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용기가 역사를 다시 썼다
이스라엘 건국 산파역 맡은 트루먼 대통령, 정치적 압력과 반발 무릅쓰고 유대인국가 승인 1948년 5월 12일 수요일 오후. 햇빛이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의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비칠 때였다. 국무장관이자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일등공신인 조지 마셜 장군이 해리 트루먼 대통령 옆에 자리를 잡았다. 대통령의 책상을 두고 앞쪽에는 클라크 클리퍼드 백악관 특별고문이 앉았다. 마셜보다 낮은 지위에 걸맞은 자리였다. 이틀 뒤인 5월 14일 금요일 자정을 기해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할 예정이었다.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리하고 성지 예루살렘도 요르단령과 이스라엘령으로 나누기로 이미 결의했다. 하지만 아랍국의 5개 군대는 유엔의 이런 계획에 아랑곳 없이 새로 탄생하는 유대인 국가를 없앨 태세였다. 클리퍼드는 트루먼에게 신생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면 곧바로 승인하라고 간청했다. 미국이 정통성을 부여하면 동맹국들도 그 뒤를 따르게 돼 이스라엘이 살아남는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마셜은 수가 훨씬 많은 아랍군을 유대인들이 막아낼 길이 없다며 트루먼에게 개입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유대인들이 설령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미국은 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클리퍼드의 말을 빌리자면 “혼자만 의로운 침례교인의 어조”로 마셜은 “클리퍼드의 조언을 받아들인다면… 저는 국무장관직을 사퇴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트루먼은 “마셜 장군을 잃을 순 없어!”라며 클리퍼드를 질책했다. 트루먼으로서는 자신이 “이 시대의 위인”이라고 부른 국가적 영웅의 눈 밖에 나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트루먼은 유대인 국가의 건국을 승인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외교정책 결정이었다. 그 결정은 여러 갈래의 외부 압력과 목표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도출됐다. 유대민족 운동을 주창하는 시온주의자들, 반(反)시온주의자들, 선거의 해에 유대인 표를 얻으려는 민주당 정치인들, 그리고 아랍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외교관들이 나름대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려 했다. 트루먼은 아직까지도 유럽의 수용소에 있는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들을 안타깝게 여겼고, 성서에 나오는 역사도 경외했다. 하지만 동시에 갓 건국된 유대인 국가에 미군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을까, 혹시 마셜 같은 존경받는 지도자들이 천박한 정치적 이익 때문에 미국의 외교를 왜곡한다고 자신을 비난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게다가 보수적인 시골 마을에서 자라면서 몸에 밴 반유대주의도 뛰어넘어야 했다. 트루먼은 대통령이 돼서도 아내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일기에 유대계 미국인들을 악의적으로 언급했다.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지도자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었다. 1945년 4월,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고, 연합군이 유럽에서 죽음의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면서 미국인들은 비로소 유대인 대학살의 끔찍한 파장을 알게 됐다. 많은 유대계 미국인은 두 번 다시 이방인의 호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제2의 히틀러를 막아내는 길은 자신들의 국가를 설립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미주리주 시골 출신의 침례교도인 트루먼 대통령이 자신들의 처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우려했다. 트루먼이 유대인들과 함께 자랐다거나 어렸을 때부터 유대인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인디펜던스에서 살던 시절 트루먼네 옆집에 바이너라는 성을 가진 유대인 가족이 2년 동안 살았다. 그 자녀 중 한 명인 사라 바이너는 오빠 에이브가 트루먼과 “절친한 친구”였다고 돌이켰다. “해리는 매일같이 우리 집에 놀러 왔어요… 아마 우리는 그가 만난 첫번째 유대인이었을 거예요.” 독실한 유대인들이 집안일을 못하는 안식일이 되면 해리는 바이너 가족을 위해 ‘안식일 일꾼’을 자청했다. 인디펜던스 고등학교 시절인 16세 때 트루먼은 셰익스피어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사악한 유대인 샤일록을 주제로 한 작문 숙제를 제출했다(지난 2000년에 발견됐다). 