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파키스탄
부족 지역에 숨어있던 이슬람 성전 전사들이 대도시까지 무대 넓혀 베나지르 부토는 그날 하루를 무사히 넘길지 걱정스러웠다. 본인으로선 8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는 기쁜 귀국의 순간이었지만 아주 위험하기도 했다. 10월 18일 목요일 두바이에서 파키스탄으로 떠나기 직전 부토는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직접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사면초가에 처한 파키스탄 독재자 무샤라프와는 느슨한 정치동맹을 결성하기로 이미 합의해 두었다. 부토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가 뉴스위크에 밝힌 바에 따르면, 부토는 그 친서에서 만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음 명단에 나오는 정부 인사들을 조사해 달라고 말했다. 파키스탄 총리를 지냈던 부토는 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몇몇 고위 보안 관계자의 이름을 적었다고 자르다리가 말했다. 부토의 파키스탄 인민당 소속인 또 다른 지지자에 따르면, 부토가 지목한 인물 중 두드러진 사람은 에자즈 샤였다. 그는 그림자 속에 숨은 파키스탄 정보국의 수장이다. 이 기관은 영국의 MI5처럼 국내 사찰을 담당한다. 부토 지지자들은 무샤라프의 오랜 측근인 샤가 이슬람주의자들의 심정적 지지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부토는 파키스탄 도착 전 “테러범들이 우리 조국을 가로채려 하며 우리는 그들을 막아야 한다”고 선언해 무슬림 급진세력에 대담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부토는 분명 이번 위협을 사전에 알았다. 18일 경찰병력 약 2만 명의 보호를 받으며 그의 차량행렬이 퍼레이드를 벌이던 도중 자살폭탄범들이 두 차례 폭발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숨진 환영인파와 경찰은 134명이고, 그 밖에 450명이 다쳤다. 부토는 폭발 몇 분 전 장갑트럭에 탔기 때문에 무사했다. 충격을 받았으나 다치지 않은 부토는 급히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무샤라프 정부는 이내 바이툴라 메수드를 사건 배후로 지목했다. 오래전부터 탈레반을 지지해 온 그는 멀리 떨어진 와지리스탄 산악지대에서 자살폭탄범 훈련소를 운영해 왔다. 메수드는 부토를 위협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부토 부부는 국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수드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자르다리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샤가 이번 사건에 개입했다는 직접적 증거는 없다. 부토는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퍼레이드 노선의 가로등들이 웬일인지 꺼져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부를 탓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지위를 남용한 특정인을 탓한다. 그는 권한을 남용했다”고 말했다. 진범이 누가 됐든 카라치 학살의 책임이 파키스탄 정부에 있다는 사실은 엄연하다. 파키스탄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이슬람주의 괴물은 지금 전국에서 제멋대로 활동한다. 원래 파키스탄 군사정보국(ISI)이 뽑아 양성한 무장 이슬람주의 단체들이었으나 나중엔 파키스탄 정부의 최대 강적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한때 자신들을 강력하게 지지했던 무샤라프도 두 차례나 암살하려 들었다. 지난 6년 동안 급진세력이 살해한 파키스탄 병사는 1000명이 넘는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요즘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는 파키스탄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 원할 만한 모든 요소를 갖췄다. 정치적 불안정, 믿을 만한 급진적 이슬람주의자 조직, 서구세계에 환멸을 느끼는 성난 젊은이들, 훈련소로 쓸 외딴 지역, 접근이 용이한 최첨단 전자기술, 서구세계로의 정기 항공노선, 늘 본래 임무를 수행하지는 않는 정보기구 등등(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는 달리 테러 용의자를 찾으러 다니는 수천 명의 미군도 없다). 게다가 점증하는 대형 핵프로그램이 있다. “세계지도를 놓고 알카에다가 핵무기를 입수할 나라를 찾으라면 바로 그들의 뒷마당”이라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동남아 과장으로 일한 바 있는 브루스 라이델이 말했다. 