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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戰 5년 미군이 달라졌다

이라크戰 5년 미군이 달라졌다

의사 아들인 팀 라이트는 고교 시절 라틴어를 공부했고 평균 학점이 3.8이었다. 프린스턴대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대신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택했다. “사람들은 나를 눈이 세 개 달린 괴물 보듯 했다”고 라이트는 말했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의 절도 있는 생활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군인으로서 모든 조건을 갖춘 뒤 부하들을 엄히 대하면서도 동고동락하며 불편함과 위험을 함께하는 지휘관이 됐다. 그런 열성적인 태도 때문에 몇몇 부하는 조롱 반 존경 반으로 그에게 ‘캡틴 아메리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러나 라이트는 자신이 본래 꿈꾸었고 훈련생도 시절 목표로 삼은 전사의 모습이 아니다. 그는 2000년 육사 졸업 후 보병 장교로 임관해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는 목표를 가진 부대에 배치됐다. 2003년 봄 3주가 채 안 돼 바그다드 진입에 성공한 바로 그 부대다. 하지만 그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은 현지의 거센 저항을 불러와 곧바로 강력한 급조폭발물들(IEDs)과 시가전을 초래했다. 병사들은 지치고 피 흘리고 좌절했다. 바그다드의 상황이 가장 암담했던 작년 봄 대위였던 라이트(30)는 전화(戰禍)가 휩쓸고 간 바야 지구의 거리를 오스카 소세다 이병과 잡담을 나누며 걸었다. 갑자기 저격수의 총알이 날아와 라이트의 눈앞에서 소세다의 머리를 관통했다. “땅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숨졌다”고 당시를 떠올리면서 라이트의 목이 순간 메어왔다. 자신이 근처 건물을 확인하지 않은 탓에 부하가 숨졌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것이 내 일 가운데 가장 힘든 부분이다”고 말하면서 그는 눈물을 삼켰다. “내가 잘못하면 사람이 죽기도 한다.” 3주가 채 안 돼 다시 중대 소속의 험비 지프 한 대가 이동 중에 도로에 매설된 폭탄에 부서졌다. 라이트의 부하인 매트 래머스 하사가 양 다리와 왼쪽 팔을 잃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래머스를 본 라이트는 절망했다. 바그다드에 희망이 안 보였다. 당시 심정을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이곳의 상황을 과연 되돌릴 수는 없는 걸까.” 많은 미국인도 작년 봄·여름 똑같은 의문을 품었다. 이라크 상황이 고비를 넘겼다고 말하긴 이르지만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에서 그 뒤로 폭력사태가 크게 줄었다. 거기에는 이라크 주둔 미군 사령관인 데이비드 페트라우스 장군이 미군의 전투 방식을 바꾼 공로가 컸다. “반군을 모조리 죽이는 방식으로는 저항을 꺾을 수 없다”고 지난달 바그다드 본부에서 뉴스위크와 만난 페트라우스 장군은 대답했다. 그는 안전한 대형 기지에 있던 장병들을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마을 속에 자리한 작은 전초기지들로 이동시켰다. 또 병사들에게 장갑 수송차량을 이용하지 말 것도 지시했다. “차를 타고 그냥 휙 지나가지 말고 걸으면서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져라.” 페트라우스가 휘하 장병들에게 내린 ‘지침’에 실린 내용이다. 이제 목표는 고지를 점령하거나 요새를 함락하는 게 아니라 현지인의 환심을 사는 것이라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새로운 전쟁 방식에는 새로운 종류의 전사(戰士)가 필요하다. 이라크 참전 5년째. 베트남 전 이후 미군이 개입한 가장 긴 전쟁이다. 팀 라이트 같은 젊은 장교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수차례 오가며 많은 피를 봤다. 그들은 유례없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종종 혼자 힘으로 무슬림 문화의 복잡성을 깨우쳤다. 중앙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자 시장(市長), 중재자, 경찰, 토목기사 역할까지 했다. 대체로 아주 위험한 환경이었다. 최근에는 부하 사병들을 공격해 때론 목숨을 앗아갔던 원흉들에게도 손을 내밀고 친구를 만들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도 있었다. 