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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업계의 돈키호테” 김기문 로만손 회장

“시계업계의 돈키호테” 김기문 로만손 회장

▶ <김기문 회장은…>
1955년 충북 괴산 生, 청주농고 졸업·충북대 축산학과 중퇴·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82~87년 솔로몬시계 과장~영업이사, 88년 로만손 창업, 98년 한국시계공업협동조합 이사장, 2000년 중소기업청 선정 신지식인, 2004년 개성공단기업협의회 회장, 전경련 선정 제1회 존경받는 기업, 기업인 대상 수상, 2007년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2차 남북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10월 2일 군사분계선을 넘은 노무현 대통령 내외는 로만손 시계를 차고 있었다. 남북경협의 상징으로 통하는 개성공단에서 만든 것이다. 로만손 시계는 9세트 더 준비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해 북측 관계자들에게 선물로 전해졌다. 로만손은 한반도에서만 이름난 토종 브랜드가 아니다. 세계 70개국에 수출돼 시시각각 지구촌 시간을 움직인다.
서울에서 땅 길로 갈 수 있는 개성공단은 도라산에 있는 남측 출입사무소(CIQ)에서 자동차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다. 남측 CIQ를 지나 북측 CIQ 앞에 이르면 낯익은 브랜드의 시계탑이 보인다. 바로 로만손(ROMANSON) 시계다. 이곳을 오가는 하루 평균 400여 명의 인원과 250여 대의 차량에 남과 북의 같은 시간을 알려준다.

시계탑을 지나칠 때마다 김기문(52) 로만손 대표의 느낌은 남 다르다. 개성공단기업협의회 회장이자 중소기업중앙회장인 그는 정상회담 특별 수행원으로 평양을 다녀온 뒤 일주일 만인 11일 북측에 수해 구호물품을 전달하기 위해 개성에 다녀왔다.

“남북경협은 어느 한 쪽이 요구하고 다른 쪽이 혜택을 준다는 식의 퍼주기 논란을 벗어나 남북이 함께 상생하는 모델로 가야지요. 북한의 토지와 노동력, 남한의 자본과 기술을 결합하는 생산적인 경협 말입니다.”

2005년 8월 개성공단에 협동화공장을 지어 생산을 시작한 로만손도 초기에는 고충이 많았다. 인프라와 배후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허허벌판에 공장을 지어 돌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근로자들도 인건비가 싸고 교육 수준이 높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좋은 상품을 제때 만들어내야 한다는 이른바 ‘경제 마인드’가 부족했다.

“같은 민족이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들어갔는데 그게 그렇지 않더라고요. 60년을 다른 체제에서 살아서 그런지 말부터 다른 게 있더라고요. 사고방식은 차이가 더 컸고요. 솔직히 1년 넘게 사업을 계속해야 할지, 그만 둬야 할지 고민하면서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어요. 그 난관을 직원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하며 하나하나 노하우를 교육하면서 극복해냈습니다.”

한때 해외 유명 브랜드의 부품 생산기지로 이름을 날리던 국내 시계산업도 싼 제품은 중국에 밀리고, 고급 제품은 유럽 브랜드에 치이는 샌드위치 신세가 됐다. 로만손이 개성공단에 입주한 것은 그냥 있으면 한국 시계업계 인프라가 망가질 것 같아서였다.

로만손이 먼저 165억원을 내놓고 시계공업협동조합 회원인 8개 협력업체를 설득해 함께 개성으로 갔다. 사업이란 게 남보다 앞서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들어야 이익을 낸다(High Risk, High Return)지만 초기 장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제품 아닌 상품을 만들어라


“북측 근로자들은 제품은 알아도 상품은 잘 모르더라고요. 어떻게든 물건만 만들어내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이에요. (다른 회사와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상품의 중요성을 모릅디다. 육안으론 안 보이지만 현미경으로 확인해 시계 자판에 작은 티가 있는 것을 발견해 폐기 처리했더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쓰는 데 지장 없는데 왜 그러느냐는 겁니다. 시계는 바늘이 돌아가고 시간 잘 맞으면 되지 그 작은 티가 무슨 문제냐는 식이었어요.”