일반적으로 파키스탄은 불안한 핵보유국이며 테러범들이 오지의 부족지역을 지배하는 나라로 알려졌다. 거기에 더해 새롭고 더 무서운 사실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분자들이 파키스탄과 그 너머에서 일부 도시를 포함해 이 나라의 상당 지역을 성전 전사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기지로 바꿔 놓았다는 점이다. 최근 몇 달 새 8년간 집권한 무샤라프의 인기가 갈수록 떨어지면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용기를 얻었다. 2001년이 끝난 시점에서 알카에다 지도자들을 숨겨 줬던 자생 무장세력이 이제는 국경선을 따라 산개된 산악마을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이슬람주의 전사들은 카라치 같은 도시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한다. 미국과 파키스탄 정부는 그 과정을 “탈레반화”라 부른다. 파키스탄 군대는 자살폭탄과 이라크 스타일의 급조폭발물 공격에 시달릴 뿐 아니라 동포들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기도 싫어 사기가 떨어졌다. 도시에서도 성전 전사들을 제어하기 힘들어 한다. “다시 싸우러 가기 전 파키스탄에서 안전하고 편한 기분을 느낀다”고 탈레반 사령관 압둘 마자드가 최근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는 올여름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군과 교전하면서 크게 다친 뒤 긴급 치료차 카라치로 호송됐다. 호전성은 파키스탄 사회의 기본 특성으로 자리 잡았다. 위스키를 들이켜기 좋아했던 국부(國父) 모하메드 알리 진나는 독립하던 1947년 국민화합의 목적으로 이슬람을 이용했다. 그 뒤로 여러 군사 독재자가 국민을 호도하고 외교정책의 목적을 추진하는 데 성전이 편리한 도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아 울하크 장군은 파키스탄을 소련군을 상대로 싸우는 아프간 무자헤딘의 기지로 바꿨다. 그 과정에서 수십억 달러의 미국 원조를 받았다. 소련이 패배하고 1990년대에 무샤라프 같은 장군들은 그런 전사 수천 명을 카슈미르에 보내 게릴라전을 치렀다. 상당수 게릴라가 국경 너머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을 받았다. 알카에다가 탈레반의 비호 아래 세운 바로 그 훈련소였다. 9·11 이후 무샤라프는 탈레반을 비롯해 그런 집단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겠다고 미국 정부와 약속했다. 일찍이 파키스탄 도시에 거주하던 알카에다 고위 지도자들의 체포도 허가했다. 거기에는 9·11 사태의 주모자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와 알카에다 조직책 아부 주바이다가 포함됐다. 그러나 무샤라프의 노력은 늘 뭔가 미적지근했고, 많은 국민이 성전 전사들에게 품는 동정심 때문에 한계에 부닥쳤다. 파키스탄 국민은 수십 년 전부터 게릴라들은 나라의 명예와 안보를 위해 싸우는 무슬림 영웅이라고 배웠다. 그런 충성심을 마치 수도꼭지 잠그듯 꺼버릴 수 없는 노릇이다. 정부 안팎에서 무장세력의 첩보원 노릇을 했던 몇몇 거물급은 옛 동료들과 연락관계를 유지했다. 정보기관이 특정 인물들, 특히 알카에다의 외국인 전사들을 뒤쫓기는 했지만 다른 인물들에게는 조용히 잠적하라고 요구했다. 많은 관리는 심지어 일반 시민은 미래를 위한 전략무기로 성전 전사를 남겨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이 끝난 뒤 예상되는 인도와의 마찰에 대비해서다. 파키스탄이 안전한 둥지를 제공하자 아프가니스탄의 이웃에서 탈레반이 재흥하고 그들과 싸우려는 미국과 NATO의 노력이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 요즘 탈레반 전사들은 파키스탄 영내를 제멋대로 드나든다. 환자나 부상자는 파키스탄의 개인병원에서 치료 받는다. 총과 보급물자도 손쉽게 구하며, 통상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전투가 뜸해지는 겨울에는 수천 명이 파키스탄의 종교학교로 몰려가 코란을 공부한다. 일부 머리 좋은 대원은 컴퓨터 기술과 비디오 제작, 심지어 영어를 배운다. 남의 나라에 온 이 전사들은 조용히 지내기는커녕 현지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가 끝난 뒤에는 회중에게 연설하고 서구와 벌이는 전쟁을 도와 달라며 성금을 부탁한다. “파키스탄은 로켓포를 받쳐주는 당신의 어깨나 마찬가지”라고 탈레반 사령관 물라 모민 아메드가 지난 9월 아프가니스탄의 동부 가즈니 지역에서 미군 공습으로 숨지기 약 한 달 전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파키스탄이 없으면 싸움이 불가능하다. 파키스탄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탈레반 사령관 수십 명이 처자식을 파키스탄으로 옮겨 놓았다. 이들은 페샤와르나 이슬라마바드 같은 도시의 교외에서 산다. 덕분에 게릴라 전사를 추적할 목적으로 친척들을 체포한다고 알려진 아프간 당국의 영향력을 벗어났다. 