반유대주의로 빠질 소지가 많은 샤일록이란 소재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은 뜻밖에 유대인을 동정했다. “샤일록이 자신을 괴롭힌 이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돈을 악착스럽게 긁어 모았다고 해서 그를 비난해선 안 된다. 그는 구두쇠가 아니었다. 만약 그의 자국민이 곤경에 처했다면 그는 여느 기독교인이 다른 기독교인을 돕듯 그 사람을 도왔음에 틀림없다… 유대인이든 기독교인이든 간에 기회가 왔을 때 복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여태껏 보지 못했다.” 트루먼은 나아가 “히브리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진정으로 세계를 “지배”하지 못했으며, 그들은 “몰락”하고 나서도 “특별한 민족”으로 남았다고 주장했다. 2000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 유대인들은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국민으로서… 종교적인 이유로 탄압받으며, 지금도 “흩어진 동족을” 한곳으로 모을 “지도자를 기다린다”고 적었다.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자 유대계 미국인 지도자들은 미국 정부가 그 사태를 막는 데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을 자책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대에는 공손한 복종 자세를 견지했던 그들은 이제 “아첨하는 유대인”으로 조롱받았다. 뒤늦게나마 그들은 유럽의 수용소에 갇혀 있는 억류자들뿐만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의 생존이 위협 받는다고 깨닫고 그런 태도를 과감히 벗어 던졌다. 1946년 7월 아바 힐렐 실버라는 랍비는 트루먼을 찾아가 그의 책상을 내리치며 호통쳤다.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허용하되 미군의 보호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영미(英美) 위원회 보고서 때문이었다. 같은 달 뉴욕주를 대표하는 민주당 상원의원 2명과 시온주의를 지지하는 전직 외교관 제임스 맥도널드도 트루먼을 찾아와 그 보고서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발끈한 트루먼은 그 보고서가 “훌륭합니다”라고 말했다. 맥도널드는 트루먼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세우려는 유대인들의 뜻을 “저버리고” 있다면서 “저주받은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트루먼은 화를 참지 못했다. “어떻게 해도 유대인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어요… 그들에게 미국은 관심 밖이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팔레스타인과 자기 민족에만 치우쳐 있어요… 유대인들이 미국 역사나 나의 역사를 쓰지는 않잖소!” 맥도널드는 눈치 없게도 여기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문제가 “중차대한 의미”가 있다는 점을 잘 이해했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트루먼은 “나는 루스벨트가 아니오!” 라고 소리쳤다. “나는 뉴욕 사람이 아니라 중서부 출신이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밀고 나갈 거요.” 트루먼은 자신을 윽박지르는 행동에는 늘 과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자신이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는다는 점을 반드시 보여주려고 했다. 오만한 기득권층에 늘 적대감을 가져왔던 트루먼은 자금이 풍부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시온주의 단체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는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에게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유대인들은 모두 피해의식에 빠진 약자들이죠.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자신들이 힘을 가지면 힘 없을 때 사람들이 자신들을 대했듯이 똑같이 옹졸하고 잔인하게 굴어요.” 트루먼은 시온주의 지도자들이 자기 집무실에 찾아오지 못하도록 출입을 금했다. 2003년 발견된 그의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유대인들은 균형 감각이 전혀 없을뿐더러… 세계 정세에 아무런 식견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유대인들은 아주 이기적이다.” 트루먼은 거의 매일 밤 아내 베스에게 골치 아픈 문제들의 조언을 청했다. 베스가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하라고 권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트루먼이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토크쇼 진행자 데이비드 서스킨드는 그를 인터뷰하려고 인디펜던스로 내려왔던 적이 있었다. 