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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로 온 경제학자들] 돌아온 거물들 ‘입’에 시선 집중

[학계로 온 경제학자들] 돌아온 거물들 ‘입’에 시선 집중

▶9일 한국경제학회 주최로 서울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지난 8월 9일 한국경제학회 주최로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12차 국제학술대회’장. 평교수로 돌아간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주위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외부 선장론’ 후보로 거론되는 ‘뉴스 메이커’이자 관복을 벗고 학자로 돌아와 자유로워진 그의 ‘입’에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서울대 총장을 맡기 전 경제학자로서 각종 언론 기고문이나 세미나 등을 통해 정부 정책에 대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터다. 그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단 한마디를 원하는 기자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면서 그가 남긴 말은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였다. 하지만 앞서 한국경제학회장 자격으로 한 개회사에서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정부 정책이 획일적 사고와 성급한 이론 적용의 희생 제물이 된 사례를 자주 봤다”며 “정책은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야 하며 장기적인 이익을 지향하되 단기적인 부작용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중용의 자세’로 정부 정책을 펴야 한다”고 정부에 조언했다. 같은 날. 초대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도 ‘학자’ 자격으로 학술대회장을 찾았다. 그 역시 기자들의 독촉이 있은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정부가 한·미 FTA를 너무 조급하게 진행하고 있다.” 여전히 노 대통령의 경제특보기도 한 그는 최근 잇따라 “FTA 협상이 졸속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반 FTA 선봉론자로까지 비치고 있다. 때문에 청와대 내부에서 ‘해촉’이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는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골격을 짠 인물이다. 노무현 정부 분배론의 핵심에 항상 그가 있었고, 그로 인해 보수적 경제단체나 재계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가 노 대통령이 가장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정부 정책이 획일적 사고와 성급한 이론 적용의 희생 제물이 된 사례를 자주 봤다. 대표적인 것인 한·미 FTA다. 정책은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켜야 한다며 장기적인 이익을 지향하되 단기적인 부작용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중용의 자세’로 정부 정책을 펴야 한다.”

학술대회 첫날, 강연자로 나선 김중수 경희대 교수도 관심 인물이었다. 그는 2005년 8월까지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국민경제자문회의 의원이다. 김중수 교수는 FTA의 긍정적 측면에 무게가 실린 강연을 했지만, 정부의 FTA 협상 태도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FTA는 자유경쟁을 지향하는데, 교육은 평준화를 추구하고 문화는 국수주의적 보호를 전제로 하고 있어 국정 운영에 일관성이 없다”고 말했다. 또 “적절하게 준비하지 못한 자유화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며 “(한·미 FTA)협상을 책임지고 추진하고자 하는 정치 지도자 그룹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일침을 놨다. KDI가 어떤 곳인가? 역대 정부 최고의 두뇌집단이자 싱크탱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때론 정권과 관계없이) 정책의 이론적 틀을 제공해 왔다. 때문에 KDI 원장은 해당 정부의 정책 방향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지향점에 맞게 이론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특정 정책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김중수 교수가 비판적 입장을 취한 것은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책임지는 정치지도자그룹 있는가 국가의 ‘부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경제학계 거물들에게 관심이 모이고 있다. ‘장(長)’이나 ‘관(官)’을 벗고 상아탑으로 돌아온 그들은 훨씬 자유로운 입을 통해 한국 경제와 정부에 대해 ‘거총 자세’를 취할 태세다. 많은 사람은 이들 경제학자가 ‘관(官)’을 떠난 것이 아닌 본업으로 돌아온 것에 주목한다.

▶“FTA는 자유경쟁을 지향하는데, 교육은 평준화를 추구하고 문화는 국수주의적 보호를 전제로 하고 있어 국정 운영에 일관성이 없다. 적절하게 준비되지 못한 자유화정책이 단기적으로는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협상을 책임지고 추진하고자 하는 정치 지도자 그룹이 눈에 띄지 않는다.”

