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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가위손 헤어디자이너 박준

한국 대표 가위손 헤어디자이너 박준


박준 원장은…
1951년 전남 해남 生, 본명 박남식
72년 미용계 입문
80년 미국 캘리포니아 비달사순
아카데미 수료
81년 박준미용타운 원장
82년 한국남성미용연구회 회장
89년 박준美場으로 상호 변경
95년 피엔제이(P&J · 현 박준뷰티랩) 대표이사
97년 숙명여대 경영대학원 초빙교수
98년 박준뷰티아카데미 대표이사
99년 결식아동학교 ‘곰곰이 학당’ 교장
2000년 영국 아트스쿨 연수
2003년 원광대 뷰티디자인학부 교수
2006년 러시아 네프스키 베레가 헤어 쇼 심사위원


수상
80년 뉴욕 IBS 3위 입상
2000년 코리아닷컴 사이버 명예의 전당 최고 헤어디자이너 추대
2001년 제1회 미용인상 골든상
2003년 에스테티카코리아
톱 헤어스타일리스트상
2005년 표준협회 서비스 품질지수 1위, 2년 연속 소비자 웰빙지수 1위 수상


저서
<귀까지 잘라서 죄송합니다> (95년)
(97년)
<나의 선택, 나의 길> (98년)
<프로로 가는 길> (99년)

14세 사춘기 시골 소년이 단돈 500원을 들고 상경했다. 구두닦이, 아이스케키 장사, 유흥업소 종업원을 전전하다 번쩍 눈을 뜬 게 미용사. 금남의 구역 미장원에서 허드렛일로 시작해 가위손 커트 1인자로 우뚝 선 박준 박준뷰티랩 원장.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헤어케어 제품을 만드는 사업가이자 대학교수 등 1인 3역으로 바쁘다.
7월 3~7일 중국 베이징(北京) 온도수성 테마파크. 한 · 중 수교 15주년 기념행사로 한겵?뷰티 문화 페스티벌이 열렸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둘째 날의 뷰티 거장(巨匠) 쇼. 한국을 대표하는 뷰티 거장은 박준이었다. 독특한 스타일과 의상으로 박수 세례를 받은 헤어쇼의 작품명은 COSMOS(우주). 8명의 중국인 모델이 20여 분에 걸쳐 은하수 · 혜성 · 오로라 등 하늘의 별과 우주를 상징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물론 뷰티산업의 전반적인 상황은 한국이 중국보다 몇 수 위지요. 지금 중국의 뷰티산업은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부가 미용산업을 미래의 유망 10대 산업으로 지정해 적극 지원하는 게 부러워요.”



‘남과 같은 나’를 거부하는 사람


박준 박준뷰티랩 원장 겸 대표는 젊다. 만으로 쉰여섯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몸도, 말도, 생각도,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꽃무늬 반팔 티셔츠에 검정색 진바지 차림이다. 특유의 콧수염과 알록달록 플라스틱 테 안경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유심히 보니 체크 무늬 안경 양쪽이 짝짝이다. 왼쪽 아래 안경테엔 체크 무늬가 없다. 안경이 참 특이하다고 했더니 “이게 바로 내 컨셉트”라고 말한다. 그것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수제 안경테라고.

“미용은 언제 봐도 참 멋진 일이에요. 사람을 젊게 만들고 업(Up) 시키거든요. 헤어디자이너는 움직이는 예술을 하는 아티스트입니다.”

성공한 사업가치고 입지전적 스토리 한두 편을 갖고 있지 않은 이가 없지만 박준 원장의 이야기는 적어도 몇 부작 드라마 같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농사꾼의 7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 나무도 하고, 소도 키우며 집안일을 돕던 그는 열네 살의 나이에 무작정 상경한다. 어머니 몰래 계란 판 돈 500원을 들고서.