서스킨드는 트루먼에게 왜 자신을 집 안으로 초대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서스킨드에 따르면 트루먼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유대인이잖소. 아직까지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은 유대인은 없었어요. 집안 일은 베스가 전권을 갖는데 아내나 장모의 집에 유대인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스라엘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뒤 오래 지난 1957년에도 트루먼은 아내 베스에게 편지를 쓰면서 뉴욕시를 “미국에 있는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불렀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백악관에 못 들어가게 되자 대통령과 선을 대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캔자스 시티 변호사인 A J 그라노프는 유대계 미국인의 조직인 브나이브리스(B?ai B?ith)의 간부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혹시 제이콥슈타인이라는 사람을 아세요?… 트루먼 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던데요.” 그라노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에디 제이콥슨 말인가요? 당연히 잘 알죠! 나는 그의 친구이자 변호사요.” 제이콥슨과 트루먼의 관계는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용하고 싹싹한 제이콥슨 일병은 오클라호마주 캠프 도니판의 군내 매점에서 트루먼 중위의 부하였다. 트루먼은 인디펜던스에 있던 여자친구 베스 월리스에게 쓴 편지에서 “유대인” 제이콥슨이 부대 매점을 운영하는데 “아주 유능한 사람”이라고 적었다. 그 뒤 프랑스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함께 싸운 두 사람은 귀국해 캔자스 시티에 남자 전용 가게를 냈다. 트루먼은 영업담당 겸 경리, 제이콥슨은 구매를 담당하면서 옛 전우들을 손님으로 맞았다. 하지만 곧 전후 불경기가 닥쳤다. 트루먼은 이렇게 회상했다. “가진 전부를 잃고 빚까지 졌다. 빚쟁이들 때문에 에디(제이콥슨)는 파산했지만, 나는 공무원이 되었기에 파산은 면했다.” 그래도 두 사람의 우정은 계속됐다. 트루먼이 상원의원 시절 캔자스 시티에 가면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포커를 치거나 때로는 음담패설까지 주고받으며 “우리 가게는 쫄딱 망했었지”라고 농담도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교류가 없었다. 제이콥슨의 아내 블루마는 베스 트루먼의 친정쪽 사람들은 “그쪽 지방에선 알아주는 귀족”이었다며 “그러니 트루먼네는 유대인을 집 안에 들일 수가 없었어요”라고 회상했다. 1947년 여름, 제이콥슨은 캔자스 시티의 유대인 호텔 뮤엘러바크에서 그라노프, 그리고 브나이브리스 회장 프랭크 골드먼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제이콥슨은 트루먼에게 개인적인 부탁은 절대로 하지 않겠지만, “바다 건너 저쪽의 고통 받는 동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트루먼과 상의해보겠다고 했다. 제이콥슨은 트루먼의 “좋은 마음씨”를 철석같이 믿었다. 그라노프는 가장 시급한 문제가 더 많은 유대인난민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제이콥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실상을 정확하게 알리면 트루먼은 반드시 옳은 결정을 내릴 겁니다… 저는 시온주의자가 아니라 잘 모르니, 일단 저에게 모든 사실을 빠짐없이 알려주세요.” 제이콥슨은 워싱턴으로 가서 트루먼 대통령의 일정 담당 비서 매트 코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널리는 “각하의 허락도 없이 여기서 대체 뭐하십니까?”라며 비웃었다. 제이콥슨과 그라노프는 결국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됐다. 트루먼은 “이게 누구야! 어서 앉게”라며 그들을 맞았다. 제이콥슨의 기억에 따르면 트루먼은 자기 자녀들을 위해 달러 지폐에 서명을 해주고 캔자스 시티에서 사업이 잘되느냐고 물은 다음 제이콥슨과 트루먼은 본격적으로 “진지한 대화”를 했다. 그라노프와 제이콥슨은 유대인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트루먼은 “아무렴,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자네들을 백악관에 들이지도 않았을 걸세”라고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지만 자네들만은 그렇지 않아.” 트루먼은 그날 밤 잠들기 전 녹색 독서용 챙을 쓰고는 매부리 코를 역사책에 파묻었다. 그는 “늘 지식을 넓히려고 독서에 매달려 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특히 전기와 역사서를 즐겨 읽었다. “인간의 본질에 새로운 것은 없다… 이 세상에 굳이 새로운 무엇이 있다면 아직 모르는 역사뿐이다.” 인디펜던스에서 자라던 시절 근시였던 트루먼은 ‘위대한 남성과 유명한 여성 ? 네부카드네자르에서 사라 베르나르까지(Great Men and Famous Women - from Nebuchadnezzar to Sarah Bernhardt)’라는 금테 두른 4권짜리 역사책을 탐독했다. 