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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게 부딪쳐야 ‘예스’나온다

처절하게 부딪쳐야 ‘예스’나온다

“예스(Yes).”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 한마디는 모든 것이다. 만족스러운 거래는 “예스”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커뮤니케이션이 중시되고 모든 것이 비즈니스화되는 요즘에는 이 대답을 끌어내는 능력이 유능함의 척도가 되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예스’를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답하는 당사자의 지위나 직위, 희소가치가 높을수록 난이도는 기하급수로 높아진다.

제일기획 박지영(37) 국장을 찾아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시 말하면 예스를 받아내는 법을 알기 위해서였다. 그가 하는 일은 일반인에게 좀 생소하다. 그는 PR이라는 이름의 명사(名士) 마케팅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광고와 마케팅에 끌어들이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지도는 한반도가 아니다. 세계 지도다. 그는 이 지도 위를 뛰어다니며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육상의 마이클 존슨에서부터 세계적인 팝스타인 비욘세 놀스,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 영화감독 팀 버튼과 빔 벤더스 등 쟁쟁한 인물들을 섭외했다. 여기서 쟁쟁한 인물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만큼 섭외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특히 그들이 광고 출연에 호의적이지 않을 경우 ‘힘들다’는 단어는 ‘처절한 고생’으로 등급이 높아진다. 작가주의 성향을 가진 거물들은 노출이 덜 돼 있는 만큼 더 매력적이지만 돈에 움직이지 않는다. 또 몇 달치 일정이 잡혀있어 만나는 것 자체도 어렵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세계적인 거물들에게서 “예스”를 받아냈을까? 만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그걸 물었다. 하지만 PR 전문가인 그는 왜 거물인가로 얘기를 시작했다.

“소비자들은 비싼 제품일수록 전문가 의견을 듣는 경향이 많아요. 소비자들은 삼성이 만들었다, 소니가 만들었다 하는 것보다 전문가인 누군가가 ‘이 제품이 최고다’라고 하는 걸 귀담아듣거든요.”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신뢰성 높은 전문가를 마케팅 최전선에 세우는 일이다. 문제는 이게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낮은 신뢰도를 가진 인물은 눈길을 받기 어렵고, 높은 신뢰도를 가진 인물은 본인이 눈길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부터 거물들에게 숱한 제안서를 보낸 박 국장도 그동안 가장 많이 받아본 반응은 ‘노(NO)’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여기서 박 국장의 성공비결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실패한 사람들은 대개 여기서 주저앉지만 그는 이 상황을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꼽는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라는 영화로 4억72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영화감독 팀 버튼이 좋은 예다. 박 국장은 지난해부터 삼성전자 보르도TV 글로벌마케팅의 인쇄매체 애드버토리얼 마케팅에 참여하고 있는데, 알다시피 이 TV는 삼성전자가 내놓은 회심의 역작이다.

▶한국외국어대 졸업. 1994년 제일기획 입사.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삼성 올림픽 홍보대사로 육상선수인 마이클 존슨 섭외. 지금까지 본격 접촉한 세계적인 거물들만 40여 명. 2002년 한국PR대상 수상, 2004년 APEC 정상회의 국내외 홍보기획안 최우수상 수상.

2005년 출시해 호평을 받고 있던 소니의 ‘브라비아’(Bravia)와 샤프의 ‘아쿠어스’(Aquos)를 따돌리고 단일 제품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히트상품이기 때문이다.(애드버토리얼이란 광고와 논설의 합성어로 ‘기사식 광고’로 불리는 마케팅 전략 중 하나다)

팀 버튼과의 인연은 지난해 말 삼성전자가 화질을 강조하는 전략을 수립하면서 시작됐다. 박 국장은 화질을 말해줄 전문가로 영화감독 팀 버튼을 택했다. 강렬한 컬러로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찰리와…’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론칭 시점은 올 3월이었다.

“미국 뉴욕에 있는 그의 매니지먼트사로 e-메일을 보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하더군요. 더구나 그는 기업과 일해 본 경험이 없었고 연결되는 것조차 피했어요. 직접 부닥쳐보려고 했는데 그조차 안 되더군요. 새 영화를 찍는다고 런던으로 가서 연락두절이었거든요.”



최선 다해도 성공 확률은 10%

기다렸다. 지난해 12월에 시작했으니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2월 초가 되어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포기해야 하는가? 그러기엔 너무 아까웠다. 잡으려 하는데 잡을 수 없고, 그렇다고 놓을 수도 없는 상황.

“피가 마르는 심정이 이런 거구나, 했었죠.” 그때 생각이 나는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3개의 시안을 들고 뉴욕으로 날아갔습니다. 경험상 앞이 캄캄할 땐 부닥치는 게 최선이었거든요.”

돌파구가 열리는 듯했지만 최종적인 대답 “예스”가 없었다. 삼성전자에 “1주일만…”을 하다 보니 론칭 시점인 3월 초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뉴욕 시간에 맞춰 연락하고 연락을 기다리느라 날마다 새벽잠을 설치는 것도 모자라 다시 뉴욕으로 날아갔고 “우여곡절 끝에” OK 사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가장 맛있는 과일은 나뭇가지 끝에 있다는 속담을 연상시키는 5개월의 고생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접촉해 본 40여 명 중 가장 힘들었다”고 기억했다.

“만날 때마다 가슴을 졸이고 최선의 준비를 하지만 성공 확률은 10%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만큼 어려워요.”

그렇다면 10%의 ‘예스’를 얻어내기 위한 비결이 들어있다는 의미다. 그는 이를 세 가지로 추렸다.

