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가 웬 수염?
존 트래볼타 뮤지컬 영화 ‘헤어스프레이’에서 여장 출연… 여성을 웃음거리 만든다는 논란도 에드나 턴블래드는 반짝이 장식이 달린 핑크색 드레스와 특대 사이즈 브라를 아주 좋아한다. 비밀이 하나 더 있다. 에드나는 남자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어스프레이’에서 에드나 역은 언제나 남자 배우가 맡았다. 1988년 존 워터스가 감독한 영화에서는 여장 남자 디바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는 거친 목소리의 하비 피어스타인, 최근 미국에서 개봉한 뮤지컬 영화에서는 존 트래볼타가 이 역을 맡았다. 피터팬 역을 십중팔구 여배우가 맡듯 ‘헤어스프레이’의 에드나 역은 늘 짧게 깎은 수염을 두꺼운 분장 밑에 숨긴 남자 배우 차지다. 헤어스타일부터 음악까지 뭐든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이 ‘헤어스프레이’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몸집의 에드나를 남자 배우가 연기하게 함으로써 영화의 재미를 더하고, 관객의 입장에서는 전형적인 어머니 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속아주는 묘미가 있다. 하지만 남자 배우가 극중 여자 역을 맡은 경우는 에드나 말고도 많다. 타일러 페리는 뚱뚱하고 거만한 할머니 마데아 역으로 배우의 입지를 다졌고, 에디 머피와 마틴 로렌스 역시 최근 영화 ‘노빗’과 ‘빅 마마 하우스’에서 뚱보 분장을 하고 가발을 쓴 채 여자 역을 맡았다. 또 수십 년 동안 배우 생활을 해온 더스틴 호프먼과 로빈 윌리엄스도 관객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캐릭터는 여장 남자 투시와 미세스 다웃파이어다. ‘스크린드 아웃: 에디슨부터 스톤월까지 할리우드의 게이 역할(Screened Out)’이라는 책을 쓴 영화 역사학자 리처드 배리어스는 이렇게 말했다. “메릴린 먼로 주연의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에서 잭 레몬이 조 E 브라운과 탱고를 추는 장면은 배꼽을 잡을 만큼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장면의 의미를 두고 논란도 있었다. 남성다움과 여성스러움의 차이를 불분명하게 만든다는 논란이었다.” 하지만 요즘 영화계에서는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관습이 많다. 일례로 요즘은 백인 배우들이 시커먼 분장을 하고 흑인 역을 맡겠다고 선뜻 나서지 못한다. 앤절리나 졸리는 ‘마이티 하트’에서 마리안 펄 역을 하느라 피부를 약간 어둡게 분장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또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미키 루니처럼 아시아계가 아닌 배우가 눈을 가늘게 보이도록 분장하고 동양인 흉내를 낸답시고 어색한 억양을 사용했다가는 욕먹기 십상이다. 또 배우들이 웃음을 자아내려고 특수 분장을 하고 뚱보 역할을 하면 비만 권리 운동가들이 항의한다. 기네스 펠트로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뚱보 분장을 했을 때처럼 말이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남자 배우가 여자 역을 맡는 일(특히 그 역을 맡은 남자 배우가 동성애자가 아닐 경우)은 여성혐오증(이런 영화에서 ‘여성’들이 얼마나 꼴사납고 못생기게 그려지는지 주목하라)이나 동성애혐오증(이 여장 남자들은 눈을 깜박거리거나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는 등 틀에 박힌 남자 동성애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으로 비쳐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남자 배우가 여자 역을 맡는 일이 여전히 용인되는 이유는 뭘까? 남자 배우가 여자 역을 하는 전통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 일본의 가부키(歌舞妓)에서도 그런 전통을 찾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연극의 모든 등장인물을 남자가 연기했다. 남자 배우가 연기하는 여주인공 로잘린드가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남자로 변장하는 ‘뜻대로 하세요’ 같은 작품에서는 성의 혼동이 극에 달한다. 여장 남자들은 1892년 연극 ‘찰리의 아주머니’(1915년 처음 영화로 제작됐다)가 나온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코미디의 소재가 돼왔다. 만화 주인공 벅스 버니는 자신의 뒤를 쫓는 엘머 퍼드를 속이려고(그리고 가짜로 유혹하려고) 아름다운 여자로 변장한다. 여자들은 실생활에서 치마를 입었지만 남자 배우들은 웃음을 자아내려고 그 옷을 빌려 입었다. “조사에 따르면 남자가 여자 역을 맡은 영화는 모두 성공했다”고 ‘헤어스프레이’의 책임 프로듀서 크레이그 제이던이 말했다. “사람들은 영화에서, 특히 코미디 영화에서 남자가 여자 역을 맡으면 좋아한다.” 마틴 로렌스의 경우를 보자. 영화 ‘빅마마 하우스’ 시리즈에서 로렌스가 맡은 역은 악한을 피하려고, 또는 진짜 여자(대개 놀라울 정도로 아둔하다)의 마음을 사려고 어쩔 수 없이 여자로 ‘변장’하게 되는 전통적인 여장 남자다. 이런 ‘양의 탈을 쓴 늑대’ 계략은 ‘뜨거운 것이 좋아’와 ‘투시’ 등 수많은 동류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다. 이 남자들은 여자로 보이려고 몸의 털을 깎고 립스틱을 바른다(물론 서툴다). 