그중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왕 키루스 2세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 유대인들이 유배지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게 해준 왕이었다. 1947년 10월 제이콥슨은 트루먼에게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로 나누는 유엔 위원회의 제안을 지지해달라고 탄원했다. 제이콥슨은 “우리 민족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니 그들을 좀 도와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네”라고 편지에 썼다. 당시 국무부 차관보였던 로이 헤더슨은 미국이 유대인 국가 설립에 조금이라도 관여한다면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공급이 위태로워질 뿐 아니라, “아랍권 전체”가 미국의 “적”이 된다고 경고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팔레스타인의 분할은 승인했지만, 미국은 유대인 국가에 자금을 지원하지 않겠으며, 아랍 군대에 맞서 그 나라를 보호하려고 보낼 병력은 없다고 못박았다. 트루먼이 자신의 의견을 무시한 데 격분한 헨더슨은 유대인들에게 할당되는 영토를 줄이려 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자파시가 “원래 아랍 땅”이며 아랍 유목민에겐 네게브 사막이 “계절 방목”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계시온주의기구의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 회장(나중에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된다)이 가까스로 백악관에 찾아가 지도를 꺼내 보이며 네게브 사막을 빼앗긴다면 홍해로 통하는 길목이 차단돼 유대인 국가가 크게 위협받게 된다고 트루먼을 설득했다. 1947년 11월 말, 미국 뉴욕주 퀸스 플러싱 메도의 스케이트장을 개조한 유엔 임시 본부에서 팔레스타인 분할 제안이 총회의 표결에 부쳐졌다. 클라크 클리퍼드 백악관 특별고문은 필리핀과 아이티 같은 동맹국들이 반대표를 던진다면 미국의 위신이 떨어진다는 생각에서 트루먼을 설득해 보좌관들을 동원해서 분할을 지지하도록 로비를 벌이게 했다. 훗날 클리퍼드는 “국무부 심기를 참 많이 건드렸지”라고 돌이켰다. 1948년 1월, 제임스 포레스털 국방장관은 팔레스타인 분할을 강행하려면 미군 지상군 병력 16만 명 정도가 필요하다고 트루먼에게 보고했다. 로이 헨더슨 국무부 차관보는 미군의 파병 없이는 팔레스타인 분할이 이뤄지기 힘든 데다, 트루먼은 파병은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알고 5월 영국군이 철수하면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신탁통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트루먼이 유대인 국가 건국 문제를 두고 동요하는 낌새를 보이자 바이츠만은 뉴욕으로 가 트루먼을 만나려 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시온주의자들을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보좌관들에게 말했다. “유대인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아랍인들과는 대화가 안 되니 되는 일이 없어.” 브나이브리스의 프랭크 골드먼 회장은 캔자스 시티에 있는 에디 제이콥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트루먼이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려고” 한다면서 “제발 당신이 나서 주시오”라고 말했다. 제이콥슨은 트루먼에게 전보를 쳤다. “우리가 친구로 지낸 수십 년 동안 자네에게 부탁을 한 적이 거의 없 지만, 이번 한번만 부탁하겠네. 제발 지금 바이츠만을 만나주게나.” 시온주의자들의 ‘성가신 청탁’에 신물이 난 트루먼은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답장을 보냈다. 제이콥슨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트루먼의 마음을 바꿔보려고 워싱턴으로 갔다. 매트 코널리 비서는 찾아온 제이콥슨을 대통령 집무실로 들여보내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꺼내지도 말라고 주의를 줬다. 아니나 다를까 트루먼은 “날 왜 찾아왔는지 다 알아. 하지만 내 대답은 ‘노’야”라고 잘라 말했다. 제이콥슨은 물러서지 않고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스스로도 그런 대담함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자 트루먼이 벌컥 화를 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된 순간부터 “동부의 유대인들”이 자신을 “헐뜯고 비방했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는 “팔레스타인이나 유대인이나 아랍인이나 영국인”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며 유엔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겠다고 말했다. 눈물이 제이콥슨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반유대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데 충격을 받고 낙담했다”고 돌이켰다. 