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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 스토리] “30년 전 아버지와 약속 지켰다”

[이코노 스토리] “30년 전 아버지와 약속 지켰다”

▶애경이 인수한 분당 소재 삼성플라자. 원내는 채형석 부회장.

애경그룹 채형석 부회장이 재계의 초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올해 4월에 제주항공 개막으로 주목받은 데 이어 최근 삼성의 백화점까지 거뜬히 인수했기 때문이다. 그는 왜 백화점을 인수한 것일까? “처음에는 ‘애경백화점이 팔린다’는 루머가 돌았다. 막판에 삼성물산이 삼성플라자를 애경에 판다는 얘기가 다시 돌았지만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다.” 최근 삼성물산 유통사업인 분당 삼성플라자를 5000억원 내외에 인수키로 해 유통업계에서 큰 화제가 된 애경그룹 측 얘기다. 그의 말대로 마이너 유통업체인 애경이 삼성 계열사를 인수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애경은 롯데·신세계 같은 유통 메이저들이 ‘유통업체 명단’에 끼워주지도 않았을 정도의 마이너 유통업체가 아니었던가? 아무튼 이런 놀라움의 단초가 된 시발점은 무려 3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70년 7월 11일 채몽인 애경 창업주는 당시 열 살이었던 장남 형석에게 ‘내일 아버지랑 같이 등산가자’라는 말을 남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 채씨는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철부지였던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그는 어린 마음에도 그때 단 한 가지 생각만을 가슴속 깊이 간직했다고 한다. ‘내가 어머니와 회사를 지켜야 한다’라고. 이 다짐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어머니인 장영신 회장이 노령이라 사실상 회장 결재를 대신하고 있지만, 채 부회장은 여전히 스스로를 모친의 ‘영원한 비서실장’이라고 칭한다. 지금도 장 회장의 미국 대학 동기들이 한국에 오면 이들의 동선을 수행하고 접대한다. 장 회장의 아들 사랑도 극진하다. 최근 다윗 격인 애경이 골리앗 삼성의 유통사업을 접수한 ‘사건’을 놓고 언론들이 대서특필하자 장 회장은 홍보실에서 스크랩한 신문 지면을 모두 가져가 읽고서는 돌려주지 않을 정도로 아들을 자랑스러워 한다. 남편을 일찍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뒤 장남에게 쏟은 애정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어머니의 ‘영원한 비서실장’ 장 회장은 맏아들인 채 부회장을 아버지보다 훌륭한 경영인으로 키우기 위해 매서운 경영수업을 시켰다. 채 부회장이 미국 보스턴대학 MBA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장 회장은 MBA출신 아들을 애경산업 생산부 사원으로 발령냈다. 5개월의 공장 근무를 마치자 이번에는 영업부로 발령내 8개월간 경험을 쌓게 했다. 채 부회장은 이 8개월간의 영업사원 시절이 가장 행복하고 보람된 시간이었다고 한다. 이때 전국 방방곡곡 대리점을 돌아다니며 느낀 재미와 보람 때문인지, 지금도 재래시장 구경하는 것이 가장 재미있다고 말한다. 이후 1년6개월을 마케팅부에서 보내는 등 업무 경험을 온몸으로 익히도록 했다. 채 부회장은 20대에 법인 이름만 살아있는 애경유지 대표이사로 등기가 돼 있었지만, 장 회장의 꼼꼼한 경영수업 과정에 따라 애경산업의 각 사업부를 돌며 업무를 익혔다. 서울 구로역에 있던 과거 애경유지 공장이 지방으로 이전하자, 장 회장은 큰아들에게 공장 터 1만여 평을 어떻게 활용한 것인지 연구해보라는 숙제를 줬다. 전문연구소에 리서치를 의뢰하고 국내외 실정을 1년간 연구 검토한 끝에 나온 결론이 유통업이었다. 조사용역을 해준 회사마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니 백화점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도 이 의견을 따랐는데, 이게 그가 유통과 인연을 맺은 계기다. 백화점도 생필품 사업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니 애경의 전체 흐름과 일맥상통하는 측면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74년 공장을 이전한 이후 창고로 쓰던 땅이 20년 만에 변신을 꾀하게 됐다. 채 부회장은 지난 1990년 애경백화점 건설을 추진해 1993년 백화점이 개점되기까지 산파 역할을 했다.