물라 샤비르 아마드는 탈레반의 30인 통치협의회(일명 슈라) 위원이다. 엇비슷한 벽돌 집과 찰흙벽돌 집들이 들어선 퀘타의 한 초라한 동네로 가족을 옮겼다. 뉴스위크의 취재기자가 그 집에 들어서자 그는 그 도시의 탈레반 동조자들이 라마단 선물로 보내온 새 옷감 묶음을 보여줬다. 1년의 거의 절반을 파키스탄 영내에 머무른다. 퀘타, 카라치, 페샤와르, 부족지역을 오가면서 기부금을 걷고 새 전사를 뽑으며 다른 사령관들과 함께 작전을 짠다. 반군은 중앙 군수 체제가 없다. 대신 각 지역 사령관이 각자 조직을 다스린다. 키 크고 약간 살진 30대 중반의 딘 모하마드는 남부 헬만드 지역의 굴 아그하 장군 휘하에서 싸우는 전사들의 보급을 담당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걷은 성금과 자신이 직접 조성한 기금으로 탈레반 전사들의 신발과 방한복, 무전기, 위성전화, 심지어는 무기, 폭발물, 원격조종장치를 구입한다. 위험물이 아닌 물품은 트럭에 실어 내놓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낸다. 위험물은 옷이나 식량을 보낼 때 속에 숨기거나, 고향으로 떠나는 아프간 난민들의 짐에 숨겨 보낸다. 일부 탈레반 사령관은 직접 쇼핑하러 나선다. 10월 초 탈레반 사령관 물라 레마트는 페샤와르의 유스호스텔에 머물면서 데라아담켈 마을의 총포 장인이 750달러짜리 저격용 소총을 완성하기를 기다렸다. 2002년과는 크게 대조된다. 당시에는 무샤라프의 1차 급진세력 소탕작전이 한창이었다. 뉴스위크 기자는 탈레반 정권의 국방부 고위관리로 일한 아그하 잔을 퀘타 인근의 과수원에서 만났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잔은 잡힐까 봐 이틀마다 숙소를 바꾸고 일부 촌민이 다가오면 도망쳤다고 말했다. 이제 잔은 퀘타의 집이 있다. 탈레반 전사들과 함께 국경선 너머 고향 자불 지역에서 싸우지 않을 때는 그 집에 와서 산다. 역사적인 카이버 고개와 아프간 국경에서 동쪽으로 80㎞쯤 떨어진 전략적으로 중요한 파키스탄의 국경도시 페샤와르의 기자들은 요즘 파키스탄에 넘어온 탈레반 사령관들이 전화를 걸어오는 일이 잦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자는 제의 아니면 싼 호텔이나 좋은 식당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는 문의, 혹은 새 이동전화를 어디서 파느냐고 묻는단다. 지난 8월 뉴스위크 기자는 탈레반 고위층의 대변인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페샤와르의 인기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나 함께 하자는 초대였다. 기자는 이미 그곳에 있노라고 대답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몇 테이블 떨어진 곳에서 전사들이 미소 지었다. 함께 바비큐를 먹는 동안 대변인은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되살아났다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파키스탄 도시와 변경 부족지대에서 활동하기가 매우 편하다고 말했다. “무샤라프의 최대 약점은 특히 도시 지역에서 탈레반을 제압하지 못한 점”이라고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국제위기감시기구(ICG)의 동남아 과장 사미나 아메드가 말했다. “두뇌급, 특히 작전을 짜는 자들은 오지나 두메산골에 있지 않고 퀘타 같은 도시에 있다. 그가 그들을 잡을 수 있을까? 손쉬운 일이다.” 탈레반 전사들은 파키스탄 국민을 적대시하지 않으려 조심한다고 말했다. 파키스탄 군대를 겨냥한 공격은 주로 파키스탄 부족들이 저지르며 때로는 알카에다 대원들이 지원했다. 그러나 큰 차이는 없다. “탈레반이 국경 너머 파키스탄에서 얻는 지원을 빼앗아 버리면 미국, NATO, 아프간 정부군이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탈레반과 맞서기가 훨씬 쉬워진다”고 아메드가 말했다. 각 단체마다 추구하는 목표는 다르지만 본능적으로 미국과, 무샤라프가 포함된 지역동맹을 증오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탈레반은 또 부족지역의 알카에다 지도자들과 긴밀히 협조해 공격을 함께 구상하고 역량을 합친다. 파키스탄 군대가 와지리스탄 남부에서 큰 피해를 보자 무샤라프는 2005년 부족지역의 메수드 일당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 뒤로 탈레반 세력이 걷잡을 수 없게 불어났다. 무샤라프는 2006년에도 와지리스탄 북부의 부족 전사들과 그 비슷한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부족 원로들과 맺은 조약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됐다. 그러나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리다. 협정은 무장세력 지도자와 직접 맺어졌거나 그들의 대리인, 또는 겁에 질려 시키는 대로 하는 부족 원로들의 중계로 이루어졌다. 협정은 애초부터 무용지물이었다. 