납기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치는 데도 한참 걸렸다. 언제든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근로자들에게 수출품과 남한에서 판매할 것을 구분해 납품 시기를 맞춰야 한다는 점을 교육했다. 크리스마스 특수에 맞춰 미국에 수출하려면 적어도 10월까지 상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제품이 아닌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납기 준수는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다’, ‘품질은 상품의 필수조건’이란 점 등을 학습하는 데 2년 가까이 걸렸다.

김 회장은 현 단계의 개성공단 사업에 80~90점의 후한 점수를 줬다. 로만손 협동화공장 내 9개사에서 1,080명의 북측 근로자가 월 5만 개씩 시계를 만든다. 올해까지 연평균 생산량 100만 개 중 60%를 이곳에서 생산할 계획이다.

“이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지금 성공의 싹을 키워가는 과정입니다. 직원들이 달라졌어요. 제품이 아닌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수준에 거의 접근했습니다. 납기 이전에 만드는 것은 물론 시간외 근무도 서슴지 않아요.”

그는 2005년 개성공단 입주 기념으로 3만 세트 한정본 통일시계를 만들었다. 남북이 힘을 합쳐 만든 첫 작품이란 점을 기리기 위해 판매에 따른 이익금은 전부 북한 소학교에 벽시계를 기증하는 데 썼다.

2차 남북 정상회담 때 노무현 대통령이 찬 시계 모델은 TM7238. 원래 대부분 해외 수출용인데 정상회담 이후 사겠다는 문의가 많아 국내에서도 팔기로 했다. 99년 코스닥에 상장한 로만손은 남북경협 수혜주로 통한다.


‘3통’ 풀린다…남북 신경협 시대로


▶개성공단 내 로만손 협동화공장 시계 조립라인을 돌아보는 김기문 회장.

개성공단의 1단계 사업으로 그동안 세 차례 분양을 통해 입주가 결정된 남측 기업은 220개. 하지만 아직까진 26개 업체가 들어와 공장을 가동 중이다. 그나마 이들 업체도 이른바 ‘3통(통행·통신·통관) 문제’로 적지 않은 불만을 토로해왔다. 공장을 24시간 돌려야 하는데 오전 8시 출근(군사분계선 통과), 오후 5시에 퇴근해야 한다.

전화와 팩스는 가능한데 인터넷과 휴대전화는 못 쓴다. 무관세라지만 3일 전 미리 신고해야 화물 통관이 가능하다. 일각에선 3통에 송금 문제를 덧붙인 ‘4통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 전력과 용수 등 부족한 인프라 문제도 거론된다.

“3통 문제 해소가 남북정상 선언문에 들어간 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방북 첫날 저녁 자리에서 만난 북측 고위 인사들도 3통 문제 등 개성공단 실정을 잘 알고 있었어요. 이번 합의로 연중 무휴 상시 통행이 가능해지는 등 조금씩 진전이 있겠지요.”

10·4 공동선언에 포함된 개성~문산 간 화물열차 정기 운행, 2단계 사업 조기 착수는 현재 봉제·신발·가방 등 노동집약형 산업 중심인 개성공단을 합성수지·원사 등 재료형 산업과 기계·전기·전자 등 부품산업 중심으로 변화시킬 전망이다. 김기문 회장은 해주경제특구와 안변·남포 조선협력단지 등 제2·3의 개성공단 조성 계획에 적극 찬성했다.

“몇몇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은 개성공단의 내실화가 먼저라고 하는데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비슷한 공단이 여기저기 만들어지는 게 좋아요. 그래야 중소기업·대기업, 경공업·중공업 가리지 않고 업종과 특성에 맞춰 복합적인 투자가 가능하고 남북경협의 비중이 커져 북측에서 먼저 기업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해 주려고 할 테니까요. 10·4 공동선언을 계기로 남북한이 신경협의 시대로 달려가길 기대합니다.”