백화점= 父子간 만남의 장 에피소드 하나. 흔히 ‘여장부’로 불리는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은 경영 일선에 나선 이후 울어본 기억조차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장 회장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 어쩔 줄 몰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애경백화점 개점식에서였다. 큰아들이 인사말에서 “이 백화점을 돌아가신 아버님에게 바친다”고 했을 때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감회가 일었다는 후문이다. 애경백화점이 문을 연 자리는 창업자인 남편이 타계하는 순간까지 생활용품을 만들던 공장이었으며, 애경그룹의 창업 터전이었다. 70년대까지 ‘트리오’ 등의 세제를 생산하다가 공장을 대전으로 옮긴 이래 창고로 써온 터였다. ‘아버지가 물려준 땅이니 잘 연구해서 활용하라’고 큰아들에게 맡긴 지 3년 만에 탄생한 애경백화점이었기에 장 회장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애경백화점은 곧 ‘부자(父子)간 만남의 장’이었던 것이다. 채 부회장은 동생인 채동석 사장과 함께 아버지의 유업이자 본인의 첫 사업인 애경백화점이 탄생하기까지 3년간 세심하게 준비를 해나갔다. 한눈팔지 않고 안전 위주로 사업을 해왔던 장 회장의 경영스타일을 잘 아는지라 채 부회장은 ‘좋은 백화점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당시 채 부회장이 가진 백화점에 대한 철학은 ‘좋은 물건만 갖다 놓는다고 쇼핑문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백화점이란 쇼핑이 전부가 아니라 고객이 만족을 느끼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화점 입구에 위치한 햇빛광장은 7층 천장을 유리로 처리해 자연광이 들도록 했다. 다른 백화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애경백화점만의 자랑거리라는 설명이다. 그가 벌인 사업이 승승장구한 것만은 아니다. 지난 2003년 초에 불거진 센트럴시티 사건 때 전 지방공제회 손모 이사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그는 검찰 조사를 받는 등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후계자 입지가 흔들린다는 얘기도 흘러나왔었을 정도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02년 1월 1일자로 애경백화점 대표이사에서 애경그룹 부회장이 된 그는 그룹 전면에서 경영을 이끌고 있다. 최근 그룹 경영에서도 그는 나름대로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독점적 체제에서 아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제주항공을 나름대로 연착륙시켰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평소 외국에 다니면서 ‘왜 한국에는 저가 항공이 성공할 수 없을까’라고 고민하던 차에 마침 제주도가 제3항공을 제안하면서 사업 진척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선친을 비롯해 대대로 제주에 둥지를 틀었던 채 부회장 집안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애경백화점은 구로점과 수원점에 이어 2009년 하반기에 평택점을 오픈한다. 평택점 오픈 이후 2010년까지 유통부문 전체 매출 1조원을 달성하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종합외식업 진출(쇼젠·르 꼬르동 블루·북경 등), B2E(e-commerce)사업 참여, 인수합병을 통한 확점, 브랜드 파워 강화 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올 1월부터 사내벤처 시행을 통해 직원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지원하는 제도도 시작했다. 물론 이 같은 대변신의 중심에 채 부회장이 있어 그를 ‘그룹 내 제1의 신사업팀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구로점은 서남부 상권의 고객밀착형 백화점으로 차별화하고 있다. 수원 상권 내 1위를 차지하며 조기 정착에 성공한 수원점은 1위 유지와 강화에 주력할 방침이다. 수원애경역사㈜는 상장조건이 충족되는 대로 상장할 계획이다. 제3호 애경백화점이자 제2호 애경 민자역사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평택점은 수원점의 조기정착 성공사례를 바탕으로 오픈 작업(2009년 9월 예정)에 주력하고 있다. 평택역사는 사업부지 약 1만4000평, 지하 3층 지상 9층의 건축물로 연면적 2만4000평으로 계획돼 있으며 역무시설과 애경백화점, 전문쇼핑몰로 구성된다. 면세점 사업은 AK면세점 인천공항점에 이어 지난 2005년 12월 김포공항점까지 확대했다. 레저와 부동산개발 부문의 경우 아직 역사는 짧으나 국내 최초의 선진 경영기법을 갖춘 메이저 시행사로 키우려고 애쓰고 있다. 지난 1999년 9월 설립된 ARD홀딩스㈜는 임대사업과 다양한 신규사업, 지분투자 등과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고 있으며, 2004년 7월 설립된 AK네트워크는 전문적인 부동산 개발기업이다. ARD홀딩스가 그룹의 신규사업을 추진하고, AK네트워크가 부동산 개발을 추진하는 셈이다. 수원 민자역사 개발경험을 바탕으로 평택 민자역사 개발을 추진 중이며, 구로동 애경게이트웨이프라자 건설 경험을 바탕으로 신사업에도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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