무장세력은 아프간 국경선으로 무기와 전사를 이동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 파키스탄 군이 공격작전을 중지하고 검문소를 해체하는 동안 무장세력은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재결집해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침투하도록 거들었다. 그 세력들이 힘을 합치면서 아프간 성전의 본거지를 파키스탄으로 옮겼다. 그들은 부족민의 낡은 진흙벽 요새 안에서 반군 신병과 자폭범을 훈련시켰다. 일부 졸업생은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탈레반과 나란히 싸웠다. 다른 졸업생은 파키스탄 육군과 싸우려고 부족지역에 머물고, 또 일부는 카라치 같은 곳의 목표물 공격에 투입됐다. 영국에서 적발된 몇몇 테러 음모의 뿌리를 캐보니 부족지역까지 연결됐다. 이제는 파키스탄 정부가 공격의 주요 대상이 됐다. 지난 7월에는 위협의 수준이 심각해졌다. 이슬라마바드의 붉은 사원에서 일주일 동안 벌어진 정부군과 무장세력 간의 교전에서 100명 이상의 전사가 숨졌다. 복수에 나선 부족민 자폭범들이 경비가 삼엄한 수도의 군부대, 라왈핀디의 육군본부와 기타 장소에 침입하는 데 성공해 수십 명의 희생자가 났다. 당국은 양측의 대결이 벌어지기 전까지 붉은 사원이 도시와 부족지역을 왕래하는 전사 수백 명의 중간역 겸 탄약창고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붉은 사원은 10월 3일 다시 문을 열었다. 설교자들은 무샤라프가 서구세계와 한편이라고 또다시 비난했다. 귀국을 앞둔 부토에게 비슷한 메시지가 전달됐다. 지난주 하지 무하마드 오마르라는 무장단체 사령관은 와지리스탄 남부 부족지역에서 위성전화를 이용해 부토를 미국 정부의 앞잡이로 불렀다. “그는 자신이 원해서 오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이 무자헤딘과 싸우라고 보냈다.” 무장세력은 부족지역 너머의 지역도 지배한다. 무장단체들은 경치가 좋은 스와트 계곡 같은 곳을 점령했다. 스와트 계곡에서 물라 파즈룰라라는 성전 지도자는 흑마를 타고 수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다. 바로 코앞에 있는 파키스탄 육군 사단은 막사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 탈레반과 기타 이슬람주의자들에게는 페샤와르가 가장 중요한 생산·보급 기지다. 성전 CD와 DVD를 파는 가게가 지천에 널렸다. 한 구멍가게에선 올해 초 헬만드에서 숨진 악명 높은 탈레반 사령관 물라 다둘라 아크훈드의 대형 포스터와,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관타나모 수용소 포로들이 철조망 안에 갇힌 사진을 팔았다. 한편 페샤와르 인근의 아프간 난민촌은 방대한 성전운동 신전으로 변해 간다. 각기 아프간 난민 10만 명 정도가 있는 잘로자이 수용소와 샴샤투 수용소는 소련과 전쟁하던 시절 세워졌다. 아프간 정부의 항의에 따라 파키스탄 정부와 유엔 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는 잘로자이 수용소를 비우는 긴 절차에 착수했다. 내년 봄이나 돼야 끝날 일이다. 담장이 높은 이 수용소 안에는 이미 텅 빈 숙소가 많다. 그러나 수용소를 떠난 잘로자이 난민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페샤와르나 인근 마을에 자리잡는다. 따라서 탈레반의 활동영역만 넓어지게 된다. 올해 초에는 잘로자이에서 한 현지인 성직자가 체포됐다. 파키스탄 전사 세 명이 그의 집에서 폭탄을 제조하다가 오발로 폭사하는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페샤와르 남쪽에 있는 샴샤투 수용소는 악명 높은 아프간 군벌 굴부딘 헤크마티야르의 개인 봉토나 다름없다. 그가 지휘하는 게릴라 히즈비이슬라미(이슬람당)는 주로 아프가니스탄의 쿠나르 지방을 무대로 활동하지만 샴샤투가 권력기반이며 이곳은 사실상 파키스탄에 있는 자치구다. 잘로자이와 마찬가지로 샴샤투 역시 높은 진흙 담장에 둘러싸여 미로처럼 뻗어가는 아프간의 찰흙벽돌 집 마을을 닮았으며, 탈레반 스타일의 엄격한 이슬람법으로 다스린다. 음악은 듣지 못하게 돼 있다. 심지어 휴대전화 벨소리도 금지다. 담배 역시 금지다. 남자 친척이 동반하지 않는 한 여성의 외출은 허가되지 않는다(그러나 여학교는 있다. 탈레반 동맹들과 달리 헤크마티야르는 여성의 교육을 신봉한다). 샴샤투에는 수용소 주민조차 접근하지 못하는 보안구역이 있다. 수용소 난민들은 그 제한구역에 헤크마티야르의 사설 감옥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수용소의 한 여인이 혼자서 쇼핑을 나가려 했다. 그가 작은 전자제품 가게에 들어가자 무장한 남성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상점 주인에게 가게를 닫게 하고 여성을 가둔 뒤 남편에게 전화했다. “당신이 죽이지 않겠다면 우리가 하겠다”고 말하고는 여자를 놓아주면서 다시 한 번 혼자서 외출하다 걸리면 죽이겠다고 경고했다. 그런 다음 가게 물품을 압수하고 주인을 수용소에서 내쫓았다. 무샤라프는 성전 운동의 확산을 막으려고 군이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파키스탄 대통령은 꼭 필요한 때는 성과를 거둘 능력이 있음을 보여줬다. 