“제 고향 해남을 땅끝마을이라고들 하는데 전 그렇게 안 불러요. 왜 하필 땅끝입니까? 땅시작마을이지요. 경치가 좋고 개발이 덜 돼 지금도 참 좋아요.”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안 해 본 일이 없다. 구두닦이, 아이스케키 장사, 공사장 잡역부, 술집 웨이터, 신발가게 점원…. 그래도 서울 생활 몇 년에 지낼 만해졌다. 1972년 그의 나이 스물둘, 고향 친구들과 종로에 있는 YMCA 다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화장실에 다녀오며 마침 문이 열린 미용실을 보게 된다.

순간 저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무작정 들어갔다. “저,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외국에는 남자도 많아. 한 번 해봐. 그럼 내일부터 출근해.” 이 순간부터 청년 박준의 삶은 확 달라졌다.

“생뚱맞은 반항아 기질이 작동한 거지요. 사실 첫날은 용기가 안 나 문 앞에서 몇 바퀴 돌다가 들어갔어요.”

미용실 청소와 마네킹 샴푸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박 오빠’로 통했다. 정식 미용사가 아닌 보조원 노릇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새가 없었다.



언제나 새로움을 찾는다


그 와중에도 밤에는 미용기술학교에 다녔다. 한다고 하는데도 여기저기서 수군댔다. ‘무슨 남자가 할 게 없어서’, ‘꽃밭에 있으니 좋겠다….’ 아랑곳하지 않고 손이 부르트도록 가위질 연습에 매달렸다. 그러기를 8년여, 마침내 81년에 그는 1단계 창업의 꿈을 이룬다. 서울 충무로에 ‘박준미장타운’이란 간판을 버젓이 내걸고 독립했다.

남성 미용사에 대한 편견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80년 미국 뉴욕 국제헤어대회(International Beauty Show · IBS)에 나가기 위해 여권을 신청했다. ‘남자가 무슨 미용대회에 나가느냐’며 당시 보건사회부에서 딴죽을 거는 바람에 대회 하루 전날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1주일 전에 도착해 준비했는데 전 도착한 이튿날 대회에 나갔어요. 그래도 운이 좋았던지 3위에 입상했어요.”

당시 국내의 이런 부정적인 시선이 오기를 발동시켰다. 팀에서 슬그머니 빠져 LA 비달사순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커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 이후 그는 가위손 커트의 매력에 빠져든다. 돈이 모이면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직접 보고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

미다스 가위손 박준은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한다. 82년 9월에 모델을 거꾸로 매단 채 헤어쇼를 진행했다. 이 장면이 방송을 타면서 그는 유명세를 탔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계속 이어진다. 남성 전용·아이 전용 미용실을 처음 열었다. 2,000만원짜리 헤어 시뮬레이션 기기를 들여왔다. ‘뿌리 퍼머’, ‘유니섹스 스타일’, ‘내추럴 퍼머’ 등은 모두 그가 개발해 유행시킨 헤어 스타일이다.

“스타일이 다양해졌어요. 알아서 해달라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옛날 획일화된 이발소 · 미장원 문화는 찾아보기 힘들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추구하거든요. 공부하지 않는 헤어디자이너는 살아남기 힘듭니다.”

박준이란 브랜드가 어느 정도 인식된 95년에 그는 2단계 안정화의 계기를 마련한다.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우루과이 라운드(UR) 시대, 서비스업도 변해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려면 먼저 구멍가게를 벗어나야 했습니다. 또 우물 안에서만 놀지 말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지요.”

UR 협상이 한창일 때 대형 프랜차이즈화를 모색한 것이다.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시작한 프랜차이즈 살롱이 현재 국내 87개, 해외 13개 등 100개다. 국내 미용실 프랜차이즈 중 가장 많다. 지난해 가맹점으로부터의 로열티로만 14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박준 원장의 꿈과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계속 뭔가를 시도한다. 박준뷰티랩이 잘 나가던 2000년 1월 7일 그는 돌연 혼자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우리 나이로 딱 쉰일 때다. 주변에선 이혼 · 부도 · 도박설까지 나돌았다. 나이를 스물일곱이라고 속인 채 처음에는 영어 공부 겸 현장체험을 주로 했다. 뮤지컬과 연극을 보고 여행을 많이 다녔다. 마지막 6개월은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미용실에 취직했다.

