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 사슬에 ‘물류 동맥’ 끊긴다
다단계 사슬에 ‘물류 동맥’ 끊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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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화물연대 파업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직후인 2003년 여름. 참여정부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는 ‘물류중심 로드맵’의 일환으로 7대 추진과제를 선정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물류거래 투명화’였다. ‘화주(貨主)→물류업체→주선업체→운송업체→차주(車主)’로 이어지는 다단계 물류체계를 개선하겠다는 취지였다. 구체적 안도 나왔다. ‘가맹본부→가맹점→화주’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형 유통구조를 만들자는 다소 혁신적 제안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에 따라 화물자동차 운전자의 기대도 높아졌다. 화물차 운전자 김세철(41)씨는 “당시 참여정부 대책이 왜곡된 화물운송 시장 구조를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로부터 5년이 훌쩍 흐른 2008년 6월. 화물차 운전자들은 다시 운전석에서 내려왔다. 5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다. 주장하는 내용도 판박이다. 결론은 다단계 구조 때문에 먹고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다단계 물류체계 해소 대책이 공염불에 그쳤다는 얘기다.
#사례2= 2006년 초. SK는 ‘내트럭프랜즈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단계 물류체계를 혁신해 ‘화주-차주의 직거래’가 가능한 원스톱 시스템을 마련했던 것. 참여정부 관계자들은 ‘혁신사례’라며 찬사를 늘어놨다. 정책적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뿌리 깊은 다단계 물류체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나왔다.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내트럭프랜즈 서비스’는 현재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가입회원은 불과 6500명. 하루 거래 건수도 2000건에 머물러 있다. 다단계 물류체계를 개선하고자 ‘화주-차주 직거래 시스템’을 도입했지만 정작 시장에선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혁신이 관행 앞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그만큼 물류업계의 다단계 뿌리는 깊다. 어설픈 미봉책으로 해소될 수 있는 사안이 결코 아니다. 화물연대 파업이 진정세로 접어들고 있다. 운송료 인상폭을 놓고 대치하던 화물연대와 컨테이너운송사업자협의회가 ▶운송료 19% 인상 및 셔틀 운송료 10% 인상 ▶2009년부터 표준요율제 시범실시 및 법제화 추진 등에 잠정 합의(6월 19일)한 것이다. 이 협상이 곧 ‘종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휴전’이라는 표현이 맞다. 운송료 인상 등으로 땜질을 해놓은 탓에 화물연대의 집단행동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실제 다단계 물류체계를 개선할 수 있는 ‘표준요율제’가 도입될지도 미지수다. 정부는 “당장 도입은 어렵고 용역 연구에 착수하겠다”는 입장이다. 검토한 후 결정하겠다는 취지다. 다단계 물류체계 뿌리를 뽑을 만한 뚜렷한 합의내용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근본적으로 물류체계가 잘못돼 있다”며 “이번 기회에 전체 물류체계를 다시 점검토록 지시했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때 실패했던 것처럼 이 말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부경대 윤영삼 교수는 “화물연대 파업은 간단한 처방만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며 “특히 화물연대가 집단행동을 하면 국가경제는 큰 타격을 받기 때문에 이들이 주장하는 본질을 찾아 대안을 마련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화물연대가 때만 되면 들고일어나는 이유는 물류구조가 다단계 등으로 왜곡돼 있기 때문”이라며 “이를 바로잡는 것이 정부 당국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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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단계 거래구조 개선 ‘급선무’ 현재 우리의 물류 거래구조는 ‘화주→주선업체→운송업체→차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본구조다. 각 단계 사이엔 수없이 많은 주선·알선업체 및 운송업체가 ‘점조직’ 형태로 존재하면서 수수료를 챙긴다. 가령 화주 A기업이 부산항에 도착한 화물을 서울로 옮길 때, 주선업체에 물량을 맡긴다. 이 과정에서 통상 7~8%의 수수료를 뗀다. 주선업체는 다시 운송업체에 물량을 넘기고, 운송업체는 마지막 단계에 있는 차주에게 배송을 지시한다. 