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둘째 형은 포커 치며 사람 골라”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둘째 형은 포커 치며 사람 골라”
|
32년간 청렴한 군 생활 아버님한테 벌은 도맡아서 받으셨습니까? “핫핫. 뒷간(화장실)의 ‘퍼내기 작업’은 노상 내가 맡아서 했지요. 장작을 패게 하는 벌도 받았고, 밭갈이도 시키셨고. 그러나 그건 꼭 벌이 아니라 평소에도 교육적인 면으로 자주 시키셨어요. 어떨 때는 두 시간 세 시간씩 꿇어앉아 먹을 갈아야 했던 적도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것이 교육이었던 것 같아. 아, 매는 우중이 하고 (보통 때는 김 회장이라고 불렀다) 엇비슷하게 많이 맞았을 걸? 핫핫핫.” 이러한 어린 시절을 보낸 김 장군은 6·25가 터지자 지금은 없어진 생도 1기로 입대해 1981년 준장으로 전역을 하기까지 32년간을 복무했다. 그런 때문에 김 장군에 대한 일화는 긴 세월 탓도 있겠지만 군 생활에서 많이 남아 있다. 소령 때 그는 군인이면서도 미국 LA 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근로 장학생으로, 말하자면 접시 닦고 노동하고 하우스 보이 등을 하면서 공부하는 일꾼 유학생인 셈이었다. 그때 같은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이 김재명 전 서울지하철공사 사장. 김 장군은 이 시절에 터득한 것이 성실이었다. 그는 성실의 중요함을 철저히 터득했다. 사람이 지혜가 부족해 일에 실패하는 경우는 적으며, 늘 부족한 것은 성실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때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이 성실하면 돈도 생기고 지(智)도 생기고, 사람도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의 미국 생활에는 늘 친구들이 주변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아마 친구가 많이 붙어 있기로는 막내 동생 성중(成中) 회장과 막상막하가 아닐까 모르겠다. 성실하다 보니 친구가 따라붙는 것이다. 어쨌건 그는 3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군 생활을 계속 했고, 6·25 전쟁 중에는 그 유명한 강원도 인제 북방 854고지 전투에서 두 번이나 부상을 당하면서도 악을 쓰고 버티던 악바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훈장에 연연하는 스케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858고지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면 무공훈장을 받게 돼 있었다. 그렇지만 두 번이나 부상을 당했고, 오늘날에도 이름이 남아 있을 만큼 치열했던 격전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그는 받은 훈장이 없었다.
|
“동생한테 술값 많이 얻었지” 아무튼 사회로 나온 김 장군은 대창기업 회장에 취임한 뒤부터 소위 말하는 ‘권력층’ 근처에는 의식적으로 가기를 꺼렸다. 장군으로 예편했으면 가까운 전우가 오죽 많았겠는가? 그럼에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김 장군이 군 시절 인맥을 내세우며 비즈니스를 위해 나타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게 처신하는 것은 옛 전우나 권력층 인사들에게 정신적인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배려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동생 김우중 회장의 입장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모르겠다. 자칫 처신을 잘못했다가 결과적으로 동생한테 누를 끼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 장군이 별을 달 때도 동생의 영향력은 결코 활용한 적이 없다고 했다. 외부의 영향력을 활용한다고 해서 장군 심사에 도움이 되던 시절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 장군의 경우는 오히려 모시고 있던 정 승화(전 참모총장) 장군이 적극 추천했다는 것이다. “내가 대령에서 장군으로 진급해야 하는 시점인데 그쯤 되면 여기저기서 온갖 얘기가 다 나와요. 심지어 누구는 어떤 ‘빽’이 있으니까 별을 단다느니, 누구는 어떤 집안이라서 이미 결정이 났을 거라느니 하고 말이오. 근데 나는 진급 심사가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일부러 주말이 되면 동료하고 술 마시러 다녔어요. 왜 술 마시러 다녔느냐, 진급에 관심 없고 제대할 사람이니까 괜히 동생 들먹거리지 말고 유언비어 퍼뜨리지 말라 이거지요. 그래서 동생한테 용돈은 많이 얻었지. 술값 내느라고. 핫핫핫.” 정승화 장군을 모시고 있었습니까? “그랬지요. 대령 때 그분이 군단장 하셨으니까. 근데 그분 참 존경스러운 점이 많았어요. 정승화 장군께서 공개적으로 그러시더라고. 진급 심사가 있으면 굉장히 예민해지고 말 한마디라도 상당히 조심하는 게 대부분이거든? 그런데 장군은 농사짓는 집안에서도 나와야 하고, 재벌 가문에서도 나와야 하고, 공무원 집안에서도 나와야지 안 된다는 집안이 있어서는 군이 절대 발전할 수 없다, 이러시는데 내가 감명을 받았어요. 맞는 말 아니요? 자격이 된다면 집안이 무슨 상관이오. 그러고 나서 나는 아예 기대도 안 하고 제대해서 뭘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진급이 되었더구먼. 