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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과 엘리자베스 1세

힐러리 클린턴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쳐다보는 존재이지 만지는 대상이 아니다. 최근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 ‘골든 에이지(Elizabeth: The Golden Age)’ 초반부에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케이트 블란쳇 분)은 재미없는 데이트 상대 때문에 따분해졌다. 주위에선 궁전의 신하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두 사람을 지켜본다. 유럽 대륙의 왕가에서 건너온 구혼자는 그런 구경꾼들의 시선에 당황해하며 말까지 더듬는다. 언제나 친절한 여왕은 그에게 충고를 해 준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살아가려면 자신이 ‘유리 칸막이’ 안에서 산다고 상상해야 한다는 충고다. 그러면 안전해지고 군중으로부터 차단된다고. “그러면 그들은 내 몸에 손대지 못해요. 당신도 그렇게 상상해 보세요.” 멋진 궁중 의상들만 없다면,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는 위기의 영국은 오늘날의 미국과 매우 비슷하다. 국가는 심각하게 분열됐고, 국민은 양대 권력집단 사이에서 동요한다. 해외로부터는 어둠의 세력이 도전해 온다. 또 국민은 하나의 대제국이 부상하고 또 다른 대제국이 몰락하는 운명의 시간이 임박했다고 걱정한다. 여성 지도자는 한편으론 여성다움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론 여느 남성 못지않게 통치를 잘한다는 점을 증명하려 애쓴다. 관객들은 ‘골든 에이지’를 보면서 힐러리 클린턴을 떠올릴지 모른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유리 칸막이 속에서 살아가듯 보일 때가 많은 여성이다. ‘골든 에이지’는 여성과 권력을 소재로 하는 우리의 일상 대화가 얼마나 단세포적이고 무의미한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한 장면에서 여왕의 점성가는 “여자 군주들”이라고 언급했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곧바로 “여성으로 태어난 군주들”이라는 표현으로 바꾼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듣는 둥 마는 둥 한 표정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점성가 같은 태도를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힐러리가 대통령이 될 경우 빌 클린턴에게 어떤 호칭(First Gentleman? First Husband? First Laddie?)이 붙을지를 놓고 벌써 얼마나 많은 언론 지면이 낭비됐던가? 엘리자베스의 슬픈 여성 전사 같은 이미지는 우리에게 매우 낯익다. 승리를 거둬 의기양양해 하면서도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다. 또 여러 세대를 거쳐 칭송 받으면서도 개인적 사랑에 목말라 한다. 사실 우리는 여성 지도자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강요한다. 대처 영국 총리를 기억해 보라. 제1차 걸프전이 임박했을 때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에게 “마음이 흔들릴 때가 아니다”고 독려하던 여걸의 모습 말이다. 또 우리는 뒤늦게나마 엘리자베스 2세에게도 찬사를 보낸다.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사망했을 때도 왕실에서 영국인답게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던 모습을 기억해 보라. 그리고 힐러리도 있다. 미국 최고의 권좌를 추구하면서 언제나 감정을 감추려 애쓰는 정치인 말이다.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 때문에 힐러리는 차가운 로봇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골든 에이지’를 보면 힐러리가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매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우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부여된 정서적 공간보다 더 좁은 공간을 힐러리에게 허용한다. 처녀 여왕은 “영국”과 결혼하고, 여성적 부드러움을 자신이 통치해야 할 나라를 위해 희생하며, 국가의 어머니인 동시에 아내였다. 그러나 현대의 민주주의에서는 힐러리가 확신에 차서 여왕 같은 사랑을 쏟아 붓기는 불가능하다. 그녀는 지금도 ‘완벽한 힐러리’라는 냉소적인 대중적 이미지에 시달린다. 힐러리는 엘리자베스의 가장 강력한 도구인 분노를 활용하기도 어렵다. 영화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적인 스페인의 필립 왕이 보낸 대사에게 자신을 가지고 놀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여왕의 위엄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그 장면에서 그녀는 이렇게 으름장을 놓는다. “짐 역시 바람을 움직일 능력이 있소. 짐의 몸속에는 허리케인이 들어 있소. 그대들이 감히 짐을 시험하려 들면 그 태풍으로 스페인을 쓸어 버리겠소.” 힐러리 역시 자신의 강인한 면모를 신속하게 보여 줄 능력을 지녔다. 어느 토론에서 버락 오바마가 독재자들과 직접 대화하겠다고 말하자 힐러리가 그를 질타하던 모습을 기억하는가? 그러나 그녀에게는 보수파 언론의 풍자만화에서 묘사된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전등을 집어 던지고 남성들을 파멸시키려 들며,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격분한 모습을 결코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성난 여성’이라는 이미지다. 유세 과정에서 힐러리는 분노를 약간 드러낸 뒤에는 곧바로 부드러운 모습을 되찾는다. 지난 여름의 한 토론회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난 15년간 보수파를 상대로 싸워 왔다. 그런 만큼 여러분이 그들을 공략할 방법을 터득한 승리자를 원한다면, 내가 바로 그런 여성이다.” 그러나 힐러리는 처녀 여왕의 무기 중 하나인 ‘성적 매력’을 좀 더 거리낌없이 사용해야 한다. 블란쳇이 연기한 엘리자베스는 모든 통치행위에 성적 매력을 십분 활용한다. 심지어 점잔 빼는 월터 롤리 경조차 여왕의 매력에 넘어가 경망스러운 볼타춤을 추게 된다. 그러나 힐러리로선 대중 앞에서 그런 교태를 부리기가 훨씬 더 어색할 듯하다. 남편의 백악관에서 겪은 체험을 통해 그녀는 정치인이 자신의 성적인 측면을 너무 많이 드러내면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이 있음을 깨달았다. ‘골든 에이지’의 끝 부분에서 엘리자베스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한 뒤 번영하는 대영제국의 황금시대를 이끈다. 자신의 유리 벽 뒤에서 여왕은 승리를 구가하고, 잔혹해지며, 처절한 고독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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