화주가 주선업체에 물량을 맡기면 이 업체가 운송업체를 통해 차주를 모집하는 복잡한 다단계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차주는 수수료가 대폭 떨어져 나간 운송요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서울~부산 간 운송료가 62만7000원인데, 차주는 불과 36만원을 받는다”는 불만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단계 물류체계가 형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화물 공급량 대비 화물차 운전자가 지나치게 많아서다. 이는 정부 정책 실패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지적이다. 김영삼 정부는 화물운송 시장의 진입을 낮춘다는 명목으로 화물차 면허제를 등록제로 전환했다. 마침 IMF가 터지자 노동시장에서 쫓겨난 수많은 사람이 궁여지책으로 핸들을 잡았고, 화물차 또한 급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9년 14만3000대에 불과하던 화물차는 2007년 말 33만 대까지 증가했다. 10년 만에 150%가량 늘어난 셈이다. 반면 화물량은 99년 4억1만t에서 2007년 5억5만t으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당연히 화물차 운전자들의 공급과잉 현상이 초래됐고,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화주와 차주를 연결해주는 주선업체도 늘어났다. 운수노동정책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주선업체는 1만1586개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운송업체(5947개)보다 두 배가량 많은 수치다. 주선업체들이 높은 수수료를 떼도 화물차 운전자로선 핸들을 잡을 수밖에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물류업계의 다단계 구조가 고착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실제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에선 화주→운송사업자(운수회사), 화주→주선사업자→운송사업자 구조만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다. 두 단계 이상의 다단계 구조는 불법이다. 하지만 실상은 크게 다르다. 정부에서조차 평균 3.6단계의 다단계 알선구조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할 정도다. 교통연구원 연구 결과에서도 불법 다단계 비율이 9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영삼 교수는 “김영삼 정부의 화물운송시장 규제완화책 때문에 화물차, 화물운송노동자 모두 공급 초과상태가 됐다”며 “이로 인해 운송료가 표준원가를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상수 전국운수산업노조 사무처장도 “화물운전자 공급 과잉으로 공정거래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단계 물류체계가 꼭 화물운전자 과잉 공급 때문에 빚어진 것은 아니다. 대기업 화주들의 책임도 없지 않다. 대기업 화주들이 만든 물류자회사가 다단계 물류체계를 심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1자 물류회사부터 살펴보자. 1자 물류회사는 제조부터 운송까지 모두 담당하는 업체를 말한다. 양말을 만들어 배달해주는 영세기업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는 3자 물류회사가 대세다. 3자 물류란 화주가 물류 분야 전체를 물류전문업체에 위탁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제3자가 물류를 대행하는 아웃소싱을 말하는데, ‘TPL·3PL’이라고도 한다. 미국, 유럽의 3자 물류비중은 60~90%선으로 매우 활성화돼 있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은 여전히 자회사를 통한 2자 물류를 선호한다. 대기업들이 물류자회사를 앞다퉈 설립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대표적 물류자회사로는 글로비스(현대자동차그룹)가 꼽힌다. 문제는 이 같은 2자 물류자회사들이다. 이들은 안정적 화주(모기업)를 가지고 있다. 가령 글로비스는 물량 대부분을 현대자동차그룹으로부터 받는다. 이 때문에 물류기업의 경쟁력 척도로 불리는 창고, 배송시스템, 차량 등을 확보할 이유가 없다. 단지 화주로부터 받은 안정적 물량을 또 다른 운송업체에 주선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실제 대기업 물류자회사인 A사의 자기 차량은 120대다. 전체 운행대수(7500대)의 16%에 불과하다. 부족한 차량은 300여 개가 넘는 협력업체를 이용한다. 물류자회사 B업체는 2.5t 화물차가 아예 없다. 역시 또 다른 운송업체의 차량을 이용한다. C업체도 자기 차량이 10대가 안 된다. 화물차가 부족하다는 것은 또 다른 운송업체가 필요하다는 의미고, 이에 따라 불필요한 단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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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 과잉 해소 방안 마련해야 대기업 2자 물류자회사의 문제는 또 있다. 대기업 화주는 물류자회사를 키우기 위해 일감을 몰아줄 수밖에 없다. 