그들은 엄격하고 애국심 강한 군대 문화 속에서 옳고 그름, 흑과 백을 분명히 가릴 것을 교육받았지만 이곳에서는 도덕적인 모호성 속에서 활동하는 법, 적군의 정당한 열망을 인정하는 법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이들 페트라우스 세대 장교들이 쌓은 업적은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다. 전과자, 반군, 테러범들이 포함된 새 친구들은 언제 그들의 믿음을 저버릴지 모른다. 그들의 마음을 붙잡으려면 무엇보다 그들과 부대끼며 매일 거리를 돌아야 한다. 하지만 달이 갈수록 미군의 감축 압력은 거세지는 분위기다. 그리고 이라크처럼 모호한 분쟁지역에서는 이들 장교가 터득한 노하우가 중요할지 몰라도 미 국방부 안에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거나 신뢰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페트라우스 장군은 자신이 추진하는 저항 억제 전략의 이행에 필요한 자원을 얻어내기 위해 상관들과도 수시로 부닥쳤다. 지난주 중부 사령부(CENTCOM) 지휘관에서 물러난 윌리엄 팰론 대장도 그중 한 명이었다. 페트라우스의 후배 장교들도 계급이 높아지면 미국이 앞으로 누구와 전쟁을 벌일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싸울지를 두고 비슷한 갈등을 겪을 것이다. 그들 중 다수는 이미 상황파악이 느릴 뿐 아니라 갈피를 못 잡는 상관들과 부닥쳐야 했다. 키가 크고 다부진 인상의 라이트는 사려 깊은 전사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고향 메인주의 가족 중에 군인은 한 명도 없다. 형은 아프리카 난민의 재정착을 위해 힘쓰는 비정부기구에서 일하며 여동생은 전미농구협회(NBA)에서 근무한다. 육사에서는 미국사를 전공했으며 매카시즘을 소리 높여 반대했던 메인주 출신 마거릿 체이스 스미스 상원의원에 관해 많은 연구를 했다. 보병장교 기본교육과정과 고급과정인 특공훈련 학교뿐 아니라 육사에서 기술력과 월등한 화력을 이용해 적을 추적·섬멸하는 방법을 교육받았다. 그러나 2004년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는 그 훈련의 한계를 깨달았다. 라이트의 소속 부대는 3개월 간 버몬트주 넓이의 지역을 훑으며 탈레반 반군을 수색했지만 헛수고였다. “3000m 고도의 아프간 산악지대에서 사람을 추적하기는 불가능했다. 정보대 사람들은 늘 ‘발자국’을 내세웠지만 속 모르는 소리였다”고 라이트는 말했다. “트럭에 실어 운반하면 되는데 왜 힘들게 급조폭발물 가방을 짊어지고 눈 덮인 산을 기어 오르겠는가.” 그보다 라이트는 지하드 전사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의 정체를 확인해 줄 현지 조력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트와 부하 사병들은 몇 주 전부터 잔 바즈라는 이름의 군사 지도자를 수색하고 있었다. 라이트의 상관인 월터 파이어트 중령은 그를 사살하거나 생포하지 못한다면 포섭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프간 현지 주지사의 주선으로 잔 바즈를 단독으로 만나 지역 경찰국장 자리를 제안했다. 그 지도자는 지역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약간의 뒷거래는 있었지만 그 방법이 주효했다”고 라이트는 말했다. 잔 바즈가 미국 정부가 주는 돈을 받기 시작한 후 공격이 줄었다. 라이트는 2005년 해외 복무를 마치면서 육군 매체인 인펀트리지 기고문을 통해 전통적인 ‘경보병’ 전술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대신 현지인들과의 융화와 적의 매수(직접적인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그런 암시를 했다) 등 더욱 융통성 있는 전략을 권했다. 페트라우스가 2006년 저항 억제 원칙을 작성할 때 파이어트와 라이트 같은 유능한 일선 장교들의 경험이 큰 도움을 줬다. “페트라우스 매뉴얼에 적힌 수칙은 모두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터득한 것”이라고 라이트는 말했다. “모두 우리가 그 효과를 현장에서 목격했다.” 베트콩과 싸웠던 미군 장교들도 그와 아주 유사한 교훈을 얻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대부분 그냥 소멸했다. “그 전쟁을 매년 한 번씩 아홉 번 치렀다고 한다”고 페트라우스는 말했다. 자원입대가 아닌 강제징집인 탓에 전투에 지친 군인들은 대부분 베트남 1년 복무를 마치면 군대를 떠났다는 얘기다. 반면 병력자원이 적은 상황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라이트 같은 군인들은 두 차례나(또는 세 번이나 네 번) 해외 분쟁지역으로 파견 명령을 받기도 한다. “그들은 확실히 베트남전 이후 같은 계급의 장교들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경험을 갖고 있다”고 페트라우스는 말했다. 