“50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지금 이런 식으론 안 되겠다는 결심에 비행기를 탔지요. 영국으로 날아가면서 ‘한국에선 내가 최고’란 자만심을 대서양에 버렸습니다. ‘10년 늦어지면 10년 더 빨리 가자’고 생각했지요. ‘박준의 미용실’이 아닌 ‘박준이 대표인 미용 기업’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죠. 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입니다.”

▶7월 4일 베이징에서 열린 박준 COSMOS 헤어쇼.



‘뷰티랩’코스닥 상장 준비


2002년 6월에 귀국한 그는 박준뷰티랩의 영역을 본격적으로 넓혀 나갔다. 3단계 도약이다. 자유무역협정(FTA) 시대에 맞춰 사업의 판을 새로 짰다.

GS리테일과 손잡고 올 3월 ‘박준의 촉촉한 황토’ 헤어케어 시리즈를 내놓았다. 유통업체와 헤어디자이너가 손잡고 내놓은 국내 첫 헤어 브랜드다. 그는 이어 자체적으로 창포 헤어케어 시리즈를 선보였다. 단옷날 창포물에 머리를 감던 풍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7월 10일에는 홈플러스와 함께 흑두(검은 콩) 헤어케어 시리즈를 출시했다. 오는 10월이면 헤어드라이, 매직 퍼머기 등 미용기구도 나온다. 이 모든 제품에 Parkjun’s(박준스) 브랜드가 들어간다. 박준뷰티랩은 4~5년 안에 코스닥시장에 상장할 계획이다.

“미용실도 확 변해야 합니다. 상업적인 공간에서 문화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할 필요가 있어요.”

박준뷰티랩은 남다르다. 미용실 한쪽에 지압으로 두피를 개선시키는 헤어 스파실이 있다. 자리마다 LCD 모니터가 있어 고객이 커트 중에도 심심하지 않게 한다.

박준뷰티랩 프랜차이즈는 시스템화를 꾀하면서 매뉴얼을 만들어 교육에 신경 쓴다. 가맹점은 한 달에 한 차례 교육을 받아야 한다. 커트부터 퍼머 · 메이크업 등 분야별 전문가를 불러 가르친다. 영국 등 해외에 연수도 보낸다. 박 원장은 교육에도 돈이 들어가야 효과가 있다고 본다. 돈을 들여 가르치고 돈을 받아야 돈이 아까워 열심히 한다는 게다.

“FTA로 미용업계가 어려워질 거라고들 하는데 겁부터 먹을 건 없지요. 한국인의 손 기술은 세계가 인정합니다. 헤어디자이너로서 경쟁력이 있다는 얘기거든요. 모든 건 우리가 하기 나름입니다.”

UR협상 이후 한국에도 여러 외국 브랜드가 들어왔다. 하지만 썩 좋은 성과를 내진 못했다. 박준 대표의 올해 ‘사업’ 컨셉트는 글로벌화다. 개인 숍에서 프랜차이즈로 대형화를 꾀한 지난 10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10년은 글로벌화에 승부를 걸 참이다. 300명을 동시에 교육할 수 있는 박준뷰티아카데미에는 이따금 중국에서 연수를 받으러 온다. 박 원장은 이 교육사업에 기대를 건다.

그는 비달사순처럼 헤어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3대 영역-헤어살롱, 디자이너 양성교육, 헤어케어 제품 사업-을 다 하고 싶어한다. 그러려면 프랜차이즈 망을 200여 개로 늘리고, 40여 종의 박준스 브랜드 헤어케어 제품의 시장점유율을 높여야 한다.

