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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두인 전사들이 이라크로 간 까닭

베두인 전사들이 이라크로 간 까닭

아브드 알살람 빈알리(20)는 어느날 조용히 사라졌다. 실은 딱히 사람들 눈에 띄는 존재도 아니었다. 안색이 창백하고 호리호리한 그 애꾸눈 청년은 리비아 동부의 고향 다르나에서 수의학을 공부했지만 졸업 후 취직을 못했다. “경제사정이 너무 어려웠다”고 그의 형 아브드 알하미드가 돌이켰다. “동생은 매일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아브드 알살람은 간혹 다르나 구시가지에서 접이식 탁자를 펴놓고 싸구려 향수를 팔았다. 미혼에다 장래도 밝지 않은 그는 여전히 어머니 신세를 지며 살았다. 집에선 텔레비전 앞에 드러누워 ‘사막의 라이언(Lion of the Desert)’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곤 했다. 리비아 베두인족 전사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1981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앤서니 퀸이 주연했다. 아브드 알살람은 그 영화를 몇 번씩 되풀이해 봤다. 이라크 전쟁이 장기화하자 아랍 뉴스 전용 채널인 알자지라 방송도 보기 시작했다. 식구 중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아브드 알살람은 알자지라에 나오는 유혈 장면을 보면서 더 흥분했다. 때로는 미군과 싸우러 집을 나가겠다는 말로 어머니의 애간장을 태웠다. 하지만 어머니가 화를 낼라치면 한발 물러섰다. “아뇨, 농담이에요. 엄마, 걱정 말아요.” 웃으며 그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대신 장가나 갈게요.” 형은 그 말이 미덥지 않았다. “아우가 분명 집을 나갈 것 같았다”고 아브드 알하미드는 돌이켰다. “늘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브드 알살람은 그 무렵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변해 갔다. 형의 말에 따르면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슬람 사원에서 보냈다. 그러던 중 2006년 9월 말의 어느 날 아브드 알살람은 홀연히 사라졌다. 저녁식사 때도 보이지 않자 “얘는 어디 갔느냐?”며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형은 향수를 사러 벵가지에 간 모양이라는 말로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정작 본인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아우는 아마도 차를 얻어 타고 카이로로 간 뒤 이어 다마스쿠스행 비행기에 올랐던 모양이다. 나중에 호주머니에 현금 100달러를 지닌 채 이라크 국경을 넘어 ‘하미드’로 불리는 지휘관이 이끄는 저항세력에 합류했다. 아브드 알살람이 실종된 뒤 얼마 후 다르나의 집 전화벨이 울렸다. “저 라마디에 있어요.” 아브드 알살람이 말했다. “이라크예요.” 지난해 하반기 미군은 이라크 북부 신자르에 있는 저항세력의 본부를 기습했다. 미군은 그곳에서 “무자헤딘 슈라 위원회”라는 문구가 인쇄된 문서를 발견했다. 아마도 아브드 알살람이 입국하면서 적은 가입 신청서였던 듯하다. 그 문서에는 아브드 알살람의 생일, 형의 전화번호와 고향 도시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러나 미군 수사관들은 그 문서들을 분석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신자르 기록에 나온 전사 606명 가운데 근 19%가 리비아 출신이었다. 종전의 정보에 따르면 이라크에서 싸우는 외국인 전사는 대부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다. 실제로 신자르에 등록된 외국인 전사 중에서 사우디인이 244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인구 비율로 따지면 리비아인의 참여율이 가장 높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서류에 나온 리비아인 전사 112명 중 무려 52명이 지중해 연안의 다르나(인구 5만) 출신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많은 그곳 청년들이 무엇 때문에 미군과 싸우기 위해 이라크로 향했는지 궁금해진 기자는 4월 초 다르나에 갔다. 햇빛에 반짝이는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녹빛 석회암 절벽들의 그림자 안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그곳은 빼어난 절경을 자랑했다. 절벽도로 양 옆으로 연한 색깔의 페인트칠이 갈라지고 금세 허물어질 것 같은 콘크리트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리비아는 국가 세입의 90%를 석유와 가스에 의존하지만 동부지역은 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트리폴리의 중앙정부 공무원들조차 사석에선 오래전부터 동부를 홀대한 점을 시인했다. 무아마르 카다피가 다스리는 이 경찰국가에서 자유롭게 입을 여는 덴 위험이 따르지만 차별의 정도는 다르나 주민들이 부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정부가 우리에게 해준 게 뭐냐”고 아브드 알하미드 빈알리가 물었다. 