페트라우스는 그 지식을 체계화했다. 캔자스주 포트 레번워스에서 연구팀을 만들어 이라크 침공 약 3년 만에 매뉴얼 작성과 승인을 마쳤다. 국방부 시간으로 보면 눈깜짝할 새였다. 그러나 그 매뉴얼이 호평을 받긴 했지만 지켜야 할 원칙에 불과할 뿐이라고 페트라우스는 말한다. 진짜 어려운 작업은 바그다드의 거리에서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일은 내가 대위 시절에 훈련받은 내용보다 훨씬 더 복잡미묘하다”고 그는 말했다. “고지대와 저지대 같은 이른바 군사 지형만 이해해서도 안 된다. 사람의 분포도까지 이해해야 한다.” 라이트는 지난 2월 결혼(장소는 커스터 장군이 지휘했던 기지의 한 주택이었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3주 만에 제1 보병사단 산하 제1 대대 28보병연대(블랙 라이온스) 소속으로 바그다드에 파견됐다. 그는 누굴 믿어야 할지 몰랐다. 그의 중대는 전쟁의 상처가 깊은 바야로 파견됐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서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수니파 반군은 차량 폭탄을 보냈고 시아파 마흐디 군은 조직적인 인종청소 작전을 맨앞에서 이끌었다. 때론 이라크 정부의 평화유지 역할을 맡은 국가 경찰마저 그들을 도왔다. 수니파의 집 앞에 종이에 싼 총알 하나가 놓여 있으면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경고로 통했다. 하지만 집을 떠나다가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 현지 시아파 군사조직이 수니파에 큰 의미가 있는 사원을 폭파했다. “국가 경찰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고 라이트는 말했다. “아마 제대로 파괴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라이트의 델타 중대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총격전 한가운데 끼어들었다. 그의 부하들은 거리에서 위치를 바꾸고 갈지자로 이동하며 저격수들을 피하는 법을 배웠다. 처음 석 달 만에 중대의 전체 병력 102명 중 10명을 잃었다. 세 명은 살해됐다. 그곳에서 라이트가 믿을 만한 친구는 통역사 알리(가명)뿐이었다. 상스러운 말과 힙합 슬랭을 섞어 자신만의 독특한 영어를 구사하는 알리는 적의 표적이었다. 반군에 납치돼 거꾸로 매달려 전기고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라이트는 가끔 알리가 언제라도 반대편에 설 수 있다고 농담한다. “언제 돌변해 우리에게 총을 겨눌지 모른다.” 그러나 알리는 정보원들을 모집해 휴대전화와 사용자 식별 카드를 나눠주면서 연락망을 구축했다. 바그다드 전역의 부대 지휘관들은 스스로 정보장교 역할을 했다. 정보원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정찰 사진을 비롯한 그 밖의 첩보 자료를 직접 활용했다. “전에는 대대 지휘관 수준에서는 거의 얻지 못하던 정보를 활용한다”고 페트라우스는 말했다. 필연적으로 이 장교들은 전임자보다 의사결정의 재량권이 크다. 페트라우스는 자신의 지휘계통 아래서는 “주도적이고 독자적인 행동을 용인하고 장려한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일선 지휘관들에게 흥정의 권한을 부여한다”는 암시도 있다고 그는 귀띔했다. 작년 여름 수니파 부족 지도자(이들의 추종자 다수가 반군에 가담했다)들과 이룬 합의 덕분에 심각했던 안바르 주의 폭력사태가 크게 줄었다. 미군 지휘관들은 바야 근처의 여러 지역을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협상을 시도했다. 이라크의 알카에다, 시아파 분파 단체 같은 과격단체와의 싸움을 돕기만 하면 현지 전투원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자체 순찰을 허용했다. 이들 민병대원(‘우려하는 현지 주민’ ‘이라크의 아들들’ 각성을 뜻하는‘사흐와’ 등 이름도 가지각색이다) 중 약 8만 명이 미국의 돈을 받으며 그 비용은 한 달에 약 2400만 달러에 이른다. 일부 시아파도 있지만 대다수가 수니파다. 바야에서는 성직자 모크타다 알사르드에 충성하는 시아파 마흐디 군이 부상 중이었다. 페트라우스의 표현대로 이들은 “조정 가능한 자와 불가능한 자”의 식별이 쉽지 않았다. 한번은 악명 높은 현지 사드르파 요원에 협조하라고 주민들이 라이트에게 종용하기도 했다(실제로 그 남자가 라이트의 차량 한 대에 휴대형 대전차 로켓 발사기 공격을 한 후 라이트가 직접 추격전을 벌인 적도 있다). 그러나 라이트는 그가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다고 판단해 체포한 후 감금했다. 