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덫 알츠하이머
황혼의 덫 알츠하이머
치매 걸린 부모 보살피며 고통받는 미국 베이비붐 세대 한 남성이 한 여성 옆에 앉아 있다. 그녀는 그 남성의 이름이 프랭크(85)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 남성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은 수석 치어리더였고, 그는 동네에서 가장 잘생긴 청년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결혼한 지 거의 63년 된 부부이며 두 딸 미셸 웹(55)과 멜린다 프로자(46)를 키운 사실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지 않을까 두려워 두 딸과 남편이 계속 자신을 지켜본다는 사실도 모른다. 자기 이름도 모른다. 그녀의 이름은 헬렌 어스킨(81)이다. 그녀에게 찾아온 알츠하이머(퇴행성 치매)는 끔찍한 병이다. 댈러스의 한 은행에서 일하는 큰딸 미셸 웹은 “가족 중 알츠하이머 환자가 있는 사람만이 우리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다른 질병은 대부분 병이 진행되면 치료 과정이 따르고 병이 나으리란 희망이 있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는 끝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치매의 가장 보편적 형태인 알츠하이머 환자와 가족은 그처럼 슬픈 현실을 매일 겪는다.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생)의 부모 중 많은 사람이 80세를 넘긴 지금 수백만 명의 베이비부머들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다. 모든 종류의 치매가 80세부터 급증하기 때문이다. 현재 알츠하이머에 걸린 미국인은 500만 명을 넘으며 그들 중 70%가 집에서 수백만 명의 딸과 아들, 그리고 배우자의 보살핌을 받는다. 간병인의 연령은 베이비붐 세대보다 많을 때도, 적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인구통계학적으로 부담은 대개 베이비붐 세대의 몫이다. 그들은 부모의 불가피한 쇠퇴를 지켜보며 당연히 자신의 불안한 미래도 내다본다. 2050년께면 알츠하이머를 포함한 치매 환자가 1600만 명으로 급증할지 모른다. 자신도 얼마 안 가 치매에 걸릴지 모른다는 어두운 전망 탓에 치매 환자를 돌보던 사람들도 치매 연구 예산 확보를 외치는 운동가로 변신했다. “치매는 보건 분야에서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고 해리 존스 미 알츠하이머 협회장은 말했다. 알츠하이머 환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지난 4월 사망했다. 존스는 주변 사람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엄청나다며 “정서·육체·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준다”고 말했다. 진단에서 사망까지 10년 넘게 걸리기도 하는 알츠하이머는 당혹해 하는 가족들에게 매일 새로운 골칫거리를 안긴다. 알츠하이머는 치명적이지만 병의 진행 과정은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병세는 갑작스럽게 악화되기도 한다. 예컨대 어머니가 하루는 딸을 알아보아도 이튿날엔 못 알아보기도 한다. 몇 년간은 신체가 비교적 정상적인 기능을 하다가 갑자기 증상이 악화하기도 한다. 뉴욕대학교에서 알츠하이머 환자 지원 프로그램을 이끄는 매리 미틀먼은 불확실성과 함께 살다 보니 “다른 질병을 앓는 환자를 보살필 때보다 스트레스가 훨씬 심하다”고 말했다. 기억상실 정도가 미미한 발병 초기에 간병인이 배운 기술도 행동이나 신체적 문제가 훨씬 더 악화되고 나면 “거의 쓸모가 없다”고 미틀먼은 말했다. 대소변을 조절하지 못하는 실금(失禁)이나 간혹 고함소리를 지르는 경우를 자주 겪다 보면 부모님을 전문 요양원에 절대 보내지 않겠다던 가족들의 생각도 바뀌게 된다. 지원단체가 도움을 주긴 하지만 치매 환자를 보살피는 사람 중 다수는 시간적 여유나 여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부모를 보살피는 일과 직장에서 요구되는 일을 적절히 안배해야 한다. 게다가 자녀도 돌봐야 한다. 그들 중 다수는 잦은 불안감·좌절감·분노뿐 아니라 심각한 우울증도 호소한다고 스탠퍼드대 심리학자 돌로리스 갤리거-톰슨은 말했다. 치매 환자 간병인을 연구 중인 그녀는 “그들은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자주 갖게 된다”며 “이는 훌륭한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치매 환자를 보살피는 데 따르는 육체적 부담뿐 아니라 정서적인 문제는 건강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치매 환자를 보살피는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무시하기 일쑤여서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고 면역 기능도 약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심장병과 암 발병 위험을 높인다. 부모를 도우려는 마음과 여건이 아무리 좋아도 가족의 고생은 끝이 없다. 팀 키드웰(56)은 1년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어머니 그레이스(78)와 백혈병에 걸린 아버지 존(80)을 보살핀다. 부모님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아들 집 근처의 한 아파트에서 산다. 그러나 부모님을 간병하는 데 워낙 많은 시간이 필요해 다니던 광고회사의 정규직을 내팽개치고 프리랜서로 뛴다. 그는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말했다. 병든 부모를 수발할 때 생기는 부담은 종종 가족들 간의 해묵은 갈등관계를 악화시킨다. 부모와 전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들이나 딸은 자신의 의무를 버겁게 느낄 공산이 크다. 