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철밥통 깨지고 머슴만 남았다”

“철밥통 깨지고 머슴만 남았다”

어디로 갈까? 정부조직 개편 이후 민간 진출을 고심하는 중견 공무원이 늘고 있다.

공무원들의 민간행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실무업무를 담당하던 3~4급 중견 공무원들의 이직이 늘고 있다. 이는 ‘머슴론’을 펴는 MB정부의 강도 높은 정부조직 개편으로 ‘관료 메리트’가 옛날만 못해졌기 때문이다. 한창 일할 30~40대 엘리트 공무원들이 빠져나가면서 정부조직의 허리가 약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공무원 사회에 이직 바람이 불고 있다. MB정부 들어 ‘미운 오리’로 전락한 공무원들이 공직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하나 둘 자리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머슴처럼 일할 바엔 비전 없는 공직에서보다는 민간에서 능력을 펼쳐 좋은 대우를 받겠다”고 생각하는 공무원이 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최근 금융위원회(금융위), 금융감독원(금감원), 농림식품부 등 정부조직 곳곳에서 인력 이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조직 내에서 허리 역할을 담당하는 3~4급 공무원들이 주로 이탈하고 있다. 그동안 고위 관료들이 민간회사로 자리를 옮긴 경우는 많았지만 실무업무를 담당하는 3~4급 공무원들의 이직은 드문 일이었다.
미래 불안하자 꼬리 무는 이직
정부 관계자는 “지금까지 정부조직 내에서 3~4급 공무원들의 이직률이 가장 낮았다”며 “하지만 정부조직 개편 이후 이직을 생각하는 젊은 공무원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인력 이탈이 가장 눈에 띄는 곳은 금융위와 금감원이다. 정부조직 개편으로 ‘한 지붕, 두 가족’에서 남남으로 갈라선 금융위와 금감원에서는 최근 두 달 사이 무려 10여 명이 사표를 내고 민간행을 택했다. 금융위에서는 지난 5월 15일 김영모(45) 혁신행정과장이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자리를 옮겼다. 행정고시 30회 출신인 김 과장은 서울대 법대와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온 미국 변호사로 경제기획원, 재정경제부 등에서 요직을 맡은 엘리트 관료다. 지난해 8월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로 자리를 옮긴 김 과장은 금융위 설립 과정을 주도하는 등 능력을 인정받던 인재였다. 최근 인사 및 조직개편이 진행 중인 금감원에서는 3~4급 수석 및 선임조사역들이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금융회사로 대거 이탈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장동헌(46·3급) 금감원 조사연구실 증권연구팀장. 그는 금감원 3급 출신으론 처음으로 외국계 자산운용사인 얼라이언스번스타인의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겨 화제가 됐다. 장 팀장은 증권업계의 원조 스타 펀드매니저 중 한 명으로 1990년대 말 미래에셋증권의 ‘박현주 펀드’와 쌍벽을 이룬 한국투자신탁 ‘장동헌 펀드’의 주인공이다. 2005년 8월 금감원에 스카우트된 그는 당시 업계 관계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능력을 인정받아 을(금융회사)에서 갑(공무원)으로 화려하게 변신했기 때문. 구조개편(금융위-금감원 이원화)으로 지금은 금감원의 위세가 다소 위축됐지만 당시만 해도 금감원은 금융회사들엔 ‘절대적 갑’의 위치에 있었다. 그랬던 그가 갑의 메리트를 포기하고 다시 을로 돌아온 것이다. 장 팀장에 앞서 금감원에서는 증권감독국 경영지도팀 한영일 선임조사역(4급)이 외국계 증권사인 맥쿼리증권으로 이동했다. 또 퇴직연금팀의 선임조사역 2명(4급)도 미래에셋증권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공시심사실, 국제협력실의 조사역들도 벤처투자회사 등으로 이직했다. 이 밖에 농림식품부에서는 서기관급 2명이 최근 사표를 내고 민간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젊은 공무원들 사이에서 이직 바람이 불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MB정부의 대대적인 정부조직 개편 때문이다.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MB정부가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정부조직 내에서 승진 경쟁이 치열해졌다. 실례로 행정안전부는 최근 국·과 등 하부조직 규모를 25% 축소하는 조직개편안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과장 40명의 자리가 없어졌다. 3~4급 공무원들의 승진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 셈이다. 정부조직 관리의 주무부서인 행안부가 강도 높은 슬림화 작업을 단행하면서 여타 부처들도 비슷한 조직개편을 준비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금감위와 금감원도 감독 및 검사 부서 축소, 정원의 10% 감축 등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진행 중이다. 금융감독당국 관계자는 “조직개편으로 기존 인력의 10%가량을 축소하고, 부서와 업무를 통폐합하면서 일은 배로 늘었지만 승진 가능성은 더욱 빡빡해졌다”며 “최근 30~40대 공무원의 이직이 많은 것도 더 나이를 먹기 전에 일찌감치 민간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 낫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전했다. 게다가 이번 정부에서는 관료보다 민간 출신을 우선하는 인사를 단행하면서 기존 공무원들의 승진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정부가 장관 인사는 물론 산하 공기업 인사에서도 관료 출신보다는 민간 전문가를 우선하면서 민간행을 선택하는 경향도 있다. 민간 경력을 미리 쌓아 향후 화려하게 컴백하겠다는 목적도 있는 것 같다”며 최근 공무원들의 이직 배경을 설명했다.
MB정권의 부정적 관료관도 한몫
일각에서는 공무원을 마치 ‘부패의 상징’처럼 여기는 정부의 시각이 젊은 인재들을 밖으로 내쫓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 MB정부의 관료개혁은 그 어느 정부 때보다 강도가 높고 파격적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무원 정신 차려라” “공무원은 국민의 머슴이다”고 말할 정도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열린 국무회의에서 “기업에 이 사람들 써 달라고 부탁하고…제발 그런 ‘나쁜 일’ 좀 하지 말라.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니까 모피아란 소릴 듣는 것 아니냐”며 대놓고 관료사회를 비판한 바 있다. 정부 각 부처는 물론 산하 공기업 인사에까지 관료보다는 민간 출신이 우대받고 있는 것도 이 대통령의 이 같은 관료관(觀)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의 관료사회에 대한 반감은 과거 ‘을의 경험’에서 만들어졌음은 물론이다. 27년간 기업인으로서 공무원들을 상대했던 만큼 관료사회와 각종 규제에 대한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이 대통령의 관료관이 공무원 이탈이라는 부작용을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청와대는 물론 사회 전반에 짙게 깔린 관료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공직생활에 회의를 느끼는 젊은 인재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윗사람에게 핀잔만 듣고, 부패의 온상으로까지 여겨지면서 ‘버려진 아이들’이라는 푸념마저 나오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누가 소신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다. 한창 일할 3~4급 공무원들의 민간행이 잇따르면서 정부조직 내부에서는 ‘허리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효율성을 높이려고 했던 MB정부의 ‘작은 정부’가 젊은 인력들의 이탈로 오히려 비효율성만 커진 ‘작은 고령화 정부’로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최근 금융회사로 자리를 옮긴 B관료는 “3~4급 공무원은 모든 정부부처 내에서 가장 중요한 일꾼들”이라며 “관료사회 개혁도 좋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공무원이 머슴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줘야 한다”고 충고했다.


