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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od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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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ing Is Everything

클래식 시계가 돌아왔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연례 국제 고급시계 박람회(Salon International de la Haute Horlogerie)를 돌아 보니 세계 금융시장을 휩쓸었던 재앙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첫날, 예거-르쿨트르가 만든 판매가 40만9840유로짜리 바겟(직사각형으로 깎은 보석) 바탕의 투르비용 손목시계를 구경했다(투르비용은 중력에 의해 생기는 시각 오차를 교정하는 장치다). 박람회의 공식 개막 전인데도 오전에 3개나 팔렸다. 스위스를 가로질러 제네바의 반대쪽에 있는 바젤에서도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시계 박람회가 열렸다. 새로 떠오르는 스포츠 브랜드 위블로의 인상 좋은 경영자 장-클로드 비베는 작년 박람회 때는 8190만 유로의 매출을 올렸는데 이번에는 1억5940만 유로 상당의 주문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많은 브랜드가 처한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주문량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위블로의 성공담은 근년 들어 스위스제 고급 태엽시계 시장이 살아나는 추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베는 2004년 위블로에 입사한 베테랑 제조공이다. 당시 이 회사가 바젤 박람회에서 받은 주문액은 450만 유로에 불과했다. 그후 비베는 탄소섬유, 케블라, 세라믹 같은 혁신적인 소재를 사용한 파격적인 시계를 개발해 브랜드를 전면 개편하고 ‘빅 뱅’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를 ‘퓨전’ 방식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강력한 개성을 투영하고 월리 요트(Wally yacht) 등과 절묘하게 브랜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 인기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이 브랜드가 지닌 대담한 스타일의 첨단기술 미학은 어디서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올해의 양대 시계 박람회에 출품한 다른 회사들도 전혀 손색이 없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파격적인 결과를 끌어냈다. 정형(定型)을 거부하는 젊은 시계 디자이너 펠릭스 바움가르트너의 우르베르크 시계는 회전하는 입방체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바늘이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며 시각을 알려준다. 바움가르트너가 보여준 시계는 케이스 뒷면에 회전하는 작은 터빈들이 보이고 작은 레버로 공기 흐름을 조절해 그 속도를 변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동으로 감기는 그 회전자는 눈을 즐겁게 할 뿐 아니라 급격한 손목 움직임의 영향을 줄일 수 있는 기능도 갖췄다. 이런 전위적인 시계 제조방식의 선구자 중 한 명인 리처드 밀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브랜드로 큰 성공을 거뒀다. 올해 그의 브랜드 중 핵심 테마는 회중시계였다. 이것을 구입하려는 사람은 호주머니가 깊어야 하며 그만큼 지갑도 두둑해야 한다. 거장의 재기가 엿보이는 철저하게 현대적인 명품이다. 탁상시계를 겸해도 될 만큼 부피가 크며 가격은 22만6700유로다. 밀의 거대한 시계는 몇몇 전문가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회중시계의 부활을 예고했다. 패션을 선도하는 남성들이 시계를 보려고 조끼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모습은 보기 어렵겠지만(그래도 디자이너 톰 포드는 조끼를 좋아한다) 그것은 고급시계 산업의 근원적인 역설을 말해준다. 오늘날의 남성들이 시계에 관심을 갖는 현상은 마치 여성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 핸드백과 장신구에 집착하는 것과 아주 닮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회전반, 기어, 스프링, 레버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시각을 표시하는 기본 기술은 200년 전의 시계 제조공도 알아볼 만큼 변함이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에 현대의 첨단 기술이 접목됐다는 점이다. 말과 마차에 첨단 자동차 기술을 적용하는 격이다. 