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공단 만들어 美대학 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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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진 주임조리는… ·1959년 충남 논산생 ·경원대 국문과ㆍ한국방송통신대 교육학과 졸, 미 캘리포니아국제대 심리교육학과 수료 ·대원종합학원ㆍ상아탑입시학원 원장 ·1993년 12월 미국 이민 ·1994~2006년 미 샌프란시스코 한미라디오 아나운서, 미 샌프란시스코 한미TV 앵커, ‘일요시사’ 발행인 ·1999년 미 샌프란시스코 한인체육회장 ·2001~2006년 미 샌프란시스코 한인상공회의소 부회장ㆍ회장 ·2003~2006년 미 샌프란시스코 한국무역박람회 조직위원장 겸 대회장 ·현 중국 옌지경제개발구관리위원회 주임조리(부시장급), 중국 옌지IT밸리유치관리위원회장, 중국 옌볜대진투자기획자문유한공사 대표, 중국 옌지시 해외홍보대사, 중국 투먼시 해외통상대사 | |
“저도 조선족입니다. 신조선족이죠. ”재미 한국교포 출신으로 옌지(延吉)시에 부시장급으로 영입된 유대진 중국 옌지경제개발구관리위원회 주임조리는 조선족을 자처했다. “이렇게 말하면 여기 동포들이 시큰둥해 합니다. 그럼 ‘당신들은 언제부터 조선족이었느냐? 나는 조선족이 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죠. 한 핏줄에 한마음이면 같은 조선족 아닙니까?” 입국 비자를 받을 필요없는 명예시민증을 옌지시에서 받은 그는 옌지의 공무원이 되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그 바람에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미국 영주권자로서 옌지시 공무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다. 유 주임은 2005년 7월 2일 백두산 천지와 처음 마주 섰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오히려 실망스러웠다. 지프를 타고 산을 오르는데 울창하지 않고, 기껏 들꽃이 하늘거렸다. 차에서 내려 정상까지 100여m를 걸었다. 구름 한 점 없었다. 순간 파란 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천지였다. 주변의 봉우리들이 물에 비쳤다.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가슴이 벅차다 못해 미어지는데…, 나도 모르게 울먹이고 말았죠.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라서였는지, 여기가 기회의 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서서히 기운이 차 올랐습니다. ” 그로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운영하던 작은 신문사를 정리하고 홈쇼핑 사업도 접었을 때였다. “미국 등 선진국은 빈틈이 없지만 여기는 돈 벌 구멍이 있습니다. 지금은 경제적 안정도 찾았고 여기 경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어 보람도 큽니다.” 유 주임은 1959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5형제 중 셋째라 중학교를 마친 후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공부가 하고 싶었던 그는 1년 후 집을 뛰쳐나와 연산상고에 진학했다. 1회 입학생에 웅변 장학생이었다. 중학교 때 학교 대표로 웅변대회에 나가 상을 휩쓴 것이 발판이 됐다. 고2 때는 6·25 기념 반공웅변대회에서 통일부 장관상을 받았다. 그해 말 그는 아예 웅변학원을 인수했다. 빚더미에 앉은 원장이 강사였던 그에게 학원을 넘긴 것.
고교 때 이미 웅변학원장 3학년 2학기 취업차 상경한 그는 웅변학원 강사로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한 중년 여성이 그를 찾아왔다. “웅변학원을 차리려고 하는데 원장을 맡길 유능한 강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대원웅변학원 대리원장으로 일하면서 경원공전 경영학과 야간부에 진학했다. 졸업 후엔 경원대 야간부에 편입학해 국문학을 전공했다. 그새 학원은 종합학원으로 바뀌었고, 투자자의 딸이 학원에 나와 피아노를 가르쳤다. 대학 3학년 시절 한양여대 응용미술과 출신의 재원인 그녀에게 그는 프러포즈를 했다. 1남5녀의 막내딸인 그녀와의 결혼에 언니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예비 장모였던 투자자만이 그의 편이었다. “돈과 학벌이 전부가 아니다. 있으면야 좋지만 그보다 사람 됨됨이를 봐야지. 평생 속 썩이지 않을 사람”이라고 딸을 설득한 장모는 그에게 금반지 값으로 20만원을 꿔주며 두 사람의 결혼을 후원했다.