박준 원장은 헤어디자이너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첫 인상의 70%는 헤어 스타일이 결정합니다. 다른 디자인보다 스타일 변화에 대한 반응도 엄청 빨라요. 늘 트렌드에 민감하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문득 박 원장의 머리는 누가 하는지 궁금해졌다. “제가 마루타가 됩니다. 사실 직원들이 좀 부담스러워 하죠. 원하는 스타일을 이야기할 때도 있지만 한 번 해 보라고 맡기는 편입니다.”

헤어디자이너는 얼굴 표정은 물론 고객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해야 한다. 그는 젊은 시절 담배 냄새가 난다는 고객의 말 한 마디에 바로 담배를 끊었다.



내 머리를 디자인해 봐라


“헤어 디자인은 고객과 1대 1로 마주한 채 이뤄지는 작업이라서 무엇보다 서비스 마인드가 중요합니다. 늘 고객을 최고로 섬긴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지요.”

정규 학교라야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지만 그만큼 열심히 계속 공부하는 이도 찾아보기 힘들다. 비달사순 아카데미 등 세계적 미용학교에 가서 기초부터 새로 배우며 자신을 업그레이드한다. 마케팅 및 미래 예측 능력을 키우기 위해 국내 8개 경영대학원에 다녔다. 등록만 한 채 빠지는 이도 많은데 그는 매번 개근상을 탔다.

브랜드를 알리려면 국내 영업만 해선 부족하다. 해외 무대에서도 활동해야 한다. 그는 모스크바 · 베이징 · 런던 · 밴쿠버 등에서 헤어쇼를 열었다. 그는 지금도 사무실에 마네킹을 갖다 놓고 커트 연습과 헤어 스타일 연구를 한다. 매주 수요일이면 변함 없이 서울 청담동 살롱에 나가 단골고객의 머리를 직접 커트한다.

“트렌드를 좇아 민감하게 움직이면 나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헤어디자이너를 할 겁니다. 손가락에 힘이 있는 한 가위를 들어야지요.”

그가 특별히 공을 들이는 이벤트가 있다. 2002년부터 11월이면 열리는 ‘박준 패밀리데이’다. 박준뷰티랩에서 활동하는 3,000여 명의 가족들을 모아놓고 하는 헤어쇼다. 이날 헤어 디자인 대회를 통해 아트 팀원 한 명을 뽑는다.

이런 식으로 구성된 13명의 아트팀이 그 해 유행을 주도할 트렌드를 연구한다. 일반 기업의 연구 · 개발(R&D) 센터 격이다. 그만그만한 미용업계에서 박준뷰티랩이 독보적 위치를 확보하는 데는 이런 과정이 숨어 있다.

헤어디자이너 박준, 그는 미용업을 뷰티산업이라고 부르며 정보기술(IT) 산업 이상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뷰티산업 시장은 세대와 국경을 넘어 커지고 있다. 남성도 화장을 하는 시대요, 고령화 사회는 장년 · 노년층의 젊게 보이고 싶은 욕구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미용 가위는 오래 전부터 가난을 자르는 도구 중 하나였다. 시골에서 도시로 온 아가씨들의 꿈은 ‘미장원을 여는 것’이었다. 꿈을 이룬 미용실 여사장은 부모를 모시고 동생들을 대학에 보냈다. 이런 점에 착안해 미용 공동체를 통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도록 하자는 사회적 기업 조이비전이 지난해 말 출범하면서 박준 원장과 손을 잡았다.



공부가 고팠다…봉사도 열심


“기술만 배워 갖고선 자립 못해요. 기술 못지않게 정신력이 중요합니다. 자격증을 딴 뒤에도 적어도 3년은 하루 12시간씩 꼬박 서서 일을 해야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수 있거든요. 꿈은 이뤄지는 게 아니라 열심히 뛰고 노력해서 이루는 것입니다.”