노스웨스턴대학교 알츠하이머병 센터의 교수이자 사회복지사인 다비 모하트는 “한 번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은 누군가를 보살피다 보면 훨씬 더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고 말했다. 형제자매 간의 관계도 삐걱대기 십상이다. 특히 아들이나 딸 중 한 명이 부모 가까이서 살고 다른 자식은 먼 곳에서 살 때는 더 심해진다. “먼 곳에서 사는 형제자매는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형제자매의 생각과 달리 부모님이 더 잘 지내리라 믿는다”고 심리학자인 엘리자베스 에절리는 말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 위치한 알츠하이머협회의 프로그램 최고 책임자다. 종종 아들이나 딸 중 한 명이 가장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되지만 이는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04년 핑키 홀로웨이(56)는 시카고에 있는 직장을 버리고 부모가 사는 애틀랜타로 내려왔다. 어머니 에시(78)를 곁에서 보살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2003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뒤 노인 전문 요양원에서 살았다. 홀로웨이는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하루 24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면서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처음엔 자신이 형제자매로부터 충분한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그러곤 얼마 후 ‘나 자신은 바꿔도 다른 사람은 못 바꾼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형제자매는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어머님을 보살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로 했다. 내가 어떻게 그들의 생각을 바꾸겠는가.” 이 같은 자각도 도움이 됐다고 그녀는 말했다. “이젠 다른 형제자매도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어머니를 보살피리라 본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한 가족도 많다. 알츠하이머가 악화되면 환자 돌보는 일이 훨씬 더 어려워진다. 알츠하이머 등 치매라고 하면 대개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영원한 망각 속에 빠지는 모습을 연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워낙 큰 변화가 일어나기 일쑤여서 마치 외계인이 몸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실제로 환자는 억압된 감정을 빈번히 행동에 옮긴다. 자신의 한계에 좌절감을 느끼는 탓이다. 그러다 보니 간병인(가까이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 가장 피해를 많이 본다. 경제적 문제는 가뜩이나 스트레스 많은 상황을 악화시킨다. 거의 모든 가족은 결국 돈 문제를 겪게 된다. 형제자매는 부모의 재산 활용법을 둘러싸고 자주 언쟁을 벌인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은행계좌 잔액이 얼마 없을 때는 자녀들이 부담해야 하지만 비용을 부담할 의사와 능력이 모두 같지는 않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쪽은 부모만이 아니다. 베이비붐 세대는 더러 배우자를 보살피기도 한다. 달린 조던(49)은 6년 전 남편 찰스(57)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면서 생활이 망가졌다. 찰스처럼 조기에 발병하는 사례는 노년에 나타나는 노인성 치매만큼 흔하지는 않다. 그러나 알츠하이머협회는 65세 이하 인구 중 약 50만 명이 조기 발병 사례라고 추정한다. 조던 부부처럼 이들 환자 다수는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어린 자녀를 뒀다. 달린 조던은 딸 린지(13)가 처음엔 아버지에게 도움을 주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약 3년 전 딸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고함을 지르자 기겁했다. 딸은 아버지가 자신을 때리려 한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딸이 자신에게 옷을 입히고 샤워를 시키려 하자 당황한 마음에 그렇게 행동했으리라 조던은 추측한다. 이제 린지는 아버지에게 스낵을 갖다주는 일 등 보다 단순한 일만 한다. 찰스 조던의 행동은 계속 악화됐다고 아내는 말했다. 처음엔 호주머니에 배터리를 무리하게 쑤셔 넣는 강박증을 보였다. 그 후 갈수록 공격적이 됐다. 몇 주 전에는 자신을 밴에 태워 성인 보호시설로 데려다 주려던 여성 운전사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깜짝 놀란 운전사는 비명을 지르며 조던의 집으로 뛰어들어 왔다. 찰스는 결국 밴에 탑승하기로 했지만 이젠 다른 환자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달린은 너무 겁이 나 남편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린지와 함께 잤다. 그녀는 “나는 아직도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이 내가 결혼하고 그 모든 희망과 꿈을 함께 나누던 그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안다. 일단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면 대처가 보다 쉬워진다. 현실을 인정하면 매일 겪는 일들이 보다 쉬워진다. 그러나 간병인들도 정치적 운동을 통해 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붙였다. 기업인 존 오셔(60)는 신경외과의사인 아버지 대니얼(87)이 2003년 알츠하이머로 사망한 뒤 이 병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아버지는 다섯 살짜리 어린애 같았다. 