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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있기에 청춘 갉아먹는다

희망 있기에 청춘 갉아먹는다

노량진 하면 으레 수산시장이 떠오른다. 하지만 공시족(공무원 7급·9급 준비생들)에게 노량진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들에게 노량진은 ‘공시촌’(公試村)이다. 신림동에 행정고시·사법시험 등을 준비하는 공시촌이 형성돼 있다면, 노량진에는 공무원 7급·9급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촌이 넓게 형성돼 있다. 공시촌은 인터넷 용어도, 속어도 아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는 의미로,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다. 그만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노량진역 맞은편에 형성된 공시촌에는 고시원·독서실 187개, 고시학원 60여 개가 줄지어 있다. 크고 작은 고시학원들의 간판이 빌딩 옆구리 혹은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다. 점심시간이면 이들 학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공시족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밤에는 공시족과 대학 재수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현재 노량진 공시촌에서 7급·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공시족은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정열적으로 일할 청춘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만의 특이한 세태, 아니 어쩌면 우울한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제 노량진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험생들로 항상 북새통을 이룬다. 그러나 합격자가 있으면 불합격자도 있는 법. 혹자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공부하던 책을 후배들에게 전해 주고는 공시촌을 떠난다. 이들에게 노량진은 ‘기회의 땅’이다. 다른 혹자는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공시에 고배를 마신 후 쓸쓸하게 노량진을 떠난 사람도 많다. 이들에게 노량진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일 것이다. 노량진 공시촌은 이처럼 희망이 뜨면서 동시에 지기도 하는 애환의 공간이다. 노량진 공시촌 근방에는 사육신공원이 있다. 사육신공원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죽임을 당한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등 조선시대 충신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 고위공무원들의(?) 묘라고 할 수 있다. 사육신공원과 노량진 공시촌 사이에 논리적 인과관계는 없다. 그러나 사육신공원은 노량진 공시촌 수험생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국에서 모인 수험생 북새통
어떤 수험생들은 사육신공원에 절대 가지 않는다. 사육신이 충신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말로가 화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어느 수퍼마켓 앞 벤치에 앉으면 3년 동안 시험에 붙지 못한다는 등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수험생들의 입을 통해 공시촌 거리를 떠다닌다. 개인의 노력 여하와 상관없는 ‘공무원 합격’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은 공시촌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문화다. 노량진 공시촌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98년 IMF 때부터다. IMF 시절, 구조조정 태풍이 불어 실업자가 양산됐다. 하지만 신분보장을 받는 공무원들은 구조조정 태풍을 맞지 않고 철밥통을 유지했다. 그에 따라 공무원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때마침 공무원 학원이 적지 않게 있었던 노량진에 공시촌이 형성된 것이다. 노량진 공시촌이 활성화된 데는 지방대 출신들의 상경도 큰 역할을 했다.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고 공무원 9급시험 준비를 위해 2년째 공시촌에서 생활하는 박인경(27)씨는 자신이 다닌 대학의 도서관에는 공무원 수험서를 보는 학생이 80% 이상이었다고 말했다. “공무원 시험이 임박했다는 것을 대학도서관에 가면 확실히 느낄 수 있어요. 다른 책을 보는 사람을 찾기가 정말 어렵거든요. 학생 대부분이 공무원 9급 수험서를 보고 있어요. 그러다 시험기간이 끝나면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지죠.”
지방대 학생 10명 중 8명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과장만은 아니다. 그러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모든 지방대 학생이 공시촌을 찾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박인경씨도 고민했다고 한다. “부모님한테 계속 경제적 부담을 줘야 한다는 게 미안해서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어요. 실제로 몇 달간은 동영상 강의를 들으면서 혼자 공부했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의지도 약해지고, 정보도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공시촌 생활을 하기로 했죠.” 처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먼저 종합반에 등록한다. 2개월 동안 종합반 수업을 들은 후에는 단과반 수업을 듣는다. 종합반은 큰 그림을 그려줄 뿐 세부적인 공부는 단과반에서 다시 해야 한다. 학원 수강료와 고시원 임차료, 밥값 등을 합하면 한 달에 대략 90만원 정도 든다. 이것도 최대한 아껴 쓴 비용이다. 노량진 공시촌엔 지방대 출신만 있는 게 아니다. 최근엔 서울 상위권 대학 출신 수험생들도 눈에 띄게 늘었다. 공무원 7급 시험을 준비하는 비율이 지방대 출신 학생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지만, 7급을 포기하고 9급 시험만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공무원 시험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베리타스M고시학원 정종기 차장은 “고시학원을 찾는 상위권 대학 졸업자 중에는 처음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많다”며 “하지만 공시의 높은 벽을 느끼면 의기소침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시험 몇 개월 전에 찾아와서 빨리 합격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죠.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에 대해서도 한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시험을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그래서 7급을 준비하다 9급으로 마음을 돌리는 사람이 생기는 겁니다. 공무원을 원하는 사람이 많고, 열심히 하기 때문에 9급이 7급보다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고 할 수 없어요. 만만하게 보고 들어왔다가는 좌절감만 키우게 됩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면 자만심부터 버려야 합니다.” 실제 공시에 붙기 위해선 최소 1년6개월은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만 합격선에 가까워진다는 게 노량진 학원 강사들의 일관된 견해다. 고급인력들의 과도한 공무원 지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들을 흡수할 수 있는 고용 대책이 없는 한 이런 움직임은 당분간 계속되리라는 것이 고시학원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판단이다. 매년 9월이 되면 대부분의 공시가 끝난다. 하지만 공시족들은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여차하면 내년에도 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시촌에서 생활하는 수험생들이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공시촌의 비수기라고 할 수 있는 9, 10, 11월이 되면 공시촌의 유동인구는 크게 준다. 고시학원 관계자에 따르면 많게는 50% 이상 줄어든다고 한다. 시험이 코앞에 다가온 1, 2, 3, 4월에는 고시원의 빈방을 찾는 것이 어렵지만, 현재는 빈방이 꽤 많다. 이 시기에 합격하지 못한 많은 수험생이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간다. ‘몸보신’ 하러 간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공시촌 생활에 질렸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공시촌은 다시 활기를 찾는다. 그래서 고시 학원가에서는 ‘찬바람이 불면, 발등에 불 떨어졌다’는 말이 정설처럼 나돈다. 대부분 수험생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야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시험 준비를 하지만, 그때는 충분한 준비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수험생들의 이런 패턴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경쟁률은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시험 준비를 꾸준히 하는 사람은 50~60% 정도다.
서울 상위권 대학 출신도 많아

