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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퍼 부자도 ‘나만의 명품’

한국 수퍼 부자도 ‘나만의 명품’

중견기업 사장의 부인 A씨는 다음주에 남편과 함께 떠날 크루즈 여행에서 입을 옷이 필요했다. 보름간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를 도는 일정이다. A씨는 서울시내 한 백화점 명품관의 퍼스널 쇼핑(PS) 실장과 만날 약속을 했다. 보통은 백화점에 마련된 PS 전용 라운지를 방문해 1 대 1 쇼핑을 하지만 이번엔 PS실장이 의상 몇 점과 보석류를 골라 A씨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직원들이 A씨의 신체 사이즈와 선호하는 브랜드는 물론 지중해 지역의 날씨와 현지 패션까지 고려해 화려한 원피스 종류를 준비해 왔다. 저녁에는 한 외국 명품 브랜드의 VIP 대상 트렁크 쇼를 찾았다. 몇 년 전부터 국내에서도 대형 패션쇼 대신 VIP 고객을 초청해 소규모 고급 파티 형식으로 신상품을 선보이는 트렁크 쇼가 유행한다. A씨는 이 브랜드의 가방에 자신의 이니셜을 수놓은 맞춤 디자인을 의뢰했다. 여행 당일 A씨 부부는 수입차 업체가 제공하는 에어포트 서비스 패키지를 이용할 생각이다. 공항 근처 딜러 매장까지 자신의 차를 이용해 가면 수입차 업체가 최고급 차량으로 공항까지 배웅해 주고, 여행 기간 동안 자신의 차량을 점검하고 수리해 준다. 포브스코리아 5월호에 따르면 대한민국 부유층은 계속 늘어난다. 재산 5000억원이 넘는 부자가 올해 43명으로 지난해보다 16명 늘었고, 재산이 1조원이 넘는 부자는 지난해보다 3명 많은 12명이 됐다. 이 잡지가 집계한 한국 100대 부자의 재산은 모두 61조9559억원으로 지난해보다 14조원 넘게 증가했다. 국세청의 ‘국세통계연보’를 보면 2006년 종합소득금액이 5억원 이상인 신고자는 6758명으로 전년보다 23.7% 늘었다. 한편 전체 보유자산이 50억원 이상인 대한민국 부자의 수는 13만~17만 명으로 추산된다(2006년 말 한국경제신문 통계 기준). 부자들의 씀씀이는 불황을 모른다. 올해 주요 백화점 명품관의 매출 신장폭이 일제히 늘었다. 롯데백화점 홍보실 윤현식 계장은 “평균 20% 초반대의 매출 신장률을 기록했던 애비뉴엘이 올 4월에는 전년 대비 27.8%, 5월에는 38.5%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고 말했다. 차별화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수퍼 부자’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럭셔리 산업도 빠르게 진화한다. 최근 10년간 소득 수준과 외국 브랜드 제품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소위 명품의 대중화 현상이 생겼다. 명품 브랜드가 더 이상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니란 얘기다. 많은 20∼30대 여성이 ‘스피디’니 ‘네버풀’이니 하는 루이뷔통의 가방 라인을 친구 이름 외우듯 줄줄이 꿰고, 그들 중 상당수가 실제로 진품을 소유한다. “버스나 지하철 속 대학생들이 자신과 똑같은 럭셔리 제품을 들고 다닌다는 사실에 수퍼 부자들이 그들과는 다른 특별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고 한 럭셔리 업계 관계자는 말했다. 그 답은 나만을 위한 맞춤 서비스 아닐까? 자신이 직접 고른 원사로 이탈리아 장인이 맞춤 제작한 3800만원 상당의 남성복, 여행사 직원이 집으로 찾아와 나만의 일정을 짜주는 1800만원짜리 여행 상품, 100평 이상의 집만 상담이 가능한 외국 가구 브랜드의 3D 입체 홈스타일 컨설팅, 일련번호가 매겨진 외국 디자이너의 한정판 제품을 소량으로 들여와 판매하는 고급 편집매장. 요즘 VIP 고객을 대상으로 호황을 누리는 국내 럭셔리 시장의 면면이다. 모두 개인별 맞춤 서비스와 최고의 품질로 1%의 특별함, 남다른 희소성을 선사하는 상품들이다. 