신자르 문서에서 분명히 드러난 사실이 하나 있다. 이라크에서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리비아인 중에서 85% 이상이 자살공격을 지원했다. 모로코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이다. 그렇다도 경제사정 하나만으로 다르나 청년들이 그토록 쉽사리 이라크 저항세력에 합류하는 이유를 완벽하게 설명하기란 힘들다. 세계적으로 가난한 무슬림의 수는 수천만 명이지만 정작 싸우러 이라크로 떠나는 사람은 소수(대개 수백 명 선을 유지한다)에 불과하다.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사로잡고, 무엇이 불만투성인 한 알자지라 시청자를 자살폭탄 테러범으로 바뀌게 하는지 모두가 공감할 만한 이유는 없다. “그것이 큰 수수께끼”라고 신자르 기록을 분석한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의 대테러 전문가 브라이언 피시먼이 말했다. “다르나 고유의 현상인 듯하다.” 일부 공통분모는 있다. 지하드 지원자들의 가족을 인터뷰한 결과 젊은이들이 속죄를 찾아나선 것이라고 말한다. 이슬람 성전 지원자들은 세계적인 하나의 이념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심리적 외상 후유증, 형제 간의 경쟁의식, 성적인 갈망 등 이유가 저마다 다른 듯하다. 다르나 출신 전사들은 그 밖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자기네 고향이 역사에 등장해야 한다는 거의 병적인 집착이다. 리비아 해안평원을 따라 펼쳐지는 밀밭과 보리밭에는 고대 점령시대의 파편인 그리스와 로마 유물들이 도처에 널렸다. 미국은 1800년대 초의 두 차례 바르바리 전쟁 때 이 마을 주민들의 기억에 영원한 흔적을 남겼다. 다르나는 미국 역사 최초의 해외 군사원정에서 주요 전쟁터로 기록됐다. 미 해병대원 500명과 현지 용병들이 이집트에서 사막을 건너 다르나를 공격했다(현 해병대 찬가에 나오는 “트리폴리 해안”이라는 가사는 그 뒤의 다르나 전투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 도시에 무장저항 정신을 불어넣은 것은 100년 뒤의 다른 나라였다. 1911년 이탈리아가 다르나 항구에 전함들을 정박시켰다. 무솔리니 시대를 거쳐 [연합국에 맞선] 추축국들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던 날까지 계속된 가혹한 식민통치의 서막이었다. 주민들은 다르나 인근의 바위투성이 고원지대에서 격렬하게 점령군에 맞섰지만 결국 진압됐다. 당시의 흙먼지에서 이슬람 순교의 전통이 시작됐다. 그 정서적 뿌리가 워낙 깊어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관리들조차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정도다. 다르나에 도착한 다음날 인민위원회 공동의장(시장 격)인 사디크 아프델의 집무실에 들렀다. 아프델의 책상 뒤로 열린 창문을 통해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아프델은 처음엔 상당수의 그곳 청년이 이라크에 갔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모른다. 여기 다르나에선 10명을 넘지 않는다.” 나는 서류뭉치를 보여줬다. 개중에는 전사들의 작은 사진도 있었다. 의장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통역관을 통해 “그건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들이 갈 이유가 없다.” 그러고는 담배연기를 빨아들인 뒤 마침내 시인했다. “꽤 많은 인원이다. 이 수치가 사실이라면 심각한 일이다. 정치적으로 좋지 않다. 그러나 무슬림이 자기 임무를 다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미국은 이 전쟁이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알자지라에서 보는 모습은 미국인들의 말과 다르다. 그들이 가지 못하게 막을 재간이 없다. 우리는 코란에서 성전을 배웠다.” 저항전사를 배출한 그 도시의 역사에 관해 묻자 아프델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자기 땅을 지키려고 일어나 싸운 사람들이다.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트리폴리 해안으로
현대 미국인들은 대체로 바르바리 해적을 오래전 역사시험에서나 나온 시시한 이야기로 여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을 건국한 제헌의원들에겐 바다의 재앙이었다. 갓 해방된 옛 북미 식민지들이 담배와 설탕 등의 상품을 중동에 수출하려면 지중해의 해상로가 필요했다. 미국 상선들은 막강한 대영제국 함대의 보호를 포기한 뒤로는 오늘날의 모로코, 알제리, 리비아 출신 해적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납치가 다반사로 일어났다. 특히 백인 여성을 포로로 잡으면 북아프리카 하렘으로 끌고 갔다. 납치와 몸값의 악순환으로 신생국 미국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그런 적에게 맞서는 게 좋을지, 달래는 게 좋을지 정치인들의 설왕설래 끝에 마침내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1801년 전함 투입을 명령했다. 시작은 좋지 않았다. 미 전함 필라델피아호와 선원들이 나포됐다. 적들은 승리의 기념물로 이 쾌속범선을 트리폴리 항구에 정박시켰다. 제퍼슨은 병력을 증파했다. 