그때 제이콥슨의 눈에 트루먼이 공을 들여 미주리주 잭슨 카운티의 법원에 세운 앤드루 잭슨 동상의 축소판 복제품이 들어왔다. “자넨 늘 존경하는 영웅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지. 앤드루 잭슨의 삶이라면 이 나라에서 자네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없을 거야.” 그는 캔자스 시티에서 함께 사업을 했을 때 트루먼이 도산한 가게의 한쪽 구석에 앉아 ‘올드 히커리(앤드루 잭슨의 별명)’를 다룬 “책과 논문, 소책자를 읽던 모습”을 돌이켰다. “이보게, 내게도 영웅이 있어. 한번도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내 생각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대인이지. 하임 바이츠만이야. 그는 몸이 굉장히 안 좋아… 그런데도 자네를 만나려고 수천 km를 날아왔어… 그런 사람을 자네는 일부 유대계 미국인 지도자가 자네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만나기를 거부해. 바이츠만은 그런 비방에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네도 알잖아… 자네답지 않아… 그런 비방쯤이야 얼마든지 털어버리리라고 생각했는데.” 트루먼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의자를 돌려 따사한 봄볕에 푸르름을 더해가는 남쪽 정원을 내다봤다. 제이콥슨은 숨을 참고 기다렸다. 그 시간이 “몇 세기”처럼 느껴졌다. 트루먼은 다시 의자를 돌려 바로 보면서 말했다. “좋아 자네가 이겼어, 이 대머리 녀석아! 그를 한번 만나봄세.” 제이콥슨이 들은 그의 말 중 가장 “정감 어린” 표현이었다. 3월 18일 목요일 해가 떨어진 뒤 바이츠만이 은밀하게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됐다. 트루먼은 바이츠만의 이름을 발음하지 못해 “챔”이라고 불렀다. 트루먼은 “팔레스타인 분할을 밀고 나가기로” 약속했다. 그는 말이 새나갈까 우려해 국무장관에게도 바이츠만이 찾아온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튿날 워런 오스틴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미국 정책을 뒤집는 듯한 발언을 했다.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평화롭게 분리하기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유엔이 세계를 대표해 팔레스타인을 신탁통치 해야 한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라고 안보리에서 말했다. 바이츠만에게 한 트루먼의 은밀한 약속을 오스틴이 무시했다는 소식을 접한 에디 제이콥슨은 믿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얼이 빠졌다”고 그는 돌이켰다. 제이콥슨은 “병이 나” 이틀 동안 앓아 누웠다. 트루먼은 토요일 아침 신문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에 관한 정책이 엉망이 돼버렸다는 기사를 읽고 격노했다. “국무부가 나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뒤집었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 알았다”고 트루먼은 일기에 적었다. “그것도 신문을 보고 알게 됐다. 이게 무슨 꼴이냐! 나는 이제 거짓말쟁이에 배신자 신세까지 됐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국무부의 3~4층 사람들은 나를 끌어내리려고 안달이다.” 트루먼은 클라크 클리퍼드를 불러들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바이츠만에게 철석같이 약속했는데. 그는 내가 비열하다고 생각할 거야… 맙소사, 이제 바이츠만을 무슨 낯으로 다시 본단 말인가?” 에디 제이콥슨은 오스틴이 안보리에서 발언을 한 날을 “검은 금요일”이라고 불렀다.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날 때쯤 그는 바이츠만의 전화를 받았다. 바이츠만은 “상심하지 마세요”라며 트루먼이 오스틴의 발언을 사전에 몰랐으며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변함없이 지지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바이츠만은 제이콥슨에게 이제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백악관 문이 닫히지 않도록 애써주기 바랍니다”고 말했다. 제이콥슨은 그런 격려를 받고 나자 “운명이 자신에게 맡긴 일을 계속할 용기가 생겼다”고 돌이켰다. 1948년 4월, 제이콥슨은 기자들을 따돌리려고 이스트 게이트(동문)을 이용해 백악관에 들어갔다. “동문 출입은 생전 처음이었다”고 그는 돌이켰다. 제이콥슨은 바이츠만에게 사전에 설명을 들은 대로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마자 유대인 국가가 선언될 계획이라고 트루먼에게 전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유대인 국가를 인정하는 게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트루먼은 “헨더슨, 아니 1000명의 헨더슨이라도 나를 막지 못한다”며 “전적으로 동의했다”고 제이콥슨은 돌이켰다. 