| ▶(위) 2003년 겨울 미 샌프란시스코 한인상공회의소 회장 취임사를 하고 있는 유대진 주임조리. (아래) 유대진 주임조리의 가족. 뒷줄 왼쪽부터 시곗바늘 방향으로 유 주임조리, 옌지에서 햄버거 가게를 하는 동갑내기 부인 오민자씨, 딸 햇살, 아들 태원. | |
83년 결혼에 골인한 그는 장모에게서 독립했다. 사채 등을 얻어 서울 독산동에 대원웅변미술학원을 차렸다. 부부가 각각 웅변과 미술을 가르치고, 밤이면 책상을 붙여 침상으로 썼다. 그때부터 지역을 옮겨다니면서 학원을 했다. 학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때마다 권리금을 챙겼다. 딸 햇살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엔 수유동에 유치원을 냈다. 유치원 정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그는 방송통신대 유아교육과에 입학했다. 늦깎이로 들어갔지만 학생회장을 했다. 학생회장 자격으로 대만 등 아시아권을 돌면서 견문도 넓혔다. 상계동으로 옮기면서 이번엔 입시학원을 차렸다. 수강생이 많을 때는 600명에 달했다. 고교 진학이 불투명한 아이들에게 전 과목을 지도해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내는 특수과외도 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내달리던 그는 1993년 결혼 10주년을 맞아 부인과 미국 여행을 떠났다. 미국은 교육 환경이 좋았다. 아이들은 기를 펴고 살았다. 한국 땅에서 앞으로 고생스럽게 공부할 초등학교 4학년 딸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미국 이민을 결심했다. 2년 만에 취업 비자를 받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기념품 가게를 거쳐 수퍼마켓에서 일했다. 그러나 평생 안 해본 육체노동은 그로서는 힘겨웠다. 마침 현지 한인방송인 한미라디오에서 아나운서 겸 기자를 뽑았다. 2~3일 발음 교정 훈련을 받은 후 곧바로 뉴스에 투입됐다. “어찌나 떨리던지 일주일 동안 매일 우황청심환을 서너 알씩 먹었습니다. 그랬는 데도 ‘왜 그렇게 떠느냐’는 둥 ‘발음이 안 좋다’는 둥 항의전화가 왔습니다.” 기자로서 취재를 나갈 때면 영어 잘하는 동료를 따라나섰다. 영어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캘리포니아국제대 2년 과정에 입학했다. 아나운서 일에 웬만큼 이력이 붙자 역시 한인방송인 한미TV에서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앵커 겸 기자였다. “본래 꿈이 영화배우나 탤런트였습니다. KBS·MBC 탤런트 시험도 봤는데 면접에서 떨어졌죠. 반도패션의 양복 모델도 했습니다. ”
어릴 때 꿈은 배우아니면 탤런트 한인단체 활동도 열심히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진입한 지 이틀 만에 가입한 샌프란시스코한인볼링협회에서는 이듬해 회장을 맡았다. 샌프란시스코한인체육회 사무총장을 거쳐 99년엔 한 표 차로 한인체육회장에 당선됐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살 때였다. 30대 젊은 회장에 대해 반발이 심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언론에 매력을 느낀 그는 방송국을 그만두고 ‘일요시사’라는 주간 신문을 창간했다. ‘시사포커스’란 주간신문도 발행했다. 신문사 운영에 돈이 많이 들어 대영무역이란 회사도 차렸다. 한국에서 건강식품 등을 수입해 팔고 브라질·아르헨티나 등지에서 곡물도 수입했다. 홈쇼핑에도 손을 댔다. 번 돈을 신문사에 털어넣었지만 운영난은 계속됐다. 결국 신문사를 넘기고 무역업에 치중하는 한편 현지 한인상공회의소 일에 몰두했다. 이사·부회장을 거쳐 2003년 겨울 그는 미 샌프란시스코한인상공회의소 회장에 무투표 당선됐다. 사실상 추대였다. 이듬해 역점 사업으로 그는 한국의 중소기업들을 유치해 한국무역박람회를 열었다. 720만 달러의 수출 계약이 체결됐다. 이사 전원이 반대한 이 행사의 적자는 그가 개인적으로 메웠다. 2005년 계약액은 1280만 달러에 달했다. 20여 만 달러의 흑자도 냈다. 지난해엔 계약액을 지급 기준으로 산정해 800만 달러로 줄었다. 거품을 뺀 것이다. 2004년 초겨울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옌지시의 조철학 시장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다. 이후 샌프란시스코한인상공회의소는 옌지시 경제개발구와 자매결연을 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옌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그 후 한 달에 두 번씩 옌지를 찾았다. 같은 옌볜자치주의 투먼(圖們)시는 그를 해외통상대사로 임명했다. 2005년 그는 옌지시의 세계한인상공인대회 유치를 성사시켰다. 그 후 옌지시는 미국시민권자인 그에게 공무원으로 일하자고 제의했다. 부시장급인 8급의 주임조리로 지린성에서 인준까지 받은 후였다. 연임해 임기가 올 12월까지인 샌프란시스코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을 사임하고 그는 옌지로 근거지를 옮겼다.