국립대 총장이던 정운찬 교수, 청와대에 갔다 온 이정우 교수, 정부 최고의 싱크탱크인 KDI 원장을 지낸 김중수 교수. 이뿐만 아니다. 화폐금융론의 선도 학자이자 나라 금융정책에 기여해 왔던 박영철 교수, 서울시립대로 돌아간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 얼마 전 노동부 장관에서 물러난 김대환 인하대 교수, 정부 혁신업무 추진 과정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사퇴해 고려대로 돌아간 윤성식 전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 참여정부 첫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내다 서울대로 복귀한 윤영관 교수 등도 재야로 돌아온 대표적인 경제학자들이다.

학파를 넘어 정부에 ‘쓴소리’ 이들은 이미 많은 경로를 통해 재야 특유의 비판적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상아탑 학자들이 국가적 문제, 실천적 문제에 발언하는 것은 서구에서는 전통에 가깝다. 더욱이 정부의 임명을 받아 나랏일을 해 본 학자들의 발언, 특히 비판 발언은 일반 교수들에 비해 훨씬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허술하거나 방향이 잘못된 정부 정책에 메스를 가하는 언론이 이들의 입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는 미시적 측면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측면에서도 환율을 단계적으로 조정하거나 금리를 인상해 통화량을 조금씩 줄여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다. 특히 수출을 늘리기 위해 환율을 억지로 잡아둔 것은 내수 경기 진작에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학계로 돌아간 이들이 일반적으로 학맥이나 경제 이념에 따라 분류되는 ‘특정 학파’와 상관없이 한목소리로 참여정부 정책 비판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조순 전 부총리의 제자이자 이른바 조순학파로 불리는 정운찬·김중수 교수. 이들은 최근 한국경제 최대의 현안인 한·미 FTA에 관해 ‘반대는 아니지만 졸속 추진’을 우려하는 발언을 했다. 이는 조순 전 총리가 5월 한국경제학회 1차 정책포럼에서 했던 발언과 같은 맥락이다. 조순 전 부총리는 강연에서 “한·미 FTA는 이 나라의 장래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당국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처리하려고 한다”면서 “정상적 상황이 아니라서 걱정이 앞선다”고 일갈했다. 그는 또 “정부가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추진해야지, IMF 위기 직후 압축 개혁을 하듯이 한·미 FTA를 압축 협상하면 IMF 직후의 후유증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서울대 총장 시절 절제된 표현이지만 할 말은 했던 정운찬 교수 역시 이와 유사한 생각을 공·사석을 통해 밝혀왔다.

▶“정치권이 섣부르게 노동계에 약속을 하거나 인기에 영합해 기대심리를 부추겨서도 안 된다. 정치권이 이렇게 나오니까 노동계는 툭하면 정치권으로 뛰어가지 않는가. FTA의 경우 반대론에 대한 직접적인 반격보다 소통의 폭을 넓히고 내용을 심화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정운찬 교수와 서울대 경제학과 66학번으로 ‘쌍육회’ 멤버인 김중수 교수 역시 9일 한국경제학회 학술대회에서 “평등과 보호주의, 그리고 개방과 경제가 양립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진 뒤 “국민합의를 하고, 책임지는 정치지도자 그룹이 과연 누구인가”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또한 “FTA는 비교 가능한 대안에 대비해야 한다”며 협상 실패에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전했다.

이정우·김대환·강철규 교수의 비판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의 호를 딴 소위 ‘학현학파’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학현학파 자체가 분배 중심의 경제론을 펴는 학파인 점을 감안하면 FTA를 적극 지지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다. 7월 6일 ‘한·미 FTA 협상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견해’에 서명한 많은 학자가 학현학파와 관련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서명한 이정우 교수를 비롯해 김대환 인하대 교수(전 노동부 장관), 강철규 서울시립대 교수(전 공정거래위원장)가 학현학파이자 현 정부에서 일하다 학계로 돌아온 대표적인 학자로 꼽힌다. 이정우·김대환·강철규 교수는 기본적으로 FTA에 반대를 표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FTA를 추진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한마디씩 했다. 이정우 교수가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부 비판에 나서는 반면, 김대환·강철규 교수는 조용한 가운데 차분히 정부에 조언을 던지는 모습이다. 이정우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미 협상 과정에서 독소조항을 빼야 할 뿐 아니라 FTA를 체결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로 남겨둬야 한다”고까지 했다.