트루먼은 제이콥슨에게 그런 사적인 약속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트루먼은 유대인들을 “중국인이나 흑인과 같은 부류”로 간주하는 국무부의 “잘난 체하는 녀석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나를 물 먹이려 한다”고 판단했다. 트루먼은 자기 형에게 보낸 편지에 “그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밀고 나갈 겁니다”라고 썼다. 1948년 5월 14일 금요일 텔아비브에서 유대인들은 워싱턴 시간으로 오후 6시에 자신들의 새 나라 건국을 선포할 예정이었다. 트루먼과 클리퍼드는 그 새 국가가 “유대”로 불리리라고 생각했다. 오후 4시, 로버트 러빗 국무 부장관이 클리퍼드에게 마셜 국무장관은 새 유대 국가 인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 직전에 마셜은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헌법상의 권리를 가진 사람이 내리는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퇴해선 안 된다고 결정을 내렸다. 클리퍼드는 러빗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거 정말 희소식이군요!” 텔아비브의 경비가 삼엄한 한 미술관에서 (유대 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다비드 벤구리온은 2000년 동안의 오랜 방랑생활 끝에 드디어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 국가가 세워졌다”고 선언했다. 워싱턴 시간으로 6시 11분 트루먼은 백악관에서 이스라엘의 “사실상의 국가 권한”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고는 ‘승인(Approved)’이라고 직접 썼다. 그는 바이츠만을 떠올리며 “그 나이 많은 의사 선생이 이제야 나를 믿으시겠군!”이라고 말했다. 마셜은 약속대로 공식적으로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클리퍼드와 다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바이츠만은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제이콥슨을 뉴욕으로 초대해 “아직 걸음마 단계인 이스라엘의 임시 대변인”이 돼 달라고 부탁했다. 제이콥슨은 “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이런 영광을 주시는 주님은 나를 진정으로 아끼시나 보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제이콥슨은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갔다. 그가 탄 공항 리무진이 월도프 호텔에 다가갔을 때 많은 사람이 다윗 별이 새겨진 파란색과 흰색의 새 이스라엘 국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국기가 내 조국인 미국의 성조기 곁에서 휘날렸다. 모든 것을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제이콥슨은 “나는 거리에 바보처럼 멍청히 서서 울고 또 울었다”고 돌이켰다. 5월 말 바이츠만 대통령은 “마음이 편한 행복한 사람”으로서 워싱턴을 방문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 국가인 하티크바(Hatikvah)를 불렀다. 백악관의 로즈가든에서 바이츠만은 트루먼에게 유대교 성서 토라를 선물했다. 트루먼은 “감사합니다”고 말했다. “제가 갖고 싶어 하던 책입니다!” 1948년 9월 대통령 선거전이 가열됐다. 트루먼은 공화당 후보인 토머스 듀이에 한참 뒤졌다. 좌익에서는 진보당 후보 헨리 월리스, 우익에서는 스트롬 서몬드 후보가 민주당의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다. 클리퍼드는 트루먼이 이스라엘을 공식 승인하면 유대인들이 선거자금을 대거 기부하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선거가 닥칠 때가 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우리가 최근에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고 그때쯤이면 “배신했다가 돌아서기”를 “열두 번도 더 하리라”고 클리퍼드에게 말했다. 1948년 11월 선거에서 트루먼은 뜻밖의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유대인 표가 몰려 있는 뉴욕, 뉴저지, 펜실 베이니아와 미시간주에서는 패했다. 헨리 월리스의 탓이 크다고 알려졌다. 트루먼이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트루먼은 선거에서 승리한 뒤 바이츠만에게 편지를 보냈다. 재선에 성공한 지금 자신이 느끼는 ‘희열’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했을 때 바이츠만이 느낀 기쁨과 비슷하다는 내용이었다. 한때 “유대인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약자’로서 모두 옹졸하고 잔인하다”고 비난했던 트루먼이 이제는 바이츠만에게 자신과 이스라엘은 둘 다 ‘약자’라고 말했다. “우리 둘 다 가망 없는 꿈을 꾼다며 소위 ‘현실을 직시하는’ 전문가들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옳다고 확신한 일을 밀고 나갔고, 결국엔 우리가 옳았음이 입증됐습니다.” 사실 트루먼이 이스라엘을 인정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의 군사력을 보고 미군의 보호가 필요없다고 확신했다. 