그분은 상태가 지나치게 악화되셨다”고 올셔는 말했다. 올셔는 알츠하이머협회와 함께 일하며 주요 기부자들을 찾아나섰다. 연구자금 모금은 경제적으로 적절한 행동이라고 그는 말했다. “알츠하이머는 가족들이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질병이다. 오랫동안 고생하고, 많은 사람이 연루된다. 앞으로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2030년께면 알츠하이머는 노인장애자의료보험에서 4000억 달러를 차지할 뿐 아니라 저소득층 의료보험의 전체 예산과 거의 맞먹는 비용을 발생시킨다. 사람들의 인식을 높이려고 알츠하이머협회는 이 질병을 몸소 경험한 유명인사들을 끌어들인다. 미국의 인기 시트콤 ‘프레이저’의 유명 배우 데이비드 하이드 피어스(48)는 동참을 결정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알츠하이머에 걸렸기 때문이다. 가족은 아버지에게 알츠하이머 진단이 내려지자 할아버지가 겪은 운명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피어스가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보았을 당시 할아버지의 팔은 휠체어 양쪽에 묶여 있었다. 피어스의 아버지는 알츠하이머가 그 정도로 악화되기 전 폐렴으로 사망했고 가족은 감사를 느꼈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알츠하이머로 지루한 고통을 겪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돼 운이 좋았다”고 피어스는 말했다. 다른 운동가들은 국회의원들을 겨냥한다. 일리노이주 스털링에 사는 줄리 베자(48)는 아버지 오토 널(75)을 도와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69)를 간호한다. 스털링시 경제개발공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그녀는 자폐증에 걸린 아이를 포함해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2명을 돌봐야 하지만 매일 어머니를 찾는다. 베자는 “알츠하이머는 정말 슬픈 병”이라고 말했다. “예전엔 모르는 점이 있으면 모두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젠 멍하게 앉아 있기만 하는 노인이 됐다.” 베자는 언젠가 자신이 어머니와 같은 병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녀는 “의원들과 접촉하기로 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의회에서 2개 법안이 통과되도록 지지를 호소한다. ‘2007년 알츠하이머 퇴치 법안’과 ‘2007년 알츠하이머 가족 지원 법안’이다. 첫 번째 법안은 미 국립보건원의 알츠하이머 연구 예산을 지금의 6억4270만 달러에서 13억 달러로 두 배 늘리도록 했고, 두 번째 법안은 간병인에게 감세혜택을 주도록 명시했다. 줄리는 “이 법안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집에서 알츠하이머 환자를 돌보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재택 건강 보조원의 임금은 시간당 20달러를 넘으며 휠체어나 조정 가능한 침대 등도 환자 가족이 따로 부담해야 한다. 운동가들의 최종 목표는 알츠하이머의 원인을 밝혀내 이를 예방하는 일이다. 알츠하이머가 최초로 규명된 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과학자들은 아직도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에 두 가지 특징이 생기는 원인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뉴런(신경세포) 사이에 끈적끈적한 갈색 침적물이 생기고, 뇌세포 안에는 흡사 작은 밧줄 묶음처럼 엉킨 상태가 초래된다. 현재의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증상을 일시적으로 다소 완화할 뿐이다. 연구자들은 침적물의 주요 성분인 A-베타의 형성을 막거나 뇌에서 이를 제거하는 신약을 개발 중이다. 만일 성공하면 알츠하이머의 진행을 늦추게 될지 모른다(최근 워싱턴에서 열린 알츠하이머협회 회의에선 이 같은 실험적 화합물에 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과학자들은 조기 치료를 목표로 조기 진단법을 찾는다. 하지만 현재로선 심장에 좋은 음식을 먹고, 몸과 머리를 활발히 움직이는 게 최고의 예방책이다. 그러나 비만율의 급증은 불길한 징조다. “심장 건강에 안 좋은 일을 하면 할수록 심장병과 뇌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고 필라델피아 토머스 제퍼슨대학 파버 신경과학 연구소 소장인 새뮤얼 갠디 박사는 말했다. 간병인들이 선택하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고전적인 방법이다. 텍사스주 플라노에서 85세의 노모를 돌보는 매시 모제히(52)는 “인내심을 가지라”고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 말리헤 시르반냐는 이란에서 살던 5년여 전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미국 시민권자인 모제히는 좀 더 나은 치료를 받도록 어머니를 미국에 데려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영주권은 얻었지만 2년 만에 시민권을 얻진 못한다. “어머니가 미국 시민이 되긴 어려울 듯하다”고 모제히는 말했다. 시르반냐에겐 기저귀가 필요하며 혼자서는 식사도 못한다. 헛것이 자주 보여 약도 복용한다. 어떨 땐 너무 불안해 쉴새없이 왔다갔다 하기도 한다. 그녀는 대개 딸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모제히는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렸을 땐 부모님이 우리를 돌보셨다. 이제 우리 차례다.” 그런 종류의 사랑은 단지 기억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With Anne Under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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