특히 서구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맞춤 남성복 시장이 급성장한다. 국내 최고의 대기업 회장단이 애용한다는 제일모직의 최고급 남성복 브랜드 란스미어의 남훈 팀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 남성복 시장에서 기성복이 차지하는 비율은 96%로 압도적으로 우세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유명 브랜드의 기성복보다 세상에 단 한 벌뿐인 나만의 옷을 찾는 수요가 늘면서 본격적인 맞춤복 시장이 열렸다. “고객 한 명 한 명의 옷장을 관리해 준다는 생각으로 대한다”고 남훈 팀장은 말했다. “브랜드를 키우려는 목적보다 고객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또 셔츠와 구두를 맞춰 입는 법, 양복의 컬러 선택법까지도 알려준다.” 란스미어의 맞춤 정장은 한 벌에 300만∼700만원대며 원단에 따라서는 3000만원 이상을 호가하기도 한다. 최고급 맞춤복 업계는 일반 대중을 상대하지 않기 때문에 광고 대신 입소문으로 고객을 유치한다. 청담동에서 예약제로 매장을 운영하는 고급 맞춤 양복점 래리치의 관계자는 “50∼60대의 기업 CEO들이 주된 고객층이며 아버지와 아들 등 가족 단위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수 미주라(당신의 사이즈에 맞는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라인, 브리오니에 이어 키톤, 스테파노 리치 등 최고급 남성 정장 브랜드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유명 백화점들도 고객들의 요구에 부응한 맞춤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앞서 말한 ‘퍼스널 쇼핑’이 대표적이다. PS는 매출 기준으로 선정된 VIP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원스톱 1대 1 쇼핑 서비스를 말한다. 보통 명품관에 전용 라운지와 상담 직원을 두고 있다. 40∼50대 여성 고객이 대부분이다. 롯데백화점 명품관 애비뉴엘의 양유진 PS 담당 실장은 “파티나 모임에 나갈 때나 계절별로 필요한 의상과 보석을 장만하는 고객이 많다”면서 “이분들이 쇼핑 예약을 하면 거의 100% 매출이 생긴다”고 말한다. PS 고객들을 위해서는 일률적인 서비스 대신 개인의 취향에 맞춘 선물을 준비하거나 취미가 비슷한 고객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롯데백화점은 얼마 전 VIP 회원들을 대상으로 골프대회를 열어 1등을 차지한 고객에게 600만원 상당의 개인 맞춤 여행 상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다른 고객들처럼 깎아주는 서비스를 가장 좋아한다”고 양 실장은 덧붙였다. 럭셔리 업계의 불문율 중 하나는 철저한 사생활 보호다. 많은 럭셔리 업체가 VIP 마케팅을 통해 부유한 고객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지만 일반에 공개하길 꺼린다. VIP 고객 간에도 되도록 마주치지 않도록 예약 시간을 조정하고 철저히 1 대 1 상담을 진행한다. “유명인사가 찾아와 얼마의 매출을 보장할 테니 매장 문을 닫고 개인 쇼핑 시간을 달라고 미리 요구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익명의 업계 관계자는 말했다. VIP 고객을 위한 별도의 출입 통로와 VIP룸을 마련하는 건 기본이다. 이런 사실은 아무리 개별화된 맞춤 서비스를 표방하는 럭셔리 업체라도 모든 손님을 똑같이 특별하게 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고객의 ‘옷장을 관리’해 주기란 어렵다. 수퍼 부자 고객 중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매출을 올려주는 VVIP고객이 따로 존재한다”고 업계 관계자는 말했다. 이러한 개별적인 맞춤 서비스와 별도로 비슷한 취향과 재력을 가진 수퍼 부자들 간의 커뮤니티도 늘어난다.