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 마라톤 그리고 자선
투몬만의 여명도 곤히 잠자던 새벽 4시30분. 호텔 로비에 운동복 차림의 세계 각국 남녀노소가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운동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인데다 비까지 세차게 몰아쳤다. 하지만 PIC 괌 (Pacific Islands Club Guam) 국제 단축마라톤 대회에 뛰려고 모인 사람들에게선 가벼운 흥분이 느껴졌다. 2007년 중앙 마라톤 여자부 풀코스 마스터스 우승자인 이정숙(42)씨는 “새벽 대회는 처음인데다 여행지에서 마라톤까지 뛴다니 이색적인 체험”이라며 폭우와 어둠을 가로질러 출발선으로 향했다. 세 살짜리 아들과 뛰는 일본의 신세대 부부, 곤히 잠든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벨트로 허리에 묶고 달리는 미국 아주머니, 손을 잡고 걷는지 뛰는지 함께해서 마냥 즐거운 백발의 노부부도 보였다. 여행에도 유행이 있다. 가이드의 손짓을 따라 이왕이면 많은 여행지를 돌며 사진을 ‘찍는 여행’,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배낭을 친구 삼아 인적이 드문 오지를 찾아다니던 ‘나홀로 여행’,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지역을 찾는 ‘봉사 여행’, 현지 주민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만들고 자아를 찾는 ‘깨달음 여행’…. 여행객들의 발 맛과 눈 맛, 입맛을 맞추려 여행업계는 아이디어 상품을 경쟁적으로 만들어낸다. 요즘은 휴가 성수기를 피해 편의시설과 놀이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고급 클럽 리조트에서 푹 쉬면서 현지 문화를 체험하거나 취미를 세계인과 함께 나누는 행사에 참여하는 ‘이벤트 여행’이 인기다. 또 행사에서 얻은 수익금을 현지 사회에 기부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11월 11일 진행된 PIC 괌 국제 단축마라톤 대회는 올해로 16회째다. 우리나라 선수 100여 명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1000여 명이 참가했으며 5km, 10km, 하프 코스 세 가지 레이스로 진행되었다. 거제도만한 크기의 섬이라 길게 뻗은 대로보다는 골목을 돌거나 주지사 관저를 통과하는 등 아기자기하다. 또 ‘사랑의 절벽’이 보이는 해변을 따라 달리는 맛도 특별했다고 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들은 말했다. 괌의 자연은 거센 파도보다는 잔잔히 흐르는 강물처럼, 장대비보다는 가랑비처럼 소리 없이 은은하게 다가왔다. 열강의 침략에 지쳐 버린 섬이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은 까닭일까 무척이나 조용하다. 야자수를 경쟁자 삼아 하나씩 제치며 달리노라면 수평선 너머 아침이 눈부시게 부서진다.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괌에서 달리는 기분이 여느 도시와 많이 달랐다고 말했다. 마라톤 3년차에 달렸다 하면 입상하는 ‘무서운 아줌마’ 이정숙씨도 서울의 우승에 이어 이곳 하프 코스 여자부에서 2위를 했다. 이씨는 “힘이 들 때쯤 뜨는 해와 해변이 청량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내년에 다시 올 계획이다. 놀고 뛰는 두 가지 맛에 덤으로 상금까지 탔으니 남들보다 더 신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작년 5km에서 우승한 이지원(37)씨는 올해는 10km에 도전해 1위를 차지했다. 게다가 부인 류승화(29)씨까지 5km에서 2위로 들어와 부부가 함께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그 외 김광호(33)씨와 이범일(36)씨가 각각 하프 2위와 3위에 입상해 한국의 마라톤 끈기를 과시했다. PIC 괌 국제 단축마라톤 대회는 이왕이면 많은 사람에게 완주의 성취감과 참여의 기쁨을 주려고 세 가지 레이스에 남녀· 연령대별 우승자를 선정해 메달과 상금을 수여한다. 10년째 우승자들에게 메달을 수여하는 1972년 뮌헨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프랭크 쇼터는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마라톤은 준비하고 노력하는 만큼 돌려주는 정직한 예언자”라며 시상대에 올랐다. PIC 괌은 이 대회를 통해 매년 기부 행사도 한다. 올해는 ‘선행 가수’ 김장훈씨가 참여해 100m당 16달러의 기부금을 적립해 총 8000달러를 모았다. 이 기부금 중 절반은 괌 소재 한글학교 ‘꿈터’에, 나머지는 국내 이레 공부방에 기부했다. 청소년 봉사활동을 하는 어머니에게서 돈 ‘쓰는’ 재미를 배웠다는 김장훈씨는 달리다 죽더라도 기부금은 꼭 채우겠다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고 ‘꿈터’ 학생들과 비에 흠뻑 젖은 채 37분 30초 만에 5km를 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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