비교적 무명의 미 해군장교 스티븐 데커터가 1804년 지금은 전설이 된 심야작전을 지휘했다. 항구에 정박한 필라델피아호를 공격해 불태워 가라앉혔다. 동쪽에서는 윌리엄 이튼 장군이 1805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막을 건너 다르나로 진격했다. 마이클 오렌의 역사서 ‘권력, 신앙, 환상’에 묘사된 대로 이튼은 말을 타고 다르나 구시가지 성문 앞에서 항복을 요구했다. 다르나의 통치자는 “내 목이 떨어지나 당신 목이 떨어지나 해보자”고 대답했다. 이튼은 그 도시를 점령했다. 오늘날 다르나 곳곳에는 그 전투를 상기시키는 유물과 흔적이 남아 있다. 방문객이 다르나 진입로에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은 ‘1805 리조트’를 광고하는 대형 노란색 콘크리트 숫자 1805다(그해 전투를 기념한 것이다). 절벽도로 변의 인기 있는 간이식당 상호는 필라델피아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이다. 리비아의 학교에선 필라델피아호 나포를 위대한 국가적 승리로 가르친다. 당시에는 리비아라는 독립국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오스만 제국의 섭정을 받는 반자치 지역이었을 뿐이다. 다르나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열 살짜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브드 알물라는 학생들에게 필라델피아호의 그림을 간단하게 그려준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너무 어려서 이튼이나 데커터 같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전투에서 국민적 자부심을 느낄 정도는 된다고 설명했다. “리비아는 미국과 맞선 최초의 나라였다”고 트리폴리에 있는 또 다른 필라델피아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의 종업원 에삼 알하말이 말했다. 트리폴리에는 당시 필라델피아호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돛대 하나가 지금까지 붉은요새 꼭대기에 전시돼 있다. 리비아 국민은 그 전투를 가리켜 “1차 리비아-미국 전쟁”이라 부른다. 다르나의 과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하이에나 소사이어티란 이름으로 알려진 현지 클럽의 본부 지하실이다. 기자가 다르나에 와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다. 200명 정도인 이 단체 회원 중에는 약간 어울리지 않게 늙은 역사광들을 비롯해 좀 더 젊은 모험가들이 있었다. 클럽하우스에는 박제 코브라, 오스만 제국 시대의 기병총, 베두인족 텐트 등 역사 유물과 골동품이 가득하다. 모임의 회장 무하마드 알히니드(76)는 깡마르고 단단한 체격에 성격이 괴팍한 노인이며 실내에서 조종사용 색안경을 썼다. 그는 기자를 데리고 거대한 미 전함 아거스호의 모형 곁을 지나갔다. 다르나로 진격하는 이튼 장군의 부대에 군수품을 재보급한 공급선 가운데 한 척이었던 배다. 다르나 역사에선 바르바리 전쟁이 중요하다고 히니드가 말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상처는 이탈리아 점령이 남겼다고 덧붙였다. “이탈리아 전쟁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그가 말했다. 20세기 초 식민열강들의 추악한 기준으로 봐도 이탈리아의 남쪽 이웃나라 지배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리비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원주민 인구가 1912년 120만 명에서 1933년엔 82만5000명으로 줄었다. “인구 감소는 이탈리아가 취한 정책의 직접적 결과”라고 로널드 브루스 세인트 존이 말했다. 명망 있는 리비아 연구가인 그는 이탈리아가 탄압에 이용한 도구로는 강제수용소, 굶기기, “대학살에 육박하는 대규모 처형”이 있다고 말했다. 리비아 학교 어린이들의 강독 교재에는 “나는 이탈리아 정부의 통치를 받아 행복해요”라거나 “총통은 어린이를 매우 사랑하신다. 아랍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다” 따위의 글귀가 들어갔다. 리비아 동부의 바위투성이 언덕지대를 중심으로 격렬한 저항운동이 시작됐다. 저항운동의 영웅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흰 옷의 무슬림 성전 전사 오마르 알 무크타르였다. 이 ‘사막의 라이언’은 보수성향의 이슬람 비밀 분파인 세누시파의 제자였다. 교단 창립자는 1880년대 중반 사우디아라비아를 두루 여행하면서 금욕적인 와하비파 신도들과 교류했다. 오마르 알 무크타르 시절 세누시파는 엄격하면서도 복음 성격이 짙은 이슬람 변형 교리를 개발해 리비아 동부에서 급신장했다. 학교 건립이나 우물 이용 등의 편의 제공으로 추종자를 늘리기도 했다. 무크타르는 20년 동안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군을 괴롭히다가 결국 1931년 그들에게 붙잡혔다. 이탈리아군은 세누시 교단에 침투해 조직을 허물었다. 오마르 알 무크타르를 숭배하는 모습은 포스터, 광고 게시판, 자동차 앞유리의 스티커 등 오늘날에도 다르나 곳곳에서 보인다. 어쩌면 그의 얼굴이 카다피보다 더 흔할는지도 모른다. 옥외시장에서는 ‘사막의 라이언’ 비디오 해적판이 불티나게 팔린다. 하이에나 소사이어티에서 히니드는 내게 무크타르의 초상화를 보여줬다. 사담 후세인이 처형된 날 밤 자신이 그렸다고 말했다. 히니드는 알자지라 방송으로 후세인이 교수형 당하는 모습을 봤다. 무크타르의 초상화에 나온 슬픈 눈이 실은 후세인의 눈이라고 히니드가 설명했다. 다르나 주민들 눈에 이라크 독재자 후세인이 순교한 영웅의 현대판 대역으로 비쳤다는 사실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여기서는 모두들 후세인을 사랑한다”고 히니드가 말했다.