▶“정부가 FTA를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 체제, 체질, 제도, 정책 이런 것들이 전부 미국화될 우려가 많다. 한·미 협상 과정에서 독소 조항을 빼야 할 뿐 아니라FTA를 체결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로 남겨둬야 한다.”

2월 노동계 요구로 노동부 장관직에서 퇴임한 김대환 인하대 교수는 최근 중앙일보 시평을 통해 “한·미 FTA에 대한 여론의 반전도 정부와 국민 사이의 소통 문제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며 “여전히 여론은 한·미 FTA를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지금까지와 같은 추진 방식에 반대하는 것으로 읽힌다”고 밝혔다. 최대한 정부와 관련된 발언을 자제해 왔던 그는 “FTA 반대 여론이 세를 얻어가고 있는 상황일수록 반대론(자)에 대한 직접적인 반격보다 소통의 폭을 넓히고 내용을 심화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장관 퇴임 후에는 정치권을 향해 “정치권이 섣부르게 노동계에 약속을 하거나 인기에 영합해 기대심리를 부추겨서도 안 된다”며 “정치권이 이렇게 나오니까 노동계는 툭하면 정치권으로 뛰어가지 않는가”라고 지적했다. 서울시립대 교수로 돌아간 강철규 교수는 웬만하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가 매년 3∼4%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데, ‘위기’라고 하면 외국 사람들이 웃는다”며 여전히 정부 친화적인 생각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정부가 거시적인 흐름을 보지 못하고 미시적으로 수요를 억제하려고 하니 먹히지 않는 것”이라며 부동산 정책을 꼬집기도 했다.

▶“부동산 성장이 침체한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면 물가도 못 잡고 부동산 시장에 미치는 효과도 크지 않을 것이다. 부동산 자산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통화 신용정책과 부동산과의 관련성을 잘 연구할 필요가 있다. 좀 더 현실적인 거시경제 정책 틀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는 “정부는 미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거시적인 측면에서도 환율을 단계적으로 조정하거나 금리를 인상해 통화량을 조금씩 줄여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다. 특히 수출을 늘리기 위해 환율을 억지로 잡아둔 것은 내수업체의 희생을 발판으로 수출업체들을 살려준 것으로 내수경기 진작에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장 강철규’가 ‘학자 강철규’로 돌아와 정부 정책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을 한 것이다.

“정책 집행하는 방법에 문제 있다” 특정 학파에 속하지 않지만 오랜 세월 정부 일을 돕다가 지난해 서울대 초빙교수로 위촉돼 학계로 돌아왔던 박영철 교수는 9일 학국경제학회 강연에서 한국은행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부동산 성장이 침체한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면 물가도 못 잡고 부동산 시장에 미치는 효과도 크지 않을 것”이라면서 “부동산 자산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통화 신용정책과 부동산과의 관련성을 잘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 한국은행은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콜금리를 0.25% 인상했다. 박 교수는 “부동산 자산과 금리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논문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DJ정부 출범과 함께 정책 라인에서 일제히 물러난 ‘성장론’ 중심의 서강학파 교수들도 ‘정부가 반시장경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가 경제정책을 만들어 집행할 때는 경제학자들이 이론적으로 받쳐줘야 탄력을 받고 신뢰를 얻는다. 그러나 현 정부는 함께 일했던 학자들로부터도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는 형편이다. 그만큼 현 정부의 정책 유지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용히만 있어줘도’도 정부에는 다행인 모습이다. 참여정부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재야로 나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정책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방향에는 대체로 공감하지만 추진 방법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미 FTA가 대표적인 예다. 참여정부가 애초 설정한 방향대로 가지 않고, 갈팡질팡하거나 가는 도중 정책이 변질된 데 대한 따끔한 질책이라고 할 수 있다. 돌아온 거물들의 입은 앞으로도 더욱 매서워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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