안 된 사람들한테 어찌나 미안한지 말이오. 그래서 나는 진급 술을 산 게 아니라 위로주를 샀어요.” 정 장군이 회장님 승진에 영향을 줬겠지만 그래도 김우중 회장이 형님을 생각하지 않을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동생도 노력을 했다고 그래요? (들은 얘기가 없다고 하자)그런 건 워낙 말이 없는 동생이니까 모르지. 또, 동생이야 나도 모르는 사람을 원체 많이 아니까, 아들 군대 보내놓은 부모의 심정처럼 형이 군에 있다는 정도로 얘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요. 그건 대우 회장이니까, 더 이상 깊숙하게 얘기하면 도리어 역효과요. 장군 심사는 엄정해요. 분명한 건 동생한테 술값을 많이 얻어 썼지. 핫핫핫. 정승화 장군이 점수를 많이 줬을 겁니다.” 에피소드지만 김 장군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었다. 김 장군의 정승화 장군과 인연은 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예편하고 대창기업을 경영하고 있을 때였다. 10·26과 신군부의 반란으로 총장에서 물러난 정승화 장군이 자식 문제를 김 회장(김관중)과 상의했다. 그것도 편지를 통해서였다. “어버이 심정은 다 같은 거 아니오. 정 총장이 그런 처지가 됐으니 자식도 충격을 받았을 것 아니겠어요. 정 장군께서도 괴로우셨겠지. 자식 잘되길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길게 설명할 것 없고, 정 총장님 편지 받고 내가 5층 회장실(김우중)로 내려갔어요(대창기업이 대우빌딩 16층에 있었다). 동생한테 무조건 그 친구(정 총장 아들)를 대우에 입사시켜 해외 지사로 내보내라고 했지요. 동생이 웃기만 하고 쳐다보면서 말을 안 해요. 그러더니 형님, 한 가지만 물어보자고 그래요. 도대체 누군데 형님이 직접 내려와서 그러시냐고.” 보통 때는 회장님이 안 내려가시는 모양이지요 ? “평소에는 내가 볼 일이 있어도 동생이 꼭 올라오고 그랬지요. 김우중 회장이 정말 깍듯이 하는 동생입니다. 나도 많은 기업인을 보게 되고 얘기도 듣고 하지만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참 바르고 예의가 깊어요. 전경련 회장을 할 때도 젊은 나이에 했던 편이지만 1세대 창업주들을 한번도 소홀히 대한 적이 없어요. 하여간 도대체 누군데 대우에 입사를 시키고 해외 근무를 시키라고 하느냐면서 굉장히 의아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시침 딱 떼고 첫사랑 했던 여자의 아들이라고 했지 뭐. 핫핫핫. 정 장군님이 부탁을 할 만한 사람이라고 믿고 나한테 부탁을 했는데 아무리 세상이 변하고, 회사는 또 원칙이 있고 룰이 있다지만 그걸 못 들어주면 회사 룰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러고 인간사가 어찌 되겠소. 나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야. 되게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요. 내가? 핫핫핫.”
“ 막걸리로 빚은 청자 같은 사람 ” 회장님 부탁대로 입사시켜 해외근무를 하게 됐습니까? “제일 좋다는 곳으로 보내서 두 번이나 옮겨줬는데, 잘하고 있겠지 뭐. 허허.” 김관중 회장은 대우의 울타리로 들어서면 역시 철저한 기업가로 변한다. 몸에 밴 습관 탓에 현장점검을 누구보다 철저히 하는 스타일이지만 회의 주재는 대우 형제 중에서 가장 짧고 적게 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내가 주재할 때는 전부 중역들이 참석하는 거 아니오. 중역들은 나보다 현장 경험이 많고, 어떻게 해야 이익 창출이 더 되는지를 잘 알고 있는데 길게 붙잡아 놓고 회의할 게 뭐 있겠어요. 다만 늘 이 얘기는 하지요. 1억원 남기려고 평생 3000만원 모아 내 집 마련한 사람들 가슴에 못 박는 공사는 절대 하지 말라고. 철저하게 시공하라고.” 대우 5형제 중에 사실상 맏형처럼 처신했던 김관중 회장은 믿기지 않겠지만 집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형을 김우중 회장이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김 회장이 방배동으로 이사하면서 신문로에 있던 자신의 집을 형에게 준 것이다. 물론 김관중 회장도 훗날 성북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동생이 준 신문로 집에 살면서 여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랬던 김 회장이 대우 사태로 동생이 어려움을 겪자 제일 먼저 자진해 대창기업을 정리해 동생을 지원하면서 손을 털었다. 가족은 김추자 여사와의 사이에서 선경·선창·선운(딸)·선준 등 3남1녀. 아무튼 김관중 회장의 인물평은 ‘막걸리로 빚은 청자’라고 하면 근사치가 될까? <계속>계속>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hy, ‘NK7714 프로바이오틱스 콜레스테롤 선 에센스’ 출시
2bhc치킨, 상조 서비스 도입...동반성장 위한 가맹점 지원 확대
3골든블랑, 여름 시즌 한정판 ‘오픈에어 패키지 2024’ 출시
4파리올림픽 누비는 카스...배하준 오비맥주 사장 “맥주 그 이상의 의미”
5그랜드벤처스, 탄소회계 솔루션 '카본사우루스'에 프리 A 라운드 투자
6볼보코리아, 어린이 안전 등하굣길 지원…교통안전 용품 5000개 기증
7케이엠텍, 전고체ㆍ건식전극 제조설비 전문업체로 우뚝
8 작년 마약사범 연간 2만명 첫 돌파…10대도 급증
9이창용 총재, ‘BIS 연차총회’ 참석 위해 스위스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