“결혼할 여자만 빼고 다 있다”
다르나 구시가에는 연두색 테두리에 온통 회반죽을 바른 소박한 외관의 하산 사원이 있다. 이곳에서 사담 후세인과 무크타르는 숭배의 대상이다. 정문엔 색이 바래고 너덜너덜한 오마르 알 무크타르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기자가 들렀을 때, 이 사원에서 기도 시각을 알리는 일을 하는 아누리 알 하사디도 오후 예배를 위해 막 도착했다. 회색 줄무늬 도포 차림에 멋진 코밑 수염을 기른 60세 노인이었다. 우리는 사원 로비의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그에게 이라크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치 문제에 끼어들기 싫은 듯 질문을 회피했다. 그러나 곧 “석유지! 석유 때문이야!”라고 외치듯 말했다. “미국인들은 석유를 필요로 하지. 그게 미국의 결점이야. 그들이 이곳에 과일을 사러 왔다고 생각하시오? 그들은 석유 때문에 왔소.” 리비아인들이 이라크에 가서 싸우는 게 옳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처음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자신은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석유’ 얘기도 있었던 터라 그 말은 믿기 어려웠다. 그의 친척 중 한 명인 아슈라프 알 하사디(18)에 관해 물어봤다. 신자르 문건에 따르면, 그 젊은이는 지난해 이라크로 떠났다. 아누리 알 하사디는 그를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중얼거리듯 아랍어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린애에 불과했는데….” 아슈라프 알 하사디는 하산 사원 인근의 향신료 가게에서 일했었다. 구시가의 번잡한 대로에서 가족이 운영하는 상점이다. 아슈라프는 키가 크면서도 약간 통통했고 늘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다녔다. 네 형제 중 막내인 그는 “가족 중에서도 말수가 가장 적은 아이였다”고 그의 형인 바크라는 말했다. 내가 찾아갔을 때 바크라는 그 향신료 가게의 금전등록기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뒤쪽 선반엔 과자류와 대추야자, 그리고 ‘바하라트’라는 향신료가 가득 진열돼 있었다.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바크라는 약간 경계하는 듯하더니 이내 기자를 맞이하며 차(茶)를 내놓았다. 그에게 아슈라프에 관해 아는 대로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크라는 최근 동생에게 결혼을 재촉했다고 한다. 아슈라프는 18세였지만 여전히 미혼이었는데, 사실 결혼하기엔 좀 어렸다. 왜냐하면 혼인에는 돈이 많이 들고 다르나는 비교적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곳 남자들은 20대 후반까지도 결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사디 가족의 향신료 가게는 꾸준한 소득을 올린 덕분에 아슈라프는 대부분의 친구보다 훨씬 더 좋은 형편이었다. 2006년에 어머니가 사망한 뒤로 그를 돌보는 것은 형들 몫이었다. 게다가 아슈라프는 이미 직업과 자가용 그리고 아파트도 갖고 있었다. 결혼에 필요한 조건을 갖췄다는 얘기다. 하지만 형들은 막내 동생이 약간 격정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데다 원칙을 중시하는 성격이라 걱정했다. 아슈라프는 알자지라 TV에서 방영한 이라크전쟁의 참상을 보고는 움찔하곤 했다. 바크라는 “동생은 절대로 영화를 보지 않았다. 늘 뉴스만 봤다”고 회상했다. 아슈라프는 퇴근 후엔 검은색 현대자동차를 몰고 집들이 빽빽이 들어선 구시가지를 돌아다니곤 했다. 그리고 결혼 문제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아 형들의 애를 태웠다. 또 다른 형 압델크하데르는 “그 애는 모든 걸 갖췄다. 결혼할 여자만 빼놓고 말이다”라면서 웃었다. 아슈라프는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하산 사원에서 보냈다. 다르나는 종교적인 도시다. 구시가 대로변의 상점들은 하루에 몇 번씩 사원의 기도 시간이 되면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예배에 참석한다. 그렇다 해도 “아슈라프는 지나치게 종교적이었다”고 형 수피안은 말했다. “신앙심이 너무 강해 사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2007년 여름 어느 날, 아슈라프는 형들을 찾아와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다. 약 1주일 후 전화벨이 울렸다. 아슈라프의 짤막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이라크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동생이 가족들에게 건 마지막 전화였다”고 형 수피안은 돌이킨다. 하사디 가족은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면서도 동생의 생사는 아직 모른다고 말했다. 