸 안드리아나, 이제 20개월 채 안된 막내 아들 제릿이에요. 근데 3명 모두 한국인 의사의 손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났죠.
미국 뉴욕에서 제이콥을 낳을 때, 플로리다에서 안드리아나를 낳을 때, 두 번 다 담당 의사가 한국인이었어요. 한국에서 난 막내도 물론 한국 의사가 처음 안았죠. 참 신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한국이란 나라가 처음부터 낯설지 않았나 봅니다.”



“외국인 학교 적은 게 아쉬워”

5명 식구의 한국살이가 궁금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주말엔 뭘 하는지, 힘든 점은 없는지 말이다.

“처음 한국에 올 땐 부인과 딱 ‘2년’만 살고 가기로 했었죠. 그러다 2년이 3년이 되고, 지난해엔 다른 곳으로 발령까지 거절하게 됐죠.
그만큼 한국의 생활이 편안하고 좋네요. 운 좋게도 이태원에 마당이 있는 집을 구했어요. 아이들과 축구도 하고 친구들을 불러 새벽 3시까지 술도 마시기 좋은 장소죠. 주말엔 보통 저나 아내나, 아이들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어요.
토요일 아침부터 태권도 수업이다 뭐다 해서 애들을 데리고 다니죠. 때론 놀이공원이나 워터 파크 같은 곳에 가서 하루종일 놀 때도 있어요. 일요일엔 마당에서 바비큐를 해 먹거나 외식을 하며 보내는 편이고요.”

“음식이요? 사실 굉장히 걱정했는데…. 한국엔 김치밖에 없는 줄 알고. 그런데 먹으면 먹을수록 한국 음식 맛있던데요? 이젠 한국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한식을 찾아요. 산낙지, 산오징어 같이 살아있는 것만 아니면 다 좋아해요.
보신탕도 가끔 먹는데, 미국 사람이라 그런지 정력에 좋은 건 모르겠더라고요. 하하. 아무리 그래도 제겐 순두부가 최고입니다. 제 아이들도 몹시 좋아하고요. 얼큰하면서 시원한 그 맛, 아시죠?”

보신탕까지 먹는다니 할 말을 잃었다. 한국살이에 고민은 없을까?

“한국생활에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외국 학생들을 위한 교육 시설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홍콩이나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만 해도 외국인을 위한 교육 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거든요.
교육의 질이 아쉽다기보단 선택의 폭이 많았으면 해요. 서울에서 다닐만한 외국인 학교가 3~4개밖에 안 되니, 좋으나 싫으나 그곳에 보낼 수밖에 없거든요. 앞으로 꼭 개선돼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쿠퍼 사장의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현재 서울시에 있는 외국인 학교는 10여 개다. 이 중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과정과 인력을 보유한 학교는 7개밖에 안 된다.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곳은 6개뿐이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사업 철학

쿠퍼 사장은 회사 내에 ‘일 잘하는 상사’라고 평이 나있다. 프루덴셜사의 현대투자증권 매입을 주관했던 그다. 그런데도 직원들의 입에서 ‘일 잘한다’는 말이 나오는 건 그들도 쿠퍼 사장의 능력만큼은 인정한다는 소리 아닌가. 그 능력의 비결이 뭔지 궁금했다.

“전 바닥부터 시작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어떤 연줄도 있지 않았습니다.” 와인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며 얘기를 계속했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포드에서 일했는데 자동차 수송 일부터 시작했죠. 아버지도 저와 같이 바닥에서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성실함을 인정받아 테네시주에서 개인 사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농장과 공사장 장비를 담당하는 포드 하청업체였지. 아버지 밑에서 15세 때부터 일을 했어요. 간단한 기계를 조립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모든 기술자를 공평하게 대우했던 모습은 지금도 제겐 지침서가 됩니다. 바로 제 철칙이 된 것이죠.”



아버지라는 말, 항상 가슴을 뜨겁게 한다.