PX병 시절 진열순서 바꿔 판매 1등


김 회장의 사업가적 기질은 군대 시절부터 발휘됐다. 논산훈련소 PX병으로 근무했는데 훈련병들이 먹는 모습을 관찰하니 바로 답이 나왔다. 각개전투 훈련을 받을 때는 배가 금방 꺼지니까 빵을 찾고, 힘이 덜 드는 제식훈련 때는 과자, 날씨가 더운 날은 아이스크림과 음료수가 잘 나갔다.

김기문 PX병은 훈련일정을 미리 파악해 물품판매대 진열을 매번 바꿨다. 훈련소 내 30개 PX 중 늘 매출 1위를 기록했다. 일찍이 사람 심리를 들여다보는 것을 터득한 것이다.

“기본적인 상술인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어요. 훈련병들을 상대로 하는 장사이니만큼 짧은 자유 시간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물건을 파느냐에 따라 매출에 차이가 날 수밖에요. 덕분에 포상휴가도 몇 차례 갔지요.”

충청북도 산골에서 태어난 그는 목장주가 꿈이었다. 그래서 부모의 반대에도 청주농고에 진학했고, 대학도 축산학과(충북대)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대학을 중퇴한 뒤 병석에 계신 어머니 치료비와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중동으로 날아갔다.

미리 공부한 영어 덕분에 독일계 회사에서 건설현장을 점검하는 안전관으로 일했다. 이 시절의 경험이 그를 세계를 무대로 뛰게 한 원동력이 됐다.

그가 시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 솔로몬시계에 창업 멤버로 입사하면서다. 과장에서 이사로 승진하며 잘 나갔다. 그런데 영화 제작자였던 숙부를 돕기 위해 집 담보 보증을 서준 게 문제가 됐다. 결국 집을 날리고 회사도 그만뒀다. 자살을 결심하고 산에 들어갔다가 아내와 두 딸을 생각하곤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돈은 모두 날렸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을 얻었습니다. 솔로몬에 있을 때 알고 지낸 거래처 사장 세 분이 5,000만원을 모아 건네며 다시 시작하라고 격려해주더군요. 지금도 사람이 가장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돈을 종자돈으로 88년 4월 시계공장을 차렸다. 직원이래야 딱 6명. 설립 초기 다른 중소업체와 마찬가지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물건을 만들었다. 그런데 유일한 납품처였던 일본 업체가 갑자기 채산성을 이유로 수입선을 홍콩 업체로 바꿨다. 이때 김 대표는 “하나를 만들어도 내 브랜드로 하자”고 결심했다.

80년대 말 시계산업은 세계적으로 호황이었다. 하지만 국내 시장은 삼성시계와 오리엔트, 아남시계, 한독시계가 사분(四分)하고 있어 갓 창업한 작은 기업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주변에선 그를 ‘시계업계의 돈키호테’로 부르며 무모한 도전으로 치부했다.

“브랜드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해외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세계 어디든 시계 전시회가 열리면 달려가서 샘플을 전시했습니다. 007 가방에는 시계가 몇 개 안 들어가잖아요. 큰 트렁크 백을 두 개씩 메고 다녔어요. 가방 하나에 시계 500개씩 넣고 말이죠.”



시계 가방 들고 다니다 오른팔 길어져


그러다가 한번은 사우디아라비아 세관에서 밀수꾼 취급을 받았다. 그 많은 시계를 보고 세일즈 상담이 아니라 여기서 다 팔고 가려는 것 아니냐며 의심했다. 거래내역서와 초청장을 보여주며 견본품임을 설득해 몸은 간신히 풀려났지만 시계는 전부 압수당했다.

이 사건 뒤에도 그는 변함 없이 샘플을 들고 다녔다. ‘이게 장사꾼의 기본 자세’라고 각오를 다지면서. 말이 시계 샘플 500개지 무게로는 30~40kg이다. 그의 표현대로 ‘무식하게’ 많이 들고 다닌 끝에 오른팔이 왼팔보다 엄지 손가락 한 마디만큼 길어졌다.