2003년 원광대에 뷰티디자인학부를 개설한 그는 학생들에게 머리를 손질하는 기능인이란 생각에서 벗어나 미의 세계를 창조하는 아티스트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라고 주문한다. 공부가 고팠던 그는 지각하는 꼴을 못 본다.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결석이나 지각 · 조퇴가 없는 학생이면 적어도 A학점을 준다.

가난도 겪어 본 사람이 안다. 그는 고향 초등학교에 도서관을 지어주었다. 결식아동을 위한 ‘곰곰이 학당’ 교장도 지냈다. 요즘은 탤런트 김수미 씨와 함께 노인정 화장실에 비데 설치해 주기 운동을 하고 있다.

가위손 경력 35년의 박준 원장은 한국 헤어 패션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부인 임승애 청담본점 원장도 알아주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다. 영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아들도 미용 관련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박 원장은 여름방학 중 다른 회사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하는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지각해선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지 애비 우산 그늘에서 적당히 하려고 들어선 곤란하지요. 스스로 기초부터 배우고, 경험을 쌓고, 단계를 밟아 커 나가야지요.”

박 원장의 원래 꿈은 가수였다. 산에서, 마을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다녀 얻은 별명이 ‘길 나발’이다. 그의 요즘 애창곡은 이루의 ‘까만 안경’이다.

국내 최고가 아닌 최고로 가는 과정이라는 박준뷰티랩은 토털 뷰티 컨설팅 기업으로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커트 1인자 박준, 사업가로선 어떤 모양으로 글로벌 뷰티 시장을 커트할까.

박준 원장의 서비스업 성공 7계명

박준 원장은 산전수전 다 겪었다. 어려서부터 안 해본 일이 없다. 물려받은 것 하나 없이 온몸으로 부닥치며 길을 찾았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던 미용계의 미운 오리 새끼가 전국 최대 프랜차이즈의 미용 제국을 일군 데는 남다른 비결이 있다.



1

남들이 안 하는 일(블루오션)을 찾아라 = 남자, 여자가 하는 일이 어디 따로 있나.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하는 식의 생각은 버려라. 1인자가 아니면 최초라도 돼야 통한다. 어느 분야든 1호는 알아준다.



2

도전을 두려워 마라 =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마라. 실패는 오기를 낳고, 오기는 도전의 보약이 된다. 노력이란 무기가 있어야 용기가 생기고 도전도 가능하다. 힘들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긍정의 힘은 강하다.



3

오늘의 고난을 참고 견뎌라 = 처음부터 잘 나가는 사람도, 사업도 없다. 밑바닥 체험이 정신 무장에 도움이 된다.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생각하며 ‘이 길을 꼭 가야 한다’,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덤비면 안 되는 일이 없다.



4

일에 미쳐라 =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고마워하라. 그리고 그 일에 푹 빠져라. 일 때문에 잠꼬대도 하고 꿈도 꿔라. ‘그 사람 그 일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성공한다.



5

자신을 알려라 = 가게 안에 앉아만 있지 말고 직접 거리로 나가 명함을 돌려라. 밥 한 끼 먹거나 어디 가서 물건을 살 때도 고객을 만들어라. 모임에 나가고 야간학교도 다니며 여러 분야의 인물과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6

남보다 한발 앞서가라 = 다른 데서 하지 않는 일을 과감히 시도해라. 거꾸로 매달기도 하고, 뒤집어도 보고 해야 새로운 게 나오고 관심을 끈다. 이렇게 해서 개척한 새로운 길은 또 다른 길을 낳는다.



7

세계 트렌드를 공부하라 = 국제화 시대다. 연간 해외 여행객 1,000만 명 시대다. 그들이 세계를 돌며 보는데 국내에서 옛날 방식을 고집해서 통하겠나. 세계 트렌드를 공부한 뒤 내 것을 창조해라. 공부에는 나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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