지난 2월 하순 무샤라프가 이슬람주의자들과 벌이는 싸움을 독려하려고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이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하기 전, 파키스탄 군사정보국의 퀘타 분실 요원들은 갑자기 물라 오바이둘라 아크훈드를 체포했다. 탈레반 정권의 국방장관이자 물라 오마르의 핵심 측근이었던 그는 그때까지 파키스탄이 잡은 탈레반 관리 중 최고위직이었다. 두 달 전에는 파키스탄이 또 다른 탈레반 지도자 물라 아크타르 모하마드 오스마니가 퀘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중이라는 정보를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에 넘겼다고 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의 공습으로 즉시 살해됐다. 그러나 이상은 예외적인 경우다. 미국 관리들은 무샤라프 정부가 여전히 핵무기 프로그램을 엄격히 통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급진파가 파괴를 목적으로 굳이 핵무기를 통째로 훔쳐낼 필요는 없다. 파키스탄은 어떤 핵물질을 보유했는지 공개한 적이 없다. 지난해 파키스탄 원자력기구는 국민에게 방사능 물질과 그 기호를 인식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로써 혹시 핵분열물질을 도둑맞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커지자 광고는 이내 사라졌다. 콰이드이아잠 대학(이슬라마바드)의 저명한 핵물리학자 페르베즈 후드보이는 파키스탄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했으며 현 재고가 얼마나 되는지 외부 전문가가 알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그것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물질이 새어 나갔을 개연성도 있다는 뜻이다. 여기저기 조금씩. 그러나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워싱턴에서 대테러 업무에 종사하는 고위 관리들은 미국 정보기관들은 이슬람주의자들이 파키스탄에서 핵물질, 장비, 노하우를 획득할 가능성을 늘 걱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9·11 이후 파키스탄의 망나니 핵과학자들이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난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는 사안의 민감성을 감안해 익명을 전제로 “그런 과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매우 면밀히 관찰한다”고 말했다. 파키스탄 당국이 탈레반에 특별대우를 해 준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파키스탄의 정보 관리와 군 관계자들은 1980년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후 탈레반 고위 지도층과 돈독한 개인관계를 유지해 왔다. 서구 군 관계자나 외교 관계자들은 파키스탄이 여전히 아프간 반군을 적극적으로 돕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그들을 말리려고 애쓰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헛된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서구 군사 관계자가 익명을 요구하며 말했다. “파키스탄 정부 인사들은 탈레반과 접촉을 유지한다. 그들을 돕지는 않을망정 타도하지도 않는다.” 한 서구 외교관은 정부 입장을 대변할 권리가 없기에 비보도를 전제로 말했다. “과거 탈레반을 상대했으며 지금도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전·현직 정보 관리가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이 오랜 세월 다져진 개인관계의 위력이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싹둑 자르지는 못한다.” 탈레반의 전쟁은 지금은 없어진 물라 오마르의 탈레반 정부에 몸담았던 “은퇴한” 전직 관리 수십 명의 도움도 크게 받는다. 그들은 현재 파키스탄에 거주하며 일부는 파키스탄 주민등록증을 지녔다. 탈레반은 ISI(그들은 이 기관을 ‘검은 뱀’이라 부른다)가 자신들에 관해 모르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역 사령관 물라 샤비르 아마드는 1년의 절반 이상을 파키스탄에서 보낸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우리가 점심이나 저녁으로 무엇을 먹는지 잘 안다”고 말했다. 지난 9월 숨지기 직전 퀘타의 가족을 찾아본 물라 모민 아메드도 그 말에 동의했다. “파키스탄은 우리를 속속들이 알지만 우리를 못 본 체하는 듯하다.” 