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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또 다른 고질병

프랑스의 또 다른 고질병


사회 전반에 퍼진 불신 풍조가 개혁의 걸림돌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1944년 발표한 희곡 ‘출구가 없다’에서 ‘타인이 지옥’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인들은 이 말에 확실히 공감하는 듯하다. 프랑스 경제학자 얀 알강과 피에르 캬윅은 신저 ‘불신의 사회(The Society of Distrust)’에서 프랑스인들은 다른 어느 선진국 국민보다 서로를 믿지 못한다고 썼다. 이들이 인용한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은 뇌물수수나 장물(贓物) 구입, 또는 자격 미달로 국가보조금을 수령하는 일 등을 쉽사리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또 사법부와 의회, 노조 등 권력이 막강한 기관을 불신하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프랑스인 중 ‘타인을 신뢰하는’ 사람은 전체의 21%에 불과하다. 조사 대상 26개국 중 24위다. 프랑스인들보다 더 남을 못 믿는 국민은 포르투갈과 터키 사람들뿐이다. 알강과 캬윅은 이런 불신이 고용과 개인 경제를 비롯해 삶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저서에서 “프랑스의 신뢰 결핍증이 적응과 개혁, 그리고 혁신의 능력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불신은 경쟁을 두려워하는 심리로 이어지고, 경쟁에서 보호받으려는 국민의 요구로 법은 갈수록 복잡해져 간다. 저자들은 프랑스인들이 스웨덴 사람들만큼 타인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다면(스웨덴은 조사 대상국 중 타인 신뢰 지수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현재 8%인 실업률이 3%포인트 떨어지리라고 추측했다. 또 프랑스 경제가 5% 성장하고, 각 개인의 재산이 1500유로씩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가 원래 이러지는 않았다. 알강과 캬윅은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시회복지제도의 성립이 전환점이라고 말한다. 전후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타인 경계심이 관료체제로 발전했고, 거기서 더 큰 불신이 자라났다. 프랑스는 조합주의적이고(직업과 지위 등의 평가기준에 근거해 특권이 분배된다), 국가통제적인(국가가 기업의 규제와 보상에 개입한다) 복지국가다. 어떤 일이든 성사시키려면 특혜를 주는 관료들과 불투명한 협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타인 불신은 프랑스인들의 정신에 깊이 뿌리 박혔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신의 이웃을 경계하고, 평등한 대우를 보장할 만한 법규를 선호하게 됐다. 하지만 법규가 지닌 자체적 결점 때문에 불신은 한층 더 커졌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종업원을 해고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해고 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회사들이 고용을 꺼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용주의 눈에는 모든 입사지원자가 장차 회사에 불이익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따라서 종업원 고용은 극도로 주의가 필요한 일이 됐다. 세입자 보호법 역시 이와 유사한 효과를 낸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 집세를 밀린 세입자를 내쫓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집주인들의 세입자 고르는 눈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 그렇다 보니 파리의 경우 주택 부족 현상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공실률이 10%나 된다. 불신 풍조는 막강한 노조까지 이어진다. 노조는 후한 국가보조금을 받을 뿐 아니라 연금과 보험 기금 관리로 큰돈을 벌어들이지만 재무기록을 공개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 근로자 중 노조원은 8%에 불과하지만 노조는 원하기만 하면 나라 전체를 마비시킬 만큼 힘이 막강하다. 부패 혐의가 노조의 신뢰도를 한층 더 깎아내린다. 노조 지도자들과 개혁 회담을 이끌던 야금산업 노조의 드니 고티에-소바냑 대표가 10월 들어 회담에서 물러났다. 노조 은행계좌에서 총 1700만 유로를 인출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기 시작한 후의 일이다. 그는 그 돈을 횡령하지 않았으며 ‘관계 완화’에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알강과 캬윅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프랑스인 25%가 ‘노조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다고 말했다. 이런 문화 속에서 불신을 타파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듯하다. 현재 그는 지난 5월 취임 이후 최초로 총파업에 들어간 노조와 씨름한다. 지난주 노조는 일부 공공부문 근로자들의 조기퇴직 권리 보호를 목적으로 프랑스 전역의 대중교통을 거의 마비시켰다. 하지만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조의 이런 행동은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프랑스 여론조사 기관 BVA의 갸엘 슬리망은 “프랑스인들은 늘 대규모 파업을 강력히 지지해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 이유는 사르코지 대통령이 개혁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미 불신이 가득 찬 프랑스에서 혁명으로 간주될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유권자들에게 개혁의 목표를 정확히 밝히고 그 과정이 쉽지 않으리라는 점을 시인했다. 이런 솔직한 발언이 그에게 약간의 신뢰를 얻게 해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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