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색 관광객’들의 대장정
‘홍색 관광객’들의 대장정
마오쩌둥 30주기 맞아 혁명 사적지 찾는 중국인들 줄잇지만 그의 정치 유산은 아직도 금기시 중국 장시(江西)성의 산악 휴양지 징강산(井岡山)에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1934~36년의 전설적인 장정[長征·중국 공산군인 홍군(紅軍)의 역사적 대행군]이 시작되기 전 마오쩌둥(毛澤東)의 본거지였던 곳이다. 어떤 이들은 기념관에 장례식 때 쓰는 흰 화환을 놓고, 또 어떤 이들은 마오가 쓰던 딱딱한 나무침대 위에 담배를 던진다. 골초였던 위대한 조타수 마오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요즘 징강산에는 마오의 사망 30주기(9월 9일)를 맞아 엄숙한 당 간부들 대신 돈을 물 쓰듯 하는 중국의 여피족이 모여든다. 이들 이른바 ‘홍색(紅色) 관광객’들은 공산당의 전시 기지가 있던 산시(陝西)성 옌안(延安)부터 1935년 마오가 당의 지도권을 획득한 구이저우(貴州)성 쭌이(遵義)까지 중국 전역의 공산혁명 사적지로 모여든다. 그들은 붉은 깃발을 흔들고 고구마죽과 들풀 등 당시 공산당원들이 먹던 음식을 먹는다. 징강산에서는 광둥(廣東)성에 있는 한 무역회사의 공산당 간사가 20여 명의 사원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모두 ‘승리’라고 외치라고 부추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마오쩌둥 캐릭터의 마케팅은 인정 많은 아저씨처럼 푸근한 모습으로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 자명종 시계가 홍콩의 길거리 시장에 등장한 이후 수년 동안 지속돼 왔다. 그러나 아직 그의 정치적 유산은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81년 공산당은 30년에 걸친 마오의 집권기에 대한 평가를 모호한 통계에 의존해 ‘잘한 일 70%, 잘못한 일 30%’라고 내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 기간에 행해진 잔학행위에 관한 심각한 토론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평범한 중국 국민 중에는 49년 홍군이 국민당군에 승리한 직후부터 마오의 정책이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즉 훌륭한 마오의 시대는 그의 성인기의 절반도 채 안 된다는 말이다. “마오가 49년에 사망했다면 전 세계가 그를 영웅으로 기억했을 것”이라고 마오의 번역가였으며 중국 본토에서 35년 동안 산 중국 전문가 시드니 리텐버그(85)는 말했다. “하지만 마오는 권력 때문에 심하게 부패했다. 너무 오래 살았다.” 다음달이면 종결 70주년을 맞는 장정이 요즘 중국에서 왜 그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이다. 결국 30년대는 훌륭한 마오의 시대였다. 그리고 장정에 얽힌 이야기는 “공산당의 수많은 신화 중에서 아직도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 남아 있다”고 장정에 관한 유명한 책의 공동저자 브라이튼 앤드루 매케웬은 말했다. 홍군은 적의 매복 기습과 혹독한 날씨에 맞서 싸우면서 험한 산길과 늪을 행군해 1만2500km를 후퇴하는 동안 10만 명 중 4000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요즘 새롭게 자신감을 찾은 중국인들이 조국에 자긍심을 가질 방도를 모색하면서 장정을 중국의 위대한 승리로, 그리고 개인적 삶의 투쟁에 관한 은유로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모든 사람의 개인적인 장정을 역사적인 장정에 비교할 수 있다”고 베이징의 한 장정 관련 작품 전문 화랑의 큐레이터 루지에는 말했다. 이런 시류에 발맞춰 중국 정부는 마오와는 거의 상관없는 현대적 특색을 갖춘 10여 곳의 ‘홍색 관광지’를 개발했다. 징강산 관광지는 아름다운 산의 경치와 대나무 숲을 볼거리로 내세운다. “우리 관광사업은 홍색(공산혁명 사적지)과 녹색(자연)을 겸비했다”고 지방정부 관리 장후아는 말했다. 장정의 전설적인 전투지인 스촨(四川)성의 루딩차오(盧定橋)에서는 관광객들이 돈을 내고 홍군 군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고, 물살이 거센 강에서 거대한 보트를 타고 급류타기를 즐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그 시기의 역사가 너무 자세하게 파헤쳐질까 우려한다. 교육당국은 최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마오에 관한 언급을 한 군데만(예절에 관한 장에서) 남겨놓고 모두 빼버렸다. 사회주의(마오가 수백만 명의 인명을 대가로 추구한 유토피아의 꿈)에 관한 내용은 단 하나의 짧은 장으로 축소시켰다. 징강산에서 마오의 라이터와 조각품을 파는 한 상인은 당국이 최근 자신이 팔던 DVD의 판매를 금지했다고 말했다. 마오가 주도했던 피로 물든 문화혁명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민감한 정치적 내용 때문에 더 이상 못 판다”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난 9월 8일 밤에는 ‘태양은 가장 붉고, 마오 주석이 가장 친하다’는 제목의 콘서트가 열려 마오의 서거를 기렸다. 그러나 막상 사망 당일인 9월 9일에는 공식 행사가 거의 없었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잔혹했던 마오의 자취를 직시하지 못한다는 점은 그들이 자신들의 잔인성 또한 직시하지 못함을 말해준다. 일례로 89년 친민주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천안문사건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아직도 금기시된다. ‘빙점(氷點 ·공산주의청년단 기관지인 중국청년보의 주간부록)’의 전 주필 리다퉁(李大同)은 “ 덩샤오핑(鄧小平)과 그 이후의 지도자들이 마오의 잔혹한 행위를 부정한다면, 중국의 정치체제와 일당통치 또한 부정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중국 정권은 가능한 한 마오와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美공화당 첫 성소수자 장관 탄생?…트럼프 2기 재무 베센트는 누구
2자본시장연구원 신임 원장에 김세완 이화여대 교수 내정
3“‘元’ 하나 잘못 보고”…中 여성, ‘1박 5만원’ 제주도 숙소에 1100만원 냈다
4'40세' 솔비, 결정사서 들은 말 충격 "2세 생각은…"
5"나 말고 딴 남자를"…前 여친 갈비뼈 부러뜨려
6다채로운 신작 출시로 반등 노리는 카카오게임즈
7"강제로 입맞춤" 신인 걸그룹 멤버에 대표가 성추행
8‘찬 바람 불면 배당주’라던데…배당수익률 가장 높을 기업은
9수험생도 학부모도 고생한 수능…마음 트고 다독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