더 위험한 일도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미스터 X’라는 사드르파 지도자가 연루된 사건이었다. 미스터 X는 처음에는 미군의 표적이었다. 그는 바야의 민병대원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 받는 지역 원로였다. 일종의 시아파 대부 격이었다. 델타 중대원들은 작년 7월 미스터 X의 자택을 세 번이나 급습했지만 매번 허탕을 쳤다. 대신 그의 동생 압둘라(가명)를 잡아들였다. 그리고 얼마간 감방에 감금했다. 한편 사드르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듯했다. 자신의 마흐디 군이 성도 나자프에서 라이벌 시아파와 총격전을 벌인 후 모든 군사행동을 중단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미국인들이 수니파 적들과 손을 잡으면서 자신이 갈수록 고립되는 것을 우려했는지도 모른다. 일반 시아파 주민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도 확실히 두려워했다. 게다가 바야 같은 지역에서는 수니파가 너무 많이 쫓겨나 싸울 만한 대상도 갈수록 없어졌다. 그때 라이트는 결국 커다란 보상으로 이어지는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압둘라의 손발을 묶고 눈을 가린 채 라이트의 숙소 막사에서 멀지 않은 팔콘 작전기지의 조용한 구석으로 끌어냈다. 강렬한 조명이나 경비병도 없이 앞에 접이식 의자 두 개만 놓여 있었다. 용의주도하게 연출된 장면이었다. 라이트는 심문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갖는 면담이란 인상을 주려고 했다. 그는 압둘라를 일으켜 세운 다음 가위로 조심스럽게 플라스틱 수갑을 잘라내고 눈가리개를 풀어줬다. 압둘라는 앞에 선 사람이 3개월 전 자신을 체포한 미군 장교임을 알아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 “자칫하다간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고 라이트는 돌이켰다. 그는 누구도 예기치 못한 행동을 했다. 압둘라의 감금이 실수였다고 설명하면서 사과했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바야에 안정을 되찾고 싶다고 말했다. 압둘라는 미소를 보였고 라이트는 희망의 불씨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압둘라가 석방된 지 3일 뒤 미스터 X가 직접 라이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지도자는 전화로 대화를 시작했다. 라이트는 X의 불평을 귀담아들으면서 적어도 처음엔 아무런 정보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X와 대화를 시작한 지 한 주 뒤 미군이 정찰을 하던 중 인근 건물에서 한 떼의 비둘기가 갑자기 날아올랐다. 마흐디 군 전사들은 비둘기를 이용해 미군의 움직임에 관한 신호를 은밀히 주고받는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신경이 곤두선 미군 점령 초기라면 지휘관은 그 집을 민병대의 은거지로 꼽았을 수도 있다. 군인들이 문을 박차고 몰려들어가 총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명령하면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고 남자들은 숨을 곳을 찾아 달아났을 것이다. 턱수염이 난 남자가 있으면 지하디 군이라고 지목해 수갑을 채우고 조사할 게 있다고 끌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트는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정찰대를 멈추고 사병들을 보내 조사토록 했다. 그러나 포로를 잡아들이거나 무력시위는 하지 않았다. 비둘기 주인인 10대와 이야기하는 동안 미스터 X가 전화를 걸어와 미군이 그 집을 급습한 이유를 따져 물었다. 잠시 팽팽한 설전을 주고 받은 뒤 라이트는 상황을 설명하고 X를 진정시켰다. 이 사건을 통해 라이트는 X의 인맥이 얼마나 탄탄하지 알게 됐다. “우리가 그곳에 있을 때, 아직도 목표를 향해 이동 중일 때 그에게서 전화가 온 순간 그가 지역의 ‘빅 브러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라이트는 말했다. X는 라이트와 개인 면담은 원치 않았다. 미군과의 관계가 노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역사 알리를 통해 매일 라이트와 통신을 하면서 신뢰를 쌓아갔다. 최근의 어느 날 저녁 라이트는 X에게 전화를 걸어 무장한 남자들이 바야의 주요 시장 안팎을 배회한다는 보고에 관해 물었다. X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더니 거짓 정보라고 알려줬다. 