▶노량진 공시촌의 고시원 내부.

겉으론 공시족을 자처(?)하면서 술과 연애에 빠져 있는 사람도 많다. 극단적인 경우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다. 노량진 근처의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에 가면 함께 공부하는 커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부분 함께 스터디하다 만나 커플이 된 경우다. 공시촌의 스터디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공부 스터디’다. 부족한 부분을 서로 메워주고, 비교적 강제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공부 스터디’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두 번째는 ‘밥터디’다. 혼자서 밥 먹는 것이 싫으면 ‘밥터디’에 참가하면 된다. 쉬는 시간에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다. 마지막이 ‘생활스터디’다. ‘생활스터디’는 ‘공부스터디’와 ‘밥터디’가 합쳐진 형태다. 아침 기상시간에 서로 모닝콜을 해 주고, 학원 출석을 체크해 주기도 한다. ‘생활스터디’에 참가하면 일어나서 잠자기 전까지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커플이 제일 많이 만들어지는 스터디가 바로 ‘생활스터디’다. 그러나 연애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자신의 생활패턴에 연인이 맞춰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아 다툼도 생긴다. 경제적 부담 역시 만만치 않다. 일부지만 외모에 신경 쓰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수험생도 있다. 부정적 영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외롭고 힘들 때, 위로하고 격려해 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다. 연애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우울증이다. 창문이 없는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수험생들은 우울증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5년째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정상수(32)씨는 시험 준비 2년째 되던 해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았다. PC방과 만화방을 전전하며 시간을 하릴없이 보냈다. 시험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시험 날짜를 기다렸고, 분명히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합격 날짜를 기다렸다. 스스로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하는 괴로운 마음에 공시촌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시험이 다가오면 습관적으로 공시촌을 다시 찾았다. 이를테면 ‘공시 중독현상’이다. 우울증을 겪는 대부분의 수험생은 같은 처지에 있는 주변 수험생들에게 쉽게 기댄다. 그러나 그것은 주변의 다른 수험생들에게까지 손해를 끼치는 일이다.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상수씨는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운동을 시작했다. 규칙적으로 운동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고, 마음을 다스렸다. 오랜 공시촌 생활로 허약해진 몸도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공시촌 주변에는 수험생과 고시학원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헬스클럽이 성행하고 있다. 한 달 회원권은 일반 헬스클럽보다 훨씬 저렴하다. 저녁 시간 헬스클럽은 빈자리가 거의 없다. 정씨는 계속된 실패로 큰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지만, 올해는 직렬을 바꾸어 지원했고, 현재는 필기시험에 합격해 면접을 기다리고 있다. 노량진 공시촌의 분위기는 요즘 좀 흉흉한 편이다. 공무원 채용 감소 소문 때문이다. 오래 공부한 장기수들은 애간장이 탄다고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그래도 노량진 공시촌의 밤은 여전히 환하다. 공시족들이 늦은 밤까지 공부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쉬움과 탄식, 희망과 환호가 공존하는 노량진 공시촌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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