현대차 글로비스가 설립된 지 4년 만인 2005년 매출 1조원을 돌파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다단계 물류체계를 개선한 ‘화주-차주 간 직거래 방식’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앞서 사례로 언급했던 SK ‘내트럭프랜즈 서비스’가 실패한 것도 대기업 화주들이 물량을 공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내 트럭’에 가입한 회원 가운데 대기업 화주는 없다. 회원 100%가 차주다. 업계 관계자는 “자기 이문이 깎이는데 누가 ‘화주-차주’ 직거래를 도와주겠느냐”며 “화주 역시 자신들의 물류 자회사 또는 계약돼 있는 물류업체를 배제하고 SK에너지에 물량을 공급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단계 물류체계를 개선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일단 화물차 운전자의 과잉공급을 단기간에 해소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참여정부가 화물운송업체 갱신 등록제를 실시했음에도 화물차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2004년 도입된 화물운송업체 갱신등록제는 5년 주기로 화물운송업체의 등록사항 충족 여부를 심사하는 것을 말한다. 화물차 수급조절을 위해 도입됐지만 성과는 거의 없다는 분석이다. “1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2009년까지 3600대의 화물차를 사겠다”는 이명박 정부 대책에 대한 실효성 논란이 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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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대한통운 ‘다단계’ 없애기 실패 이유 |
“쉽게 깰 수 있다고 믿었던 게 패착” 다단계 물류체계는 ‘철옹성’이다. 어설픈 대책으로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로 인해 낭패를 본 기업도 있다. SK에너지, 대한통운이 그들이다. “SK에너지, 대한통운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다단계 물류체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물류업계의 병폐 다단계 구조를 무너뜨리겠다.” 2006년 SK에너지는 이 같은 뜻을 밝히며 ‘내트럭프랜즈’ 시스템을 론칭했다. 인터넷을 이용해 ‘화주(貨主)-차주(車主)’로 이어지는 단일화된 거래구조를 만들었던 것. ‘화주-물류업체-운송업체-차주’로 이어지는 다단계 물류체계를 개선할 수 있는 혁신적 아이템이었다. SK에너지는 성공을 자신했다. 화주, 차주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자체 분석도 있었다. 내트럭프랜즈를 이용하면 화주는 값싼 배송료를 지불하고, 차주도 정상적 운송료 수수가 가능했다.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도 혁신사례라며 박수를 쳤고, 정책적 지원을 약속했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 서비스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지 오래다. 현재 회원 수는 고작 6500여 명. 론칭 당시와 비교했을 때 별반 차이가 없다. 하루 거래건수 또한 2000건에 불과하다. SK에너지가 분석한 실패 이유는 간단하다. “다단계 물류체계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게 패착이었다”는 것. 무엇보다 차주는 인터넷에 능숙하지 않았다. 다단계로 수수료를 챙겨야 하는 주선 및 알선업체들은 이 서비스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물류자회사를 가진 대기업 화주들도 굳이 이 서비스를 이용할 까닭이 없었다. 자신들의 물류자회사를 이용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내트럭프랜즈 시스템에 가입한 회원 모두가 차주다. 화주와 주선업자들은 단 한 명도 가입하지 않았다. SK에너지는 현재 화주-차주의 직거래 구조에 주선 및 알선업자를 끼워 넣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SK에너지 오세진 과장은 “4~5단계에 달하는 다단계 구조를 조금이나마 타파했다는 데 만족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 물류기업 대한통운도 다단계 물류체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대한통운은 2003년 사이버 운송주선 시스템을 도입했다. SI업체 대우정보시스템이 13개월 동안 15억원의 개발비를 투자해 구축한 시스템이었다. 이 역시 화주와 차주를 한 번에 연결하는 구조였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시스템이 활성화되면 4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대한통운의 이 시스템도 현재 유명무실한 상태. 접속률은 제로에 가깝다. 대한통운 조정훈 과장은 “다단계 물류구조를 잘 살펴보면 화주, 주선업체들이 각 단계에서 숨쉬면서 이윤을 남기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며 “이 때문에 단계를 강제적으로 없애면 반드시 음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제도개선과 함께 정부의 적극적인 단속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덧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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