그는 이를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여긴다. 스스로 ‘현장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평하는 그는 1년 중 절반은 해외를 돌아다니며 일한다. 지금까지 가본 나라가 60여 개국이고, 대한항공 마일리지만 170만 마일에 이른다고.

“정말 일하는 기쁨에 30?0대를 보냈어요. 일요일에도 대부분 회사에 나가 혼자 밀린 일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에겐 항상 미안했죠.”

김 대표는 일찍이 ‘레드오션(국내 시장)’을 피해 ‘블루오션(해외 시장)’을 개척한 장사꾼이다. 하지만 해외 시장이 부지런히 다니기만 한다고 뚫릴 리 없다. 관건은 어떤 상품을 바이어들 앞에 내놓느냐였다.

고가 시장은 스위스와 일본 제품이, 중저가 시장은 홍콩·대만 시계가 틀어쥐고 있었다. 전자손목 시계 등 값 싸고 시간 잘 맞는 제품이 대중화하면서 시계는 점점 애장품 대열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블루오션은 자기 하기 나름


며칠을 고민한 끝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몸에 걸치는 물건은 단순히 기능만 따지는 게 아니라 장식적 측면을 중요하게 여길 거라는 생각이었다. 즉각 아이디어를 구체화했다. 시계 유리면을 보석처럼 입체적으로 가공했다. 값싼 유리를 이용해 보석 이미지를 내면 통할 것이라고 믿으며.

세계 최초의 커팅 글라스 제품은 이렇게 탄생했다. 90년 첫 제품을 만들어 두바이로 날아갔다. 대단한 인기였다. 주문이 밀렸다. 선금을 내는 바이어도 있었다. 89년 10억원이었던 매출이 1년 만에 세 배로 뛰었다. 처음 하나에 15달러 받던 것을 1년 뒤 25달러로 올렸다.

“한동안 로만손의 성공 비결을 묻는 사람이 많았어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정말 밤잠 안 자고 열심히 일했어요. 남들보다 앞서려면 잠을 덜 자든지, 머리가 좋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들과 똑같이 놀고 먹고 자면서 뭘 기대합니까?”

그러나 시장은 영원하지 않다. 90년 8월에 터진 걸프전이 장기화하면서 수출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중동지역 수출 비중이 컸던 터라 더욱 문제였다. 게다가 홍콩 등지에선 로만손을 카피한 짝퉁이 3분의 1 가격에 팔렸다.

“하나의 시장, 하나의 제품으론 리스크가 커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절감했지요. 왜 영리한 여우는 굴을 여러 개 파 놓는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그때부터 시장을 다변화했습니다. 러시아와 아시아, 유럽, 미주, 아프리카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의 제품을 내놓았고요. 그 결과 지금 세계 70개국에 연간 40여만 개의 시계를 수출합니다. 매해 200여 종의 신상품을 내놓고….”

로만손이란 이름은 시계 원산지로 알려진 스위스 마을 로만시온에서 따온 것이다. 로만손이 명품으로 인정받기 이전에는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런데 세계 최대 보석 시계 박람회인 스위스 바젤 월드 전시회의 명품관에 독립 부스를 만들어 들어갈 만큼 유명해지자 2002년 뒤늦게 스위스시계협회장이 ‘스위스의 이름을 도둑맞았다’면서 김 회장에게 아는 체를 해왔다고.

브랜드 명성을 지키고 세계 1등으로 가려면 연구개발은 필수다. 로만손은 지난해 12월 동서울대 시계주얼리학과와 산학협력 관계를 맺어 동서울대에 ‘로만손 시계·주얼리 연구원’을 열었다. 여기선 국내 시계 업계 처음으로 한국산 기계식 무브먼트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로만손은 손목시계 산업의 핵심기술인 무브먼트 기본형 개발을 2009년 안에 마무리할 계획이다.

“한국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매운 기술은 경쟁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디자인과 독창성을 더하면 시계산업을 영원한 블루오션으로 만들 수 있지요.”