첫 번째는 철저한 준비다. 명사 마케팅은 신뢰도가 생명이기 때문에 최근 3년간 기사와 강연은 물론 정치 성향까지 샅샅이 조사한다. 조사에만 2~3개월이 걸릴 정도다. 정보가 충실해야 정확한 전략을 수립할 수 있고 다가서기 쉽기 때문이다.

“마음 열기가 가장 힘들어요. 마음만 열면 거의 풀린 것이나 다름없죠. 별다른 비결은 없어요. 열심히 섭외 대상자를 연구하는 수밖에. 보통 일단 섭외를 한 다음 설득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섭외 자체에 모든 것이 들어있거든요. 섭외가 중요한 것은 되고 안 되는 게 첫 느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봤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겁니다. 첫 느낌이 50% 정도 좌우해요.”

사실 박 국장은 “그들과 나눌 대화 하나, 단어 하나까지 생각해 간다”면서 “그들의 평소 관심사로 시작하면 효과가 있다”고 했다.

“빔 벤더스에게 ‘이탈리아에서 사진 전시회를 했는데…’라고 하자 깜짝 놀라더군요. 디자이너인 카림 라시드는 ‘지난달 러시아에서 한 강연 내용이 ‘디자인과 민주주의’였던 것 같은데 좋았다’고 하자 바로 호의적인 반응이 왔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시간에 쫓기면 얻을 수 있는 것도 잃기 때문이다. 박 국장은 그동안 끊임없는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두 번째는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것이다.

“흔히 세계적인 거물이라고 하면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겁 먹을 필요 없어요. 8년 동안 숱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이들도 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거였죠. 특히 처음부터 당사자와 직접 부닥치는 게 좋아요. 측근들이 끼면 복잡해지거든요. 무엇보다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2006년 1월 세계적인 건축가인 장 미셸 빌모트를 섭외할 때의 일이다. 인천공항 실내조경 디자인을 담당하는 등 한국과 인연이 있어 비교적 쉽게 접촉에 성공했는데 예기치 않았던 일이 터졌다. 한 달 중 25일이 해외출장이었다. 가까운 시일에 광고를 만들 만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의미였다. 론칭까지 두 달도 채 안 남은 상황이었다. 갑자기 그의 머리에 뭔가가 스쳤다.

“그렇다면 혹시 모레까지는 안 될까요?”

배석했던 세 명의 간부들이 황당한 표정을 했다. 그런데 빌모트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해봅시다.”

박 국장은 “우리 스스로를 묶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보다 신뢰가 우선

마지막으로 박 국장이 얘기한 것은 비즈니스로만 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섭외와 협상 과정은 비즈니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비즈니스적으로만 하면 안 됩니다. 신뢰관계가 중요해요. 인간적인 신뢰를 먼저 심어주어야 합니다. 신뢰는 비즈니스가 아닌 인간적인 관계에서 나오거든요.”

장 미셸 빌모트가 등장하는 광고에는 루브르 박물관 배경 사진이 나온다. 루브르 박물관장의 허가를 얻어야 쓸 수 있는 사진이다. 하지만 빌모트가 박물관장을 직접 설득해주는 바람에 ‘공짜로’ 쓸 수 있었다.

빔 벤더스는 박 국장을 잘 봐달라고 자신의 변호사를 설득했다. 신뢰를 형성하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해야 할 내용을 A4 용지 3장에 가지런히 정리해 왔다. 그가 말한 철저한 준비를 실천하고 있었다. “그렇게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당차고 끈질긴 힘이 나오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노(NO)는 항상 준비된 답변입니다. 그들은 항상 노를 할 준비가 되어 있죠. 그렇다면 한 번 해보는 게 필요하지 않나요? 벤더스를 만났을 때 그가 그러더군요. ‘(당신은) 크리에이티브하고 인상적이다.’ 너무 기분 좋았어요. 자그마한 여자가 끈질기게 도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어렵지만 재미있습니다.”(그에게 키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추석이 지난 다음 곧바로 해외출장을 떠났다. 다시 세계를 만나러 간 것이다.



세계적인 거물에겐 이런 특징 있다


●일단 결정하면 최선 다한다.

섭외가 힘든 것은 그들이 침묵을 지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케이(OK)를 하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편안하게 도와준다. 박지영 국장을 가장 힘들게 했던 팀 버튼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장면을 골라주고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영화사 워너 브러더스 담당자에게 직접 전화까지 해주는 등 사전작업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게끔 하는 서비스 정신을 발휘했다.

“결정에는 답답할 만큼 신중하지만 일단 결정하면 최선을 다합니다. 왜 이 사람이 거물인지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말입니다. 진정한 프로페셔널이죠. 자기의 일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꼼꼼함을 넘어 세심하다.

접촉을 준비하면서 치밀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준비를 하지만 막상 만나보면 ‘괜히 거장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중의 하나가 세심함이다. 빔 벤더스는 자신의 작품을 광고의 보르도TV 화면에 넣을 때 공을 치는 소년의 행동에 나타나는 각도까지 꼼꼼하게 신경을 썼다.


●겸손하다.

“정말 인간적으로 존중해주고 겸손해요. 제가 많이 배웁니다.” 영화감독 빔 벤더스는 초대 행사장까지 가는 차편을 고민하고 있을 때 서슴없이 스태프들이 쓰는 차량에 올라탔다. 벤츠로 해야 하나, BMW로 해야 하나를 고민하는 스태프들이 미안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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