때때로 환상적인 혁신기술이 등장한다. 예컨대 올해 지라르 페레고는 새로운 탈진기(脫進機)를 선보였다. 시계의 조절기관 역할을 하는 이 콩스탕 탈진기의 한가운데에는 사람 머리카락보다 얇은 규소 날이 있다. 마치 살아 숨쉬듯 규칙적으로 고동치는 이 작은 부품의 움직임에 매료돼 한동안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태그호이어는 세계 최초로 10분의 1초까지 측정하고 보여주는 매커니컬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그랜드 카레라 칼리버 36 RS를 선보였다. 일반시계의 무브먼트가 시간당 2만8000번정도 진동하는데 비해 이 시계는 시간당 3만6000번을 진동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검증된 전통 기술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투르비용의 사례를 들어보자. 당초 착용자의 호주머니 속에서 시계가 수직으로 세워진 상태로 보관되는 데서 발생하는 시각 오차를 보완하기 위해 개발된 이 장치는 회중시계가 거의 사라진 지금까지도 여전히 건재하다. 카르티에의 신형 인기 모델은 발론 블루 시계에 플라잉 투르비용을 채택한 것이다(다리가 없이 몸체의 한쪽만 문자판 상에 고정돼 허공에 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에 플라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시계는 19세기에 제정된 제네바 인증제도의 엄격한 기준에 맞춰 정교하게 제작됐다. 투르비용은 이전까지 섬세한 장치로 여겨졌지만 그것은 옛날 얘기다. 몇 년 전 지라르 페레고가 극한 다이빙 시계(3000m까지 방수)에 투르비용을 장착했다. 그 정도 깊이라면 다이버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지만 시계는 여전히 정확하게 돌아간다. 이탈리아 해군 특수부대가 선호하는 브랜드이자 남성적인 이탈리아 스타일로 유명한 파네라이는 올해 독자적인 회전 축을 갖춘 매혹적인 투르비용을 출시했다. 독일 브랜드 ‘아 랑게&쇤’은 시각을 재설정하기 위해 용두를 잡아당기면 동작을 멈추는 투르비용을 선보였다. 이는 시각을 한치 오차도 없이 재설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프랑스권 스위스의 원천 기술에 독일권 특유의 정밀함을 더해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다. 투르비용이 변함없이 사랑받는 것은 고급시계 제조분야가 전통을 중시하는 산업임을 말해준다. 올해의 박람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시계 중 일부는 과거의 디자인을 많이 차용했다. 예컨대 섀프하우젠에 본사를 둔 IWC(International Watch Co.)는 올해로 창사 175주년을 맞아 과거의 대표적인 인기 클래식 모델 6종을 재출시했다. 예거-르쿨트르도 1960년대 자명종이 달린 다이빙 시계로 일부 매니어층을 형성했던 폴라리스 시계를 다시 내놓았다. 아마 바다 밑바닥에서 잠시 눈을 붙이려는 다이버들을 위한 것이었나 보다. 60년대의 또 다른 명품 시계인 브라이틀링의 크로노마틱도 왕년의 명성을 그대로 재현했다. 다만 직경이 49mm로 현대인들의 취향에 비해 너무 큰 게 흠이다. 이 회사는 또 작년 재출시한 수페로시언 헤리티지의 크로노그래프(스톱워치 기능 겸용) 버전도 선보였다. 롤렉스의 클래식 ‘Sea Dweller’는 이제 ‘Deep Sea’ 버전으로 재탄생했다. 심해 산업 다이빙 회사 코멕스가 개발한 기술을 적용해 수집가들의 구미를 한층 돋운다. 오드마르 피게가 내놓은 탄력 케이스의 대형 손목시계는 만년 달력과 시보(時報) 기능으로 1920년대를 연상케 한다. 아름답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시계다. 전 세계의 수집가들이 탐내는 브랜드인 파텍 필립은 시계제조를 고급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화려한 명품을 내놓았다. 이 회사의 세계시간을 알려주는 여행용 시계는 오래전부터 클래식으로 평가받아 왔다. 올해엔 에나멜 문자판에 유럽, 아프리카, 미주 대륙이 그려져 나온다. 한 해에 수십개 정도만 생산되기 때문에 이 제품을 손에 넣으려면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다. 시계 수집을 취미로 삼는 재력가들이 늘면서 바젤과 제네바의 박람회에 출품한 일류 브랜드들이 짭짤한 소득을 올렸다. 이 시점에서 다시 수요 충족의 문제가 대두된다. 어떻게 보면 능력 이상으로 너무 빨리 공급을 확대하지 않는 이런 신중함이 시계산업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계산업은 무려 200년 전부터 이런저런 위기를 겪어 왔다. 가장 최근의 위기는 1970년대와 80년대 초 아시아에서 쏟아져 나온 싸구려 쿼츠 시계의 범람이었다. 대부분 40세 이하이거나 은퇴를 앞둔 이른바 ‘잃어버린 시계제조공 세대’에겐 아직도 그 상처가 남아 있다. 실제로 그 해결책의 일환으로 스위스 은행 줄리우스 배르는 최근 스위스의 재능 있는 젊은 시계제조공을 위한 장학제도를 발표했다. 이것이 서브프라임 위기를 피해 떠도는 자금의 안전한 도피처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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