글로벌 토털 패션 기업으로 간다


‘시계 명가’ 로만손은 이제 손목시계 회사가 아닌 글로벌 토털 패션 기업을 지향한다. 그 첫걸음으로 2003년 주얼리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미 국내에선 주얼리 브랜드 제이에스티나(J. ESTINA)의 매출이 시계를 앞질렀다. 지난해 454억원의 매출을 올린 로만손의 올해 매출 목표는 600억원이다.

로만손은 신변 장신구로 점차 사업영역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내년 중 제이에스티나 브랜드로 핸드백과 구두를 내놓기 위해 명함지갑 등 소품으로 시장을 탐색 중이다. 여성용 고급 속옷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제이에스티나의 브랜드 전략은 ‘이야기가 있는 마케팅’이다. 제이에스티나는 이탈리아 공주로 불가리아 왕비가 된 조반나 공주가 모델이다.

“조반나 공주가 지금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까 하는 궁금증이 브랜드 전략입니다. 공주가 되고 싶어하는 현대 젊은 여성들의 꿈을 주얼리로 실현시켜 주는 거죠. 그 다음 왕비가 되어선 어떨까 하는 식으로 계속 상품을 개발해가는 것입니다.”

먼저 티아라(공주가 쓰는 왕관 형태의 머리 장식갩iara)를 브랜드 심벌로 삼았다. 2004년 공주의 애완동물 고양이 ‘제나’를 선보였다. 여기까진 공주용 주얼리다. 은이나 14K 금이 주 재료이고 가격은 18만~20만원대다. 조반나 공주가 시집을 가 왕비가 된다. 그 이름이 이에스돈나(E.S.donna)다.

지난해 8월 이에스돈나 브랜드로 고급 주얼리를 내놓았다. 다이아몬드나 백금, 천연 보석, 18K 이상 금이 주 재료로 평균 가격도 400만원대다. 제이에스티나 고객이 나이가 들면서 이에스돈나 고객이 되도록 하자는 전략이다.

제이에스티나는 상하이(上海)·나리타(成田)·뉴욕·런던·인천 등 세계 주요 국제공항 면세점에 들어가 있다. 내년 초 제이에스티나 본사를 패션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옮기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회사 전체가 옮기는 것은 아니고 국내법인은 제이에스티나 코리아로 남긴다.

이미 모스크바·베이징(北京)·도쿄(東京)·하노이 등에 진출한 매장을 더욱 늘려 전 세계에 200개 매장을 열 계획이다. 이런 사업계획이 순조롭게 이뤄지면 2015년 매출 3,000억원에 영업이익 400억원을 달성하게 된다.

올 3월 중소기업중앙회장으로 취임한 김기문 대표는 개성공단기업협의회 등 두 단체 일에 너무 바빠 회사 경영은 동생 김기석 사장에게 맡겼다. “맡긴 이상 책임과 권한을 줘 알아서 하도록 한다”는 김 회장은 한 달에 한 차례 중요한 것만 보고 받고 함께 방향을 잡는다고.

“기업도 생명체에요. 사람 몸 어느 한 쪽에 이상이 있으면 전체 건강을 해치듯 기업은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사람을 잘못 쓰면 조직이 망가지고 결국 기업 성장이 멈춥니다. 재무구조에 문제가 생기면 부도에 이르게 되고…. 톱니바퀴가 돌아가는데 작은 이 하나가 빠지면 삐걱대다가 결국 망가지고 말아요. 기업이 잘 되려면 골고루 잘 갖춰야 해요. 그 중에서도 역시 사람, 사람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평생직장 개념이 없어진 것 같은데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죽기살기로 열심히 하다 보면 개인과 조직이 모두 발전하는 것 아니겠어요.”

김 회장은 요즘 주변에서 정치에 뜻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가끔 듣는다. 기업보다 외부 단체 일을 많이 해서인가? 어떤 일이든 맡으면 몰입해서 하기 때문인가?

“외부 시선 의식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그는 향후 정치참여 의사를 묻자 “주변에서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 아직은 없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로만손 대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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