26층짜리 IT빌딩 연내 완공 초청 공무원인 그의 월급은 2650위안(한화 31만8000원), 판공비가 따로 나온다. 옌지의 사무직 임금은 1500~1600위안 수준. 옌지시 측은 그에게 연금까지 지급하겠다는 입장이다. 초청 공무원으로서는 지린성에서 두 번째 케이스지만 부시장급 고위직은 그가 처음이다. 그는 올 8월에 있을 옌지국제투자무역박람회의 공동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 행사의 준비를 맡으면서 그는 조 시장에게 옌지 IT밸리의 조성을 제안했다. “옌지는 물류 면에서 불리해 제조업 기지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관광에 매달릴 수도 없는 형편이죠.” 중국 정부는 바이산시에 백두산공항을 건설 중이다. 이 공항은 이르면 올해 말 준공된다. 공항이 개장되면 비행기를 이용하는 백두산 관광객은 더 이상 옌지를 경유할 필요가 없다. 옌지시 정부는 경제개발구에 있는 애득자동차매매센터 2~3층을 임차해 그에게 관리권을 넘겼다. 그는 이 두 층을 IT밸리(IT산업원)로 명명하고 한국 기업을 유치했다. 네이버 옌지센터가 이곳에 입주해 있다. 여기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의 IT전용공단엔 26층 규모의 IT대하가 완공을 앞두고 있다. 연내 준공 예정인 이 빌딩 말고도 7개 동의 高신기술센터가 들어선다. 첫 동은 6월이면 완공된다. “테헤란밸리보다 규모가 크죠. 이 공단에 외국 대학을 유치하기 위해 미국 대학들과 접촉 중입니다. 스탠퍼드대·북버지니아대·남가주대 등이 그 대상이죠.” 교육 이민에 동기를 제공한 그의 딸은 올해 스물넷. 유아교육을 전공하고 한국에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다. 이민 1.5세로서 갈등은 겪었겠지만 즐겁게 공부했고 티없이 컸으니 그의 이민은 성공한 셈이다. 네 살 아래인 아들은 미국에서 경제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노후는 한국에서 보낼 생각이다. 그는 “의정부에 집 지을 돈만 있으면 된다”며 밝게 웃었다.
한국기업 중국 진출 교두보 노리는 옌지 |
값싼 고급 인력에 세금 혜택까지 | ▶공사 중인 IT대하와 조감도. 옌지시는 이 건물 뒤편에 조성 중인 IT 전용공단에 미국 대학을 유치할 계획이다. | | “말이 통하는 고급 인력을 저비용에 고용할 수 있습니다. ” 동포(조선족) 출신인 김성철 옌지경제개발구관리위원회 부주임은 옌지의 이점을 이렇게 뭉뚱그렸다. 백두산 북쪽 지린성 동부에 자리 잡은 옌지는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주도다. 인구는 42만 명. 옌볜자치주의 조선족 비율은 38.1%, 옌지시는 58.1%가 조선족이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이중언어로 영어나 일어를 배운다. 물론 한국어와 중국어는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한국의 지상파 TV 네 채널과 위성방송을 일상적으로 실시간 시청해 말씨도 한국식 한국어에 동화돼 가고 있다. 유대진 옌지경제개발구관리위 주임조리는 콜센터 요원 양성원을 IT밸리 안에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옌지 사람들은 한국 TV를 틀어 놓고 살뿐더러 한 집에 한 명꼴로 가족이 한국에 가 있습니다. 2~3개월 교육을 받으면 한국 기업의 콜센터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라요.” 옌지의 주요 산업은 공업ㆍ무역ㆍ관광 등이다. 물류는 나진항을 통해 속초ㆍ부산항과 연결되고 다롄(大連)항을 거쳐 인천에 닿는다. 개발구 안 IT밸리에 입주하면 2년 동안 임차료가 면제된다. 이후 3년간은 절반으로 감면된다. 전기요금을 제외한 거의 모든 비용을 포괄하는 관리비는 ㎡당 10위안. 임차료의 3분의 1 수준이다. 임금은 청소ㆍ보안 등을 맡고 있는 인력이 월 800~1200위안을 받는다. 최저임금은 월 460위안, 베이징의 최저임금은 640위안, 상하이는 750위안이다. IT분야의 인건비는 베이징의 3분의 2, 일반 공장은 그 절반 수준이다. 토지는 투자 규모에 따라 우대 가격이나 무상으로 제공된다. 시에 내는 세금은 5년간 환급된다. 환급 혜택 기간이 1~3년인 다른 도시들에 비해 유리하다. 컴퓨터 프린터용 토너 카트리지, 반도체 장비용 핵심 부품인 실리콘 캐소드 등을 생산하는 기림세미텍의 이정기 대표는 옌볜의 장점으로 한국어를 쓰고 문화가 같은 것을 꼽기 전에 습도 등 기후 조건이 좋은 점, 공항이 가깝고 주변에 대학이 여럿이라 인재가 많은 것 등을 지적했다. 인재의 산실은 단연 연변과학기술대학이다. 이 대학 경영정보관리학과 김한수 교수는 연변과기대 출신 취업률은 120%라고 말했다. “중국 대학의 평균 취업률은 40% 수준입니다. 우리 대학 졸업생에 대해서는 20%의 초과 수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120%죠.” 이 대학의 김진경 총장은 이 학교 출신들이 “동북아 시대의 리더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중언어로 일본어를 배우고 들어온 동포 학생들이 영어를 필수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옌지경제개발구가 한국 기업을 겨냥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중국 진출의 교두보’다. 유 주임은 “옌볜이 발전하면 중국 전역의 조선족들이 가족과 재산이 있는 이 땅으로 U턴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을 내비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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