중견 공무원들이 떠나는 이유 ■정부조직 개편으로 승진 문턱 높아지고 대우는 박해져 ■관료사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공직생활 회의감 커져 ■정부 부처 및 산하 공기업 인사에서 민간 출신 우대해 ■30~40대 ‘늦기 전에 자리 잡자’는 현실 인식 강해져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작가 하지원의 가면, 그리고 자신과의 공존

2이더리움 현물 ETF 상장 승인…“비트코인 1억 재돌파하나” 기대감

3고물가·고금리 여파에…중산층 5집 중 1집 ‘적자 살림’

4학교폭력 경미해도 주요 대학 수시·정시에서 치명타 입는다

5욕 잘하는 여성 CEO

6“EV6 보다 2.5배 더”...기아, EV3에 운명 걸었다

7“제네시스 때문에 안 팔려”...수입차 지형도 바뀌었다

8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정상 궤도 오른 제네시스

9제1121회 로또 1등 11명...1등 당청금 25억2451만원

실시간 뉴스

1작가 하지원의 가면, 그리고 자신과의 공존

2이더리움 현물 ETF 상장 승인…“비트코인 1억 재돌파하나” 기대감

3고물가·고금리 여파에…중산층 5집 중 1집 ‘적자 살림’

4학교폭력 경미해도 주요 대학 수시·정시에서 치명타 입는다

5욕 잘하는 여성 C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