“부모님 두 분 다 대학교를 나오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대학에 진학하길 바랐죠. 일찍부터 일을 시작했기 때문인지 대학생활 중에도 ‘돈 버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하게 되더군요. 그러다가 2학년 때 작지만 제 개인 사업을 하나 시작했습니다. 조경 사업이었어요.
말이 조경이지 대부분의 일은 잔디 축구장을 만드는 고된 것이었어요. 그때 제가 만든 20개의 잔디구장 위에선 아직도 아이들이 공을 차고 놉니다. 1만5000달러에 사업을 넘기면서 그 돈으로 대학교 등록금을 냈습니다.
그때 나이가 19세. 그 후부턴 부모님에게 단 한 번도 도움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대학교 졸업, 펩시 입사, MBA 과정, 컨설팅 회사, 프루덴셜 입사, 그리고 지금까지 말이죠.”

얘기를 계속하는 쿠퍼 사장의 얼굴에서 장난기 어린 표정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쿠퍼 사장이 프루덴셜에 입사한 건 1998년 1월이다. 어떻게 입사 10년이 채 안 돼 아시아 총괄 사장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을까?

“대학교 2학년 때 유럽에서 특별 프로그램을 이수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해외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죠. 프루덴셜 입사 후 해외에서 일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원했습니다. 그 덕에 호주와 일본에서 일할 수 있었죠.
미국 속담에 ‘장님 나라에선 애꾸눈이 왕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루덴셜에서도 외국 경험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인 제가 결국 한국으로 오게 된 이유기도 합니다.”



‘해고’ 뒤끝 깨끗하지 않아

“이젠 약간 심오한 주제로 넘어갑시다”라는 기자의 권유에 쿠퍼 사장은 “Uh Oh!”라는 탄성을 지른다. 한국 경제에 대한, 아니 한국에 대한 진단을 부탁했다.

“한국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하려면 현재 어느 곳에 있는가 보다 어디에서부터 여기까지 어떻게 왔느냐를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의견이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한국은 지난 5~10년간 가장 큰 발전을 했습니다.
특히 금융 서비스는 매우 개선됐습니다. 하지만 노동환경, 또 그것으로 인한 노사관계 문제해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바토크의 주인공인 윌리엄 오벌린 보잉 사장도 노사관계를 얘기했다. 그렇게나 외국 사람 눈엔 한국의 노사분쟁이 심각한 이슈로 보이는 걸까?

“한국의 노동환경은 굉장히 경직돼 있습니다. 제 아내가 노동법 변호사이기 때문에 집에서 많은 토론을 하곤 하죠. 노사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한국에선 해고하는 이나 해고당하는 이나 ‘뒤끝’이 깨끗하지 못하죠.
미국의 경우, 상사가 부하직원을 해고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했다간 고소당할 수 있습니다. 상사였던 사람의 말 한마디가 다른 직장으로의 취업 여부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한국에선 해고당하는 직원에 대한 평가를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

심지어 사실을 부풀리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많더군요. 이것은 분명 올바르지 못한 관행입니다. 그러니 노조가 들고 일어나는 게 당연하죠. 그들의 눈엔 ‘부당한 해고’로 보일 테니까. 결국 노조 눈치보느라 직원을 한 명 해고하려 해도 많은 애로가 있는 겁니다.
한 직원을 ‘언론플레이’를 통해 완전히 고립시켜야만 해고할 수 있더군요. 하지만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평가가 뒷받침된다면 해고하는 이에게도 대의명분이 확실하겠죠?”

쿠퍼 사장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했다는 평을 받았다. 20년 넘게 일했던 간부급 인사들을 해고했지만 어떤 소동도 없었다. 쿠퍼 사장의 제언이다.