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다. 타워팰리스 거주민 모임 같은 자생적인 조직도 있지만 업계가 연결해 주는 경우도 많다. 고급 호텔에서 VVIP를 모아 와인 펀드에 공동 투자한다든가, 스포츠센터에서 도서관이나 갤러리를 설치해 공통의 문화 코드를 가진 고객들을 엮어주는 방식이다. BMW코리아의 경우 3, 5, 7 시리즈(숫자가 클수록 차도 크다)별로 고객층에 맞는 모임을 개최한다. “젊은 층이 많은 3시리즈는 트렌디한 파티, 30~40대 전문직 위주인 5시리즈는 재테크나 자녀교육 강좌, 고객 연령대가 높은 7시리즈는 골프나 가족참여 이벤트를 열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주양예 BMW코리아 홍보부장이 말했다. 한강의 고급 요트 모임도 최근 수퍼 부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커뮤니티다. 한강에 띄워진 가장 큰 요트는 국내 한 기업이 구입한 68피트(대략 21m) 크기의 파워요트로 회원제로 운영된다. 두 번째로 큰 40피트 요트는 30여 명이 공동 구매해 공유하고 있다. VIP 마케팅 컨설팅회사 더프레스티지앤코의 이기훈 대표는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로 물길이 바다로 연결되면 요트 문화가 활성화돼 향후 5년 안에 한국 부자들의 ‘마이 요트’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앞으로는 동해안에 7~8개의 요트 정박 시설도 갖춰질 예정이다. 요트판매업체 관계자는 “최근 3000만~4000만원 하는 가족용 보트를 비롯해 20억~30억원을 호가하는 요트도 1년에 한 척씩 팔린다”면서 “고객들은 대부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업인들이다”고 말했다. “요트는 단순히 재력이나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차별화된 취향의 상징이다”고 이기훈 대표는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내의 수퍼 부자를 위한 럭셔리 시장이 외국에 비해 한정돼 있다고 말한다. 이 대표는 “상대적인 볼륨(양)의 문제”라고 진단한다. 국내 럭셔리 시장의 상당 부분을 외국 브랜드가 차지하는 반면 외국 브랜드의 입장에서는 한국 VIP들의 매출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아 초고가의 한정판 제품이나 VIP 행사 초청 등에 끼지 못한다고 그는 말한다. “맞춤 정장 브랜드인 브리오니는 1년에 한 번씩 크로아티아 부근의 휴양지 브리오니 섬에 전 세계 고급 딜러와 VIP 고객을 초청해 폴로 경기와 패션쇼, 파티 등의 고급 행사를 개최한다. 이런 행사를 한국에서 기대하기도 어렵거니와 한국 VIP 고객 중 초청되는 이들도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도 지난해 전 세계에 매장이 9개밖에 없는 프랑스의 최고급 가방 브랜드 고야드가 갤러리아 백화점에 입점하고, 명품 브랜드들의 플래그십 스토어(단순한 제품 판매가 아니라 브랜드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고급매장)가 꾸준히 문을 여는 등 국내 럭셔리 시장의 성장세는 부인할 수 없는 흐름이다. 특히 고야드는 프랑스 본사의 트렁크 장인이 방한하는 철저한 맞춤 서비스로 낮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전년 대비(3~5월) 62%의 매출 신장률을 기록했다. 시계 역시 3000만원대 이상의 고급 시계 매출이 증가하면서 브레게, 오데마 피게, 파텍 필립 등 최고가 시계 브랜드가 앞다퉈 국내에 들어오고 있다. 상위 1%의 특별함을 좇는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한국 수퍼 부자들의 ‘놀이터’는 더욱 넓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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