러시아가 먼저 승인하도록 내버려두면 러시아가 팔레스타인에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는 우려도 있었다. 순전히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는 어려운 선거전을 앞두고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을 경우 유대인 국가 지지자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냉철하게 사실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백전노장 마셜은 이미 과도한 부담을 안은 미군에게 이스라엘이 애물단지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트루먼은 유대인 국가 건설에 기여하면 역사적인 업적으로 인정 받아 자신이 ‘위대한 남성과 유명한 여성’의 개정판에 실릴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시편 구절은 “우리가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였다. 트루먼은 이스라엘을 인정함으로써 유대인 국가를 원치 않는 사람들과 그 국가가 팔레스타인에 생기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비난받게 된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러나 트루먼은 대통령이 내린 결단의 궁극적인 평가는 “그 당시에 인기가 있는 결정이냐가 아니라 그게 옳바른 결정이었느냐”라고 늘 생각했다. “옳다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실행하라. 인기 문제는 나중에 저절로 해결된다.” 1949년 제이콥슨은 트루먼이 증정한 행운의 모자를 쓰고 이스라엘로 가서 바이츠만 대통령과 벤구리온 총리의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캔자스 시티의 한 랍비는 기자들에게 제이콥슨이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트루먼은 제이콥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네라면 이스라엘 최고의 대통령감이지만 진심으로 충고하건대 요청을 절대 받아들이지 말게”라고 적었다. 제이콥슨은 “흥분한 랍비가 한번 해본 소리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미국인이라는 사실에 너무도 큰 긍지를 느끼기 때문에 세계 다른 나라에서 어떤 자리를 준다 해도 바꾸지 않겠네.” 트루먼은 1953년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제이콥슨은 트루먼의 첫 이스라엘 방문길을 직접 안내해주고 싶었다. 그 두 사람이 이스라엘의 산파역이었기 때문이다. “내 소망이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라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5년 제이콥슨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딸 중 한 명은 트루먼이 문상을 와서는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며 ‘내 형제를 잃었어요!’라며 흐느꼈다”고 돌이켰다. 1965년 에디 제이콥슨 강당이 텔아비브에 세워졌다. 트루먼은 “마침내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로” 결심했지만, 욕조에서 넘어져 다치면서 곧바로 쇠약해졌다. 그래서 방문 대신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위대한 친구”에게 바치는 글을 썼다. “제이콥슨은 유대인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야 합니다.” 인디펜던스에서 이스라엘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트루먼은 “ 히브리어로 ‘축하합니다’를 뭐라고 말하죠? 에디가 항상 내게 말했었는데… 마젤 뭐라고 했는데… 그래 맞아, 토브야. 마젤 토브!” 트루먼은 “우는 남자는 꼴불견”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서와 고대 역사를 숭배한 트루먼은 자신이 뿔뿔이 흩어진 유대 민족을 성지로 다시 모으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감격했다. 이스라엘의 한 마을이 “크파르 트루먼”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트루먼은 밀려오는 감동에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릴 뿐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시온으로 돌아가게 해준 고대 페르시아 왕에 자신을 견주었다. 트루먼이 백악관을 떠난 뒤 뉴욕의 한 유대교 신학교를 방문하자 제이콥슨은 트루먼을 “이스라엘 건국에 도움을 주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트루먼이 제이콥슨의 말을 가로막았다. “ ‘도움을 줬다’니 무슨 말이야? 나는 키루스야! 키루스!” [마이클 베슐로스가 쓴 ‘대통령의 용기: 미국을 변화시킨 용감한 지도자들(Presidential Courage: Brave Leaders and How They Changed America 1789-1989)’에서 발췌한 글이다. ⓒ2007 by Michael Beschl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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