“한국은 굉장히 적응이 빠른 국가라고 생각해요. 90년대 말 금융위기 이후 빠른 기간 내에 많은 부분을 개선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빨리빨리’라는 말을 너무 중요시하는 거 같아요. ‘빨리빨리.’ 제가 좋아하기도 하지만 싫어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속도만 중요시되던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죠. 지난 50년 동안이 속도전이었다면 이젠 품질 싸움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상황은 달랐죠. 중국은 아직 개발 중이었고 일본의 경제환경 또한 역사상 최악이라 할 만했습니다.
두 국가들 틈에서 속도 있는 한국 경제가 많은 ‘재미’를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젠 다릅니다. 뛰어난 품질 없인 한국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월드컵에 나가는 것만이 대수가 아닌 거죠. 16강에 꼭 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창의적 교육시스템 도입돼야

여기까지 말한 쿠퍼 사장, 격분하는 양 탁자를 ‘탁탁’ 치며 잔에 남은 와인을 마저 넘긴다.

“변화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체계적인 변화가 사회 각층에서 일어나야겠죠. 교육 시스템의 변화가 가장 큰 밑거름이 돼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솔직히 한국은 창의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회사에서 하는 기본적인 업무들을 익히는 데는 어떤 고급지식도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쏟아낼 수 있는 ‘브레인’이 있어야겠죠. 그런 인재들로 채워진 회사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교육의 중점도 거기 두어야 합니다. 철학 공부를 하는 진짜 목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한 겁니다.
주입식 교육이 나쁘다고 말만 하지 말고 창의적 교육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하루빨리 도입돼야겠죠.”

“지난 50년 동안 한국은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이젠 다시 한번 변화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을 비판하고자 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희망이 있기에 하는 소리죠. 외국 CEO들끼리 모이면 항상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Never underestimate Korea(한국을 절대 평가절하하지 마라)’라고.”

마씨 와인이 이미 바닥이 난 상황. 일어나기 전 꼭 맛보게 해주고 싶은 디저트가 있단다. 샴페인 글라스 안의 노란 액체, 과연 이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술이었다. ‘아모레’라고 불리는 이 짙은 농도의 술은 더부룩한 배를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고 했다. 쿠퍼 사장이 한국말 한마디를 외쳤다. “해장술”.



취재 뒷 얘기들…“김제동, 윤도현이 내 친구야”
▶김제동·문대성·윤도현. 언뜻 보기엔 서로 상관없는 인물들 같지만, 모두 쿠퍼 사장과 절친한 사이다. 특히 김제동씨의 경우 프루덴셜 금융 행사 때 사회 봤던 걸 계기로 형님, 아우로 지내게 됐다. 그날 새벽 해가 뜰 때까지 둘이서 술을 마셨던 것이다.

요즘에도 한 달에 2~3차례는 꼭 만나 순두부 찌개 집에 같이 간다. 이들의 단골집은 씨네시티 극장 옆에 있는 옛 LA 순두부다. 가끔 김씨 팬들이 사인을 받으러 와 “옆에 있는 외국인 누구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고 한다.

그때마다 김씨는 ‘미국의 유명한 영화제작자’라고 소개한단다. 김씨의 소개로 만나 친구가 된 스타들도 많다.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 인기 탤런트 이다해, 김씨와 음악프로그램 진행을 함께했던 윤도현씨다. 특히 윤씨의 영어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고 했다. 이들의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우정 얘기가 부러웠다.

▶그래도 투자증권사의 사장인데 주식 투자에 대한 팁 한두 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쿠퍼 사장의 팁은 간단했다. “많은 다국적 기업에 다양하게 투자하라는 것”이다. 투자에 있어 한 우물 파는 것이 곧 실패를 자초하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쿠퍼 사장은 한국인보다 한국의 술 문화에 대한 지식이 훨씬 높은 수준이다. 미국과 달리 흥도 나고 ‘역동적’이어서 한국인과 술자리 갖는 걸 너무나 좋아한다고. 강남 10%, 강북 20% 등의 전문용어(?) 들까지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술도 한국 사람은 ‘속도전’이라며 불평도 했다. “술 역시 속도에서 품질로 가야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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