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수의 BIZ 시네마] 살생부를 인간이 관리한다면?
[임준수의 BIZ 시네마] 살생부를 인간이 관리한다면?
| ▶
데스노트 ■ 원제/원작 : デスノ-ト(일본) ■ 감독 : 가네코 슈스케 ■ 출연 : 후지와라 다쓰야(법관지망생), 마쓰야마 겐이치(명탐정) ■ 장르 : 미스터리, 스릴러, 판타지 ■ 상영시간 : 126분(11월 2일 개봉) ■ 제작/배급 : 워너브라더스사, 슈에이샤/UIP 코리아 | |
살생부(殺生簿)는 국내 정치권에서 유행하는 말인데 일본에서도 이와 비슷한 ‘데스노트’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영어 Death Note의 일어식 표기인 ‘데스노트(デスノ-ト)’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끈 오바타 다케시의 만화에서 유래된 것. 인기만화를 기초로 만든 동명의 일본 영화는 국내에서도 적잖은 흥행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데스노트’는 사람 이름이 적힌 한국의 살생부와는 달리 빈 공책에 불과하다. 소유권과 기록권은 당연히 저승사자가 가져야 하건만, 위험천만하게도 개인 누구나 그것이 가능하다. 소유자가 이 공책에 이름만 올리면 해당자는 곧장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데, 단 한 가지 제약 조건은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 기록해야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괴력의 공책이 시정잡배의 손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정의감이 투철한 한 사법시험 준비생이 임자가 된다. 그가 이 공책을 얻게 된 것은 온갖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이 증거불충분이다 뭐다 하여 교묘하게 법망을 벗어나는 꼬락서니에 분통이 터져 공부하던 육법전서를 쓰레기통에 버린 결과였다. 이렇게 되니 풋내기 법학도는 무임승차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일순간에 사형 확정 판결을 내리는 최고 법원의 판사가 되고 동시에 사형 집행관이 되는 저승사자로 벼락출세를 하게 된다. 무혐의로 석방되는 죄질 나쁜 범인들은 TV화면에 비춰지기 무섭게 몸을 비틀며 숨이 끊어지니 ‘제발 나 좀 처벌해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범죄자들이 속출할 판이다. 속사정을 모르는 일반 시청자들은 하늘의 심판이라고 고소해 하고…. 영화를 본 관객 중엔 한국에도 ‘데스노트’ 한 권쯤 있으면 사회정의 실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법하다. 물론 기록권자의 엄정한 관리를 전제로 말이다. 군사정권 시절엔 정의구현사제단이란 단체가 있었는데, 그런 기관이 관리를 하며 법이 정한 시민단체와 사회단체에 일정기간씩 순차적으로 기록권을 위임한다고 가정해 보자. 사법부나 종교단체가 펄쩍 뛰겠지만 상상만 해도 희한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먼저 데스노트가 경제단체에 넘어갔다고 치자. 노동자 단체는 보나마나 임금 체불을 일삼으며 사리를 채우는 악덕 기업주 이름을 적을 것이다. 전경련 같은 기업인단체는 누구를 적을까? 체면상 파업 주동자는 피할 것이고 시도 때도 없이 손을 벌리는 정치인이나 뇌물을 탐하는 공무원을 1차 리스트에 올릴 것이다. 까다로운 규제로 기업 활동을 어렵게 하는 정책 입안자도 무사하지 못할 것. 환경단체는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는 청소업자나 야생동물을 못살게 구는 밀렵꾼의 이름을 찾기 바쁠 것이고, 소비자단체는 바가지를 일삼는 악덕상인을 공적 1호로 삼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린이단체는 누구를 가장 미워할까. 유괴범, 난폭 운전자, 폭력 교사, 왕따 주범 등을 놓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은 ‘가장 몹쓸 것은 이놈’이라며 데스노트를 불태울 것을 결의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벌을 주고 싶은 마음은 천진한 어린이의 심성과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다. 데스노트를 갖고 범법자의 단죄를 일삼는 영화 주인공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과 악의 경계를 혼동하며 자신도 모르게 범죄자가 되고 만다. 자신을 추적하는 수사관 이름을 살생부에 올림으로써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른 것. 결국 단죄용으로 쓰이기 시작한 데스노트는 범죄용으로 전락한다. 영화의 결말을 떠나 데스노트는 아무래도 저승사자나 염라대왕이 관리하는 것이 낫겠다. 그것이 만일 인간의 손으로 넘어가는 날에는 법 무용론이 득세해 3권 분리 체계부터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판·검사를 꿈꾸는 수많은 법학도와 가석방을 끌어내는 변호사를 위해서도 영화 속의 가상물로 끝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미꾸라지 범죄자들을 구경하는 것도 세상사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