다음 날 X는 다시 라이트에게 전화를 걸어 바야 20번가에 시아파 종교의식을 위한 기도 천막이 설치됐다는 정보를 귀띔했다. 그리고 미군 정찰대가 그 지역을 피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급조폭발물 공격이 크게 줄었다. 미군과 현지인 간의 소화기(小火器) 총격전도 눈에 띄게 줄었다. 바야 중앙통에 문을 연 상점이 늘어나고 미국의 자금지원으로 시장에 오렌지색 금속 쓰레기통들이 속속 설치됐다. 이라크 전역에서 미군 지휘관들이 돈을 풀어 지역의 재활을 돕고 있다. 특히 중앙정부가 외면한 수니파 지역이 많은 도움을 받는다. 올해 지역 재건 지원을 위해 약 7억6700만 달러가 이미 할당됐으며 미 국방부는 의회에 4억5000만 달러의 추가 지원을 요청할 계획이다. 일부 부하 사병은 라이트의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 중 일부가 눈감아 주고 지원한 공격으로 우리 동료가 피해를 보았다”고 앤드루 괴링(24) 중위는 말했다(괴링이 몰던 험비도 급조폭발물이 터져 파손됐다). 직업군인인 대럴 슈넬(38) 상사는 자신의 상관이 미스터 X 같은 적들과 은밀히 접촉한다는 것을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대신 정찰을 나갈 때 마주치는 거리의 아이들에 집중한다. “아이들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 머리 속에 새겨둔다”고 그는 말했다. 페트라우스도 지금은 사드르파의 대표들과 주기적으로 대화한다. 그러나 미군을 살해한 반군들에게 일선 군인들이 손을 뻗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상당히 큰 변화라서 약간의 이성적 토론이 필요했다.” 라이트의 반응은 더 감정적이다. 델타 중대가 처음 도착했을 때 무고한 시민이 총격전에 휘말리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엄격한 교전규칙(ROE) 때문에 응사하는 데 많은 제약이 따랐다는 불만이다. “특히 공격을 많이 받을 때 모두들 답답해 했다. 어떤 건물에서 누군가 우리에게 총을 쏘아대면 압도적인 화력으로 응수하고 포격을 요청해 그곳을 초토화해야 하는데 ROE 때문에 손이 묶인 듯한 좌절감이 팽배했다”고 그는 말했다. “동료 한 명이 눈앞에서 머리에 총을 맞았다면 그렇게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라크 전역의 장교들이 라이트와 같은 딜레마와 씨름한다. 그리고 그들이 직면한 과제(적들과 어떻게 화해하는가)는 또한 이라크인들의 당면 문제이기도 하다. 페트라우스가 이라크 주둔군 사령탑에 오른 후 폭력사태가 크게 감소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군대와 경찰에 일자리를 약속하고 일정기간 급료를 지불하면서 과거와 미래의 잠재적인 전투원들을 매수하는 등 뒷거래가 많은 점은 누구보다 그가 먼저 인정할 것이다. 이미 마찰이 생기기도 한다. 사흐와 전사들은 급료가 낮고(하루 10달러) 중앙정부가 자신들을 고용하길 꺼린다고 투덜댄다. 일부는 담당 검문소를 벗어났다. 대부분 시아파가 주도하는 치안군을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댄다. 몇몇 지역에서는 현지 전투원들이 국가 경찰의 출입을 막는다. 바그다드 시내 아다미야 지구의 한 병원에서는 이라크군이 병원 출입문을 지키고 수니파 전투원들이 건물 출입문을 경비하는데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붙어 있는 것은 오로지 미국인들의 접착제 역할 덕이다. 라이트는 자신과 거래하는 실력자들이 중앙정부를 수용하거나 반대로 중앙정부가 그들을 포용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폭력사태가 재발할 수 있음을 잘 안다. 이라크군과 경찰이 “쇼를 진행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미국인들이 받쳐줘야 한다고 라이트는 말했다. 동시에 “지역사회 지도부가 바야의 앞날을 결정하는 데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밀고 끌고 당기고 달래고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라이트는 야심 찬 목표를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추진해 왔다. 시아파 민병대에 의해 바야에서 쫓겨난 수니파의 귀환이다. 지난 2월 4일 부족장, 정치 대표, 성직자들을 비롯한 지역사회 지도자 약 20명이 지역 자치체 건물에 모여 회의를 했다. 미스터 X의 사절인 압둘라도 초대됐다. 현지인 진행자가 희망적인 어조로 회의를 시작했다. “암흑의 날들이 다시 찾아오지 않기를 신께 기원한다. 우리 모두 무슬림이며 같은 신을 믿는다.” 