파키스탄 군 대변인 와히드 아르샤드 소장은 파키스탄군이 체포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한 탈레반 대원이 1500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당수가 어떻게든 돌아온다.” 지금까지 대다수 파키스탄 국민은 주변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성전 전사들의 위협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샤라프 본인은 다른 문제에 정신이 팔린 듯하다. “그는 국경선 양쪽에서 벌어지는 저항운동의 위험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방법으로 국민을 이끌고 그 위협에 대처할지도 잘 모른다”고 퇴역장군인 탈라트 마수드 중장이 말했다. “그는 오로지 영구 집권만 생각한다.” 마수드와 기타 관측통들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민에게 성전 전사들과의 싸움이 무샤라프와 미국의 문제이지 국민의 문제는 아니라는 안이한 인식을 심어줬다. “가장 큰 위험은 고위 정치인을 비롯해 모든 파키스탄 국민이 이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니며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라고 마수드가 말했다. “탈레반이 도시에 모습을 드러내도 그냥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군사정권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자 하는 파키스탄 국민은 없다. 문제는 이 나라의 온건한 대안도 그 못지않게 인기가 없다는 점이다. 무샤라프는 야당이 대체로 불참한 지난 10월 6일 선거인단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 3기 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최근 국제공화연구소(IRI)가 실시한 전국적 여론조사에서는 고작 21%의 지지만을 얻었다. 부토 역시 28%라는 딱한 지지율로 약간 더 나았을 뿐이다. 많은 파키스탄 국민은 부토가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는 대가로 무샤라프와 연정을 꾸리기로 합의하자 아연 실색했다. 물론 이번 조사는 지난주 테러 발생 전에 실시됐다. 파키스탄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낸 테러 공격이 일어난 지금 국민은 또다시 한마음으로 뭉쳐 부토를 지지할지도 모른다. 부토의 남편은 테러 직후 뉴스위크와의 전화통화에서 부토는 “차분하다”면서 “전혀 흔들림이 없다”고 말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인질로 잡히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 소수의 이슬람주의자는 더 이상 소수가 아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전쟁을 준비해 왔다. With MARK HOSENBALL in Washington, ZAHID HUSSAIN in Islamabad and staff re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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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 美신경외과학회서 뇌 수술용 의료로봇 ‘지니언트 크래니얼’ 첫 공개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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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리 "혹시 누가 해코지할까 봐…" 무슨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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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또 물러섰다…車관세 완화 어떻게 달라지나[Q&A]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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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인]SK실트론, PEF들 눈치싸움…국적·업황 리스크에 '셈법 복잡'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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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닥 상승 이끈 비만 테마주의 힘…천당·지옥 오간 오름[바이오맥짚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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