아슈라프가 집에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바크라는 “신만이 아신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많은 젊은이가 이라크에 갔다가 돌아온다. 그곳에 6개월씩 머무르는 사람도 있고 2년씩 체류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자살폭탄 테러활동에 자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사디 가족의 사업은 같은 대로변에서 향신료와 과자 가게를 여러 개 운영할 정도로 번창한다. 다르나처럼 낙후된 지역에선 드문 일이다. 이들 가족의 상황을 보면, 이라크 내전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전사들의 참전 동기를 일반화해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난과 그 사회적 결과가 다르나의 젊은이들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도 트리폴리에서 활동하는 매춘부의 상당수는 리비아 동부 지역 출신들이다. 어떤 경우엔 그 매춘부들이 자기네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다. 트리폴리 남성들은 자신들이 동부 출신 매춘부들의 고객이 됨으로써 일종의 부의 재분배를 실천하는 셈이라고 농담한다(천박하지만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농담이다). 다르나의 청년들에게 실업은 곧 결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르나처럼 성적으로 보수적인 지역에선 우울한 현실이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욕을 강요 받게 된다면 사회적 부작용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지난해 봄 다르나를 떠나 이라크로 간 압델하킴 오칼리(28)도 그런 현실에 절망을 느꼈을지 모른다. 올해 4월 초 내가 그의 아버지 무스타파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무스타파는 처음엔 대화하길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곧 조용한 목소리로 아들의 행방을 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인근의 한 사원 뒤에 있는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낡은 스테이션 왜건을 타고 나타난 무스타파는 멀찌감치서 내 차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난 뒤에야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해변에 있는 그의 콘크리트 아파트는 매우 낡은 건물이었다. 다르나에서 내가 방문했던 어떤 집들보다도 더 소박했다. 무스타파의 아들 아와드(20)가 과자와 반석류 주스를 쟁반에 담아 내왔다. 무스타파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기자를 처음 봤을 때 어쩌면 내가 그의 아들 압델하킴을 데려왔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다고 말했다. 무스타파는 압델하킴이 이라크에 갈까 봐 오랫동안 걱정했다고 털어놨다. 기자가 다르나에서 대화한 대다수 주민처럼 그의 아들 역시 알자지라와 CNN 화면에 등장한 즐비한 시체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압델하킴은 또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의 재소자 학대 사건을 보고 분노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은 것은 팔루자 사태였다”고 무스타파는 말했다. 2004년 가을 저항세력의 거점으로 수니파 주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팔루자에선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다. 당시 압델하킴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라고 분개하면서 “저는 이라크로 갈래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스타파는 차를 타고 먼 거리의 출입국관리소까지 가서 압델하킴의 출국을 허용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르나에서 택시기사로 일한 적이 있어 지리를 잘 아는 압델하킴은 결국 도시를 빠져나갔다. 압델하킴이 결혼했느냐는 내 질문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그의 형 중 한 사람은 킬킬거리며 “맏형도 아직 결혼을 못했다”고 말했다. 아버지 무스타파는 꾸짖는 목소리로 “압델하킴은 월급도 못 받는 처지인데 어떻게 결혼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러곤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듯 “그 아이도 이젠 성인이니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우리의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무스타파는 아들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고 애쓰는 듯했다. 그는 특히 막내아들인 아와드를 걱정했다. 