또 좀 더 사려 깊은 영화에서 여장은 남자가 개인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여자로서 받는 대우에 화가 나지만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성들의 그런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런 영화에서 여성들은 그런 자기실현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을 2등 시민의 지위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남자들이다. ‘투시’에서 마이클의 여장 캐릭터인 도로시는 직장에서 남녀 평등을 위해 로비를 벌인다. 이런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건 주로 여장 남자들이 ‘여성’의 행동 방식을 흉내 내려고 애쓰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들의 여자 상대역들은 새로 사귄 친구의 성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으며 이 ‘여자 친구’가 남자로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구애를 해도 순순히 받아들인다.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조세핀은 슈가(메릴린 먼로)에게 자기가 조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녀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슈가는 “그것 봐요. 나는 별로 똑똑하지 않다니까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일부 비평가는 ‘뜨거운 것이 좋아’가 성의 고정관념을 풍자했다고 찬사를 보냈지만, 여자가 (여장) 남자만큼 똑똑하지 못하다는 메시지가 담긴 영화로 비치기도 했다. 반면 타일러 페리의 마데아와 에디 머피의 라스푸티아, 트래볼타의 에드나는 화면에서 남자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자 배우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로지 오도넬 정도면 에드나 역을 훌륭히 해내고도 남는다. 작가 질 넬슨은 이렇게 말했다.“이런 영화들은 여성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품위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여성의 일자리까지 빼앗는다. 마틴과 에디가 분장하고 여자 역을 하는데 영화 제작사들이 무엇 때문에 흑인 여자 배우를 고용하겠는가? 우리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게이 운동가들은 에드나가 전통적으로 게이의 역할(워터스와 피어스타인, 그리고 디바인은 모두 게이다)이라며 트래볼타를 몰아세웠다. 백인 배우가 흑인으로 분장하면 보통 비난을 받지만 남자 배우의 여장에 나타내는 반응은 좀 복잡하다. 일부 게이는 그것을 대체문화의 중요한 측면으로 받아들이지만 일부는 남몰래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게이 남성에 관한 진부한 고정관념을 지속시키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자 역을 맡는 남자 배우가 동성애자가 아닐 경우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여장에 관한 논란은 강도가 약해진다는 데 대다수가 동의한다. 워터스 감독이 실제로 여장 남자인 화려한 게이, 디바인을 모성애가 강한 전통적인 어머니 역으로 캐스팅했을 때 ‘수용’이라는 영화의 메시지가 강조됐다. 하지만 에드나가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는 역할로 표현되면 그런 뉘앙스는 사라진다. 트래볼타가 연기하는 에드나는 동성애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그러나 제이던은 에드나 역에 여자 배우를 캐스팅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디바인을 염두에 두고 이 역을 만든 워터스가 시작한 전통을 지키기로 했다. 제이던은 “배우가 영화에서 하는 일에 한계를 지을 이유가 있는가? 시각효과와 분장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데 못할 게 뭔가?”라고 물었다. 특수 분장을 이용해 여성으로 거듭난 트래볼타의 스타일이 앞으로 여장 남자들 사이에서 유행할지 모른다. 트래볼타가 연기하는 에드나는 디바인보다는 마이크 마이어스의 팻 배스타드나 짐 케리의 그린치, 또는 기네스 팰트로의 로즈메리 섀너핸과 더 공통점이 많다. 트래볼타나 머피, 로렌스 같은 배우들이 이런 역을 맡으면 성혼동의 여지는 적어진다. 트래볼타는 에드나를 ‘웃음거리 여장 남자’로 연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이 배우들은 가발을 쓰고 뚱보 여자로 특수 분장을 하려니 불편해 죽을 지경이었다고 너스레를 떤다. 배리어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장은 관습에 대한 도전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빅마마 하우스’와 ‘헤어스프레이’ 같은 영화들은 설사 그런 기미가 보인다 해도 그럴 의도로 제작되지는 않았다. 여장은 그저 웃음을 자아내기 쉬운 방법으로 사용됐을 뿐이다. 라텍스 특수 분장으로 효과를 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여장의 의미가 그 속에 숨겨진 뜻을 찾기보다는 특수분장 효과에 감탄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재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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