라이트는 좌석에서 몸을 앞쪽으로 내민 채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알리에게 정신 바짝 차리면서 통역하라고 주의를 줬다. 라이트는 시아파 지도자들이 수니파의 귀향을 허용하길 바라지만 그렇게 순진하지는 않다. 그도 미국인들이 “수니파를 다시 원위치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이웃 사이디야에서는 쫓겨난 수니파 가족의 귀환을 강압적으로 너무 서둘렀다가 폭력사태가 재발했다. 라이트는 적어도 수니파의 집에 들어가 살던 시아파 가구가 원래 집주인에게 집세를 내도록 하자고 제안하려 했다. 그러나 토론에 너무 서둘러서 끼어들지 않으려고 참았다. 게다가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 회의장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도 의식했다. “열쇠는 미스터 X가 쥐고 있다”고 라이트는 나중에 말했다. “그가 집세 제안을 거절한다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라이트는 아직 승전고를 울리지 않았다. 재통합 프로젝트는 “여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보류 중”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주둔해 있는 동안 많은 수니파가 강제 퇴거당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과거에는 1만5000명을 웃도는 바야 주민 중 30%가 수니파였다. 지금은 5% 정도다. 최소 4000명의 수니파가 마을에서 쫓겨났다. 델타 중대가 더 큰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라이트는 한숨을 쉬며 시가지 지도를 내려다봤다. “어떤 역할을 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우리와 불과 여섯 블록 떨어진 거리에서 사원을 폭파했다. 이 정도 병력으로 그만큼 했으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지역사회 지도자들이 대화하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는 것이 최상책일지도 모른다. 화해라는 말만 피하면 된다. “나는 ‘화해’란 단어를 싫어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들이 친구라는 인상을 주지만 친구는 절대 아니다. 나는 올 초 그들이 당한 억울한 일을 바로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라이트는 어떤 전망도 하지 않는다. “미국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길 수 있나’라고 묻는다. 내가 그들에게 주는 답은 우리가 여기 온 뒤로 많은 발전이 있었다는 말뿐이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라이트는 훌륭한 학생이다. 박식하고 인정 많은 그는 미 육군사관학교가 군사학교일 뿐 아니라 우수한 인문 대학이라고 자랑스럽게 강조한다. 그는 전쟁을 겪으면서도 품위와 인격을 유지했다. 그 순간의 생존을 위해서만 살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과 정복의 교훈은 변한다. 그리고 우수한 학생인 라이트는 그런 교훈에 따라 변하는 법을 배웠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이 가져온 비극을 서사적으로 그린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est)’을 읽으려 했지만 “우리가 겪은 상황과 너무 흡사해 아주 고통스러웠다”고 그는 말했다. 라이트의 방 한구석에는 HBO 연재물 ‘로마’의 DVD가 쌓여 있다. 고대 로마 또는 근대의 시실리처럼 이라크는 살육이 자행되는 곳이다. 그 작은 땅에 평화를 가져오려면 몇몇 수상쩍은 인물과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도 라이트는 잘 안다. 페트라우스 장군은 휘하의 젊은 장교들에게 마피아 생활을 그린 TV 연재물 ‘소프라노 가족’을 보면서 이라크 내 권력의 역학관계를 이해하도록 권한다고 한다. 라이트는 토니 소프라노(소프라노가족의 주인공)를 볼 필요도 없다. 미스터 X가 있으니까.


With LARRY KAPLOW, HUSSAM ALI and YASAR KANI in Baghd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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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전세금 못 돌려줘" 전세보증사고 올해만 2조원 육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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