그는 아와드를 힐끗 쳐다보면서 “여권이 없지만 저 아이도 떠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러곤 눈을 크게 뜨면서 “한 명이면 족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방의 한쪽 바닥에 앉아 있던 아와드는 자신은 아무 데도 갈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곧 이렇게 덧붙였다. “만일 누구든 떠나고 싶다면 그런 생각을 비밀로 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떠날 계획이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와드의 아버지가 왜 막내를 예의주시하는지 짐작이 갔다. 기자가 아와드에게 형 압델하킴이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다. 형한테는 근육도 없다”고 말했다. 또 아와드에게 압델하킴 형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자 그는 기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처럼 생겼다.” 오칼리 가족은 압델하킴으로부터 소식이 끊긴 지 1년이 넘었으며, 그의 죽음을 통보하는 전화도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기자가 그 집을 떠나기 전 무스타파는 한 가지를 제안했다. 다가가기 어려운 머나먼 나라인 미국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로 기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필사적인 태도로, 무슨 음모라도 꾸미듯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을 집으로 데려올 방법이 있다면 당신에게 낙타를 제공하겠소.”
“이제 남은 사람은 나 하나뿐”
그렇다면 “왜 다르나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변은 절망감, 자긍심, 종교적 열정 등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심리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요인들은 개별적으론 많은 이슬람권 국가에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곳은 리비아 북부의 해변 도시 다르나뿐이다. 이 도시의 상황은 리비아 외교관들에겐 골칫거리다. 부시 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래 리비아는 미국이 거둔 몇 안 되는 승리 중 하나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1980~90년대에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은 국가가 후원하는 테러리즘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그를 “중동의 미친 개”라고 비난했다. 카다피 정권은 1988년 270명이 사망한 팬암 103기 폭파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비난 받았다. 또 미군 두 명이 죽은 베를린 디스코장 폭탄 테러에도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트리폴리에 대해 보복 공습을 단행했다. 그러나 2003년 카다피 정부는 리비아에 대한 국제적 경제제재를 해제시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데 동의했고, 3년 뒤 미국 국무부는 마침내 리비아를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다. 백악관은 이를 중동의 적성국가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겁을 먹었다는 증거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신자르 문건에도 불구하고 미국 관리 중 카다피가 이라크에 전사들을 파견한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이라크 전쟁에 가담한 성전 전사들이 새로운 전투기술을 습득한 채 리비아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미국인뿐 아니라 카다피 자신에게도 악몽이다. 오랫동안 다르나 일대는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는 이슬람주의 반군의 온상이었다. 1990년대 중반 그의 보안부대는 공격용 헬리콥터들을 동원해 다르나의 반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자칭 ‘리비아 이슬람주의 전투 그룹’(LIFG)이라는 반군 단체를 소탕하려는 작전이었다. 요즘 다르나는 평온해 보이지만, 정복 차림의 경찰들이 배치된 검문소가 많이 늘었다. LIFG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다수 주민은 말을 하지 않았다. 리비아인 자원병들을 이라크로 보내는 데 찬성하는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자르 문건을 보면 다르나엔 이라크 저항세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다르나의 청년들이 어떤 방식을 거쳐 전사로 충원되는지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러나 일단 전사로 선발된 사람들은 개별적으로보다는 소규모 집단으로 이라크에 파견되는 경우가 많다. 