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나친 간섭에 시장이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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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의 ‘공’자도 못 내게 했다” 2003년 10월 정부는 10·29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다. 그해 봄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울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와 충남의 행정복합도시 주변의 땅값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정부는 수도권과 충청권 투기과열지구의 분양권 전매를 금지하고(5·23 대책), 재건축 아파트의 중소형 의무건설 비율과 1가구 1주택 양도세 비과세 요건 등을 강화(9·5 대책)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종합판이 10·29 대책이었으며,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하고 투기지역의 주택담보 인정비율을 40%로 끌어내렸다. 판교 신도시도 앞당기기로 했다. 당시 김진표 경제부총리는 “현행 헌법 아래서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포함시켰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10·29 대책 수립에 관여했던 관변 이코노미스트들은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다. 이들은 “두 달 동안 대책을 준비하면서 청와대는 아파트 공급 확대의 ‘공’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고 증언한다. 당시 이 대책을 주도한 청와대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은 재건축 규제나 종합부동산세, 주택담보대출비율 하향 조정 등 수요 관리 대책만 잔뜩 주문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들은 “대통령의 관심이 온통 지방 균형 발전과 행정복합도시에 쏠려 그 눈치를 보느라 수도권에 아파트 짓는 것 자체를 꺼린 게 아닐까”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 실장은 아예 “공급 확대의 집값 정책은 필패하게 마련”이라고 못 박았다. 대통령의 정치적 소신을 떠받치기 위한 참모들의 과잉 충성이 잘못된 정책 노선으로 굳어버린 것이다. 한쪽에선 정부의 집값 안정 의지를 의심하게 하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한국은행이 2003년 5월과 7월 두 차례 콜금리 목표치를 0.25%씩 인하한 것이다. 콜금리는 3.75%로 떨어져 사상 처음으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 초저금리 시대로 접어들었다. 당시 박승 한은 총재도 금리를 내리면서 부동산 시장을 걱정한 것 같다. 그해 5월 박 총재는 “부동산 버블은 반드시 꺼질 것이며 아마 상당한 피해자가 나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박 총재가 꺼낸 부동산 거품 논쟁은 갑자기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부동산이 경제문제가 아니라 교육문제인 것처럼 둔갑하기 시작했다. 박 총재는 “강남의 집값 상승은 일류 사설학원이 밀집한 때문”이라며 대학입시에서 내신성적 비중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규제 만능주의에 빠진 함정 청와대와 정부는 10·29 대책 이후 부동산 가격이 일시적인 안정세를 보이자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시장의 복수가 시작됐다. 초저금리와 막대한 토지보상비에 따른 과잉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으로 밀려들었다. 그래서 2005년 여름에 나온 것이 8·31 대책이다. 제2차 종합판이다. 이때부터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이 부동산 정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헌법만큼 고치기 힘든 부동산 제도를 내놓겠다”는 말이 나왔다. 이에 대해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사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종합부동산세 같은 부동산 세금을 걷어 지방 균형개발 예산으로 쓰겠다는 아이디어지. 그렇게 되면 아무리 정권이 바뀌더라도 유지되지 않겠느냐. 종부세 등에 대해 긴가민가 하는 시장에 확실하게 쐐기를 박고 정부의 부동산 안정 의지를 과시하기 위한 포석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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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주무른 ‘정책’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시장에 제대로 된 복합처방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2006년부터다. 숱한 부동산 대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민심이 들끓자 뒤늦게 정책 조합에 눈을 돌린 것이다. 2005년 10월부터 3년 만에 콜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1년간 콜금리는 5차례 인상돼 4.5%까지 올랐다. 2006년 3·30 대책으로 총부채상환비율(DTI)이 도입되고 11·15 대책에는 주택담보 인정비율(LTV) 규제가 훨씬 강화됐다. 박승 총재가 물러나고 신임 이성태 한은 총재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금리를 올리고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 한은은 지난 연말 은행의 지준율 인상이라는 카드를 16년 만에 빼들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이 느닷없이 검단·파주 신도시 계획을 흘리는 바람에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이정우·김병준 같은 강성 코드 인물이 청와대에서 물러나고 건교부가 부동산 대책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택정책은 ‘수요 억제’에서 ‘공급 확대’로 급선회했다. 건교부는 “검단·파주로도 안 되면 앞으로 신도시를 무제한 세우겠다”고 공언했다. 드디어 세금과 금융정책, 그리고 공급 확대 등 3박자의 정책 조합이 톱니를 맞추며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재경부·건교부가 제 목소리를 내면서 부동산 정책은 보다 현실적이고 시장 친화적인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아파트값 폭등은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겨 놓은 뒤였다. 2003년부터 제대로 복합처방을 내렸다면 부동산이 지금과 같은 재앙적 수준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행정학 교수 출신이, 철거민 운동을 하던 운동권 출신이 느닷없이 청와대에 앉아 부동산 정책을 주무르기 시작하면 어떤 재앙이 초래되는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부동산 거품은 발생 때도 문제지만, 거품 붕괴 때가 더 위험하다. 일본도 1980년대 후반 리크루트 사건, 사가와규빈 사건, 가네마루 신(金丸信) 스캔들이 연이어 터졌다. 거품이 부풀어오르는 데 누구도 눈 돌릴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부터 지나친 금리인상으로 거품이 급격히 파열할 때도 속수무책이었다. 한국도 지금 국가 리더십의 빈혈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노 정권은 지지도가 바닥이고 한나라당마저 부동산 유탄을 피하느라 몸을 사리고 있다. 올해는 대선까지 맞물린 예민한 시기다. 대선 과정에서 사회 갈등을 헤집어놓거나 다시 한번 포퓰리즘이 판친다면 큰일이다. 지난 4년간의 실패를 반복할 경우 더 이상 버텨낼 경제 체력도 소진한 상태다. ‘한국판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대재앙이 언제 우리를 덮칠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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