다르나 루트는 이집트와 시리아로 연결되는데, 자원병들은 이들 나라에서 현지 연락책들의 도움으로 몰래 이라크에 잠입한다. 이 루트가 가장 최근에 가동된 것은 지난해 8월이었다. 지금도 가동 중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일부 분석가들에 따르면, 리비아의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선 이라크와 리비아 중 어느 곳에서 성전을 벌여야 할지를 놓고 의견 대립이 나타나고 있다. 반군 조직이 다시 세를 규합한다는 조짐도 있다. 트리폴리에 주재하는 한 서방 외교관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카다피 정권의 국내 첩보국 고위 간부 한 명이 다르나에서 암살됐다. 그 피살자는 잔인한 심문 방식으로 악명이 높아 많은 적을 갖고 있었다고 그 외교관은 말했다. 따라서 그가 반드시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암살됐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는 널리 알려진 인물인 데다 도살꾼 같은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었다.” 카다피는 다르나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는 듯하다. 석유가가 오르자 카다피 정권은 가난한 동부 지역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려 노력해 왔다. 다르나로 이어지는 간선도로 변에 약 2000가구의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2009년 말까지 지역 주민 1만3000명을 입주시킨다는 계획이다. ‘계곡 아파트’로 알려진 이 단지의 대부분 가구는 아직 비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젊은 부부와 독신자들에게 아파트를 무상 공급할 계획이다. 하지만 올해 초 카다피는 사회 서비스 분야를 시범적으로 민영화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의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 이념에서 상당히 벗어난 계획이다. 주재국 정부의 계획에 관한 언급인 만큼 익명을 요구한 트리폴리의 한 서방 외교관은 “카다피의 계획은 급진적 자유주의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유가가 100달러를 넘었다고 해도, 그런 정책은 단기적으론 많은 리비아인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신자르 문건 폭로 이후 미국 관리들은 리비아를 은근히 압박해 왔다. 지난해 11월 델 데일리 미군 장성이 이끄는 사절단이 트리폴리로 날아가 시리아 고위 관리들을 만났다. 데일리는 대테러 전문가로 최근 국무부로 발령 난 사람이다. 신자르 문건에 관해 지적을 받은 리비아 관리들은 처음엔 그 문건의 내용을 부인했다. 그러나 미국 사절단이 증거를 제시하자 그들도 마침내 문제점을 시인했다. 미국 관리들은 리비아 정부 측의 협조에 몹시 반가워하는 분위기다. 그들은 또 지난 몇 달간 이라크로 잠입하는 리비아인 대원의 수가 감소했음을 시사하는 조사자료에 고무돼 있다. 한편 미국의 전략분석가들은 그런 흐름을 차단하는 혁신적인 방안들을 모색 중이다. 웨스트 포인트의 대테러 전문가 피시먼에 따르면 이라크 저항세력은 리비아인 전사들을 이라크로 잠입시키기 위해 밀수업자들을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밀수업자들의 목적은 오로지 돈을 버는 것이다. 피시먼은 그런 밀수업자들과 싸우기보다는 그들을 활용하는 게 현명하다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국은 그들을 매수해야 한다.” 다르나의 자택에서 아브드 알하미드 빈알리는 자신의 동생이 어떻게 이라크 저항세력에 가담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의 동생 아브드 알살람은 인터넷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고 LIFG 전사들과 접촉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아브드 알살람의 첫 번째 전화가 집으로 걸려온 지 얼마 안 돼, 이라크 라마디에서 그의 두 번째 전화가 왔다. 자신이 “작전”을 하러 간다고 했다. 4일 뒤 전화벨이 울렸을 때 아브드 알하미드는 수화기 저쪽에서 한 낯선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브드 알살람은 순교자입니다.” 아브드 알하미드는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두 손을 맞잡아 비틀면서 이렇게 말했다. “동생이 순교했을 때 나는 정말로 기뻤다. 내 생각엔 동생이 떠난 게 옳았다. 무의미하게 죽는 사람들이 많지만 동생은 달랐다. 나 자신도 순교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제 아브드 알하미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젠 나도 떠나지 못한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는 거실에 걸려 있는 순교자 동생의 대형 초상화를 쳐다봤다. 생은 거무칙칙한 동네에서 마침내 자신만의 자리를 찾았다. 벽에 못질을 해서 걸어놓은 금빛 테두리의 액자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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