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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여행이 가장 힘들어요”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여행이 가장 힘들어요”

어느덧 신영복 교수(성공회대 석좌교수·68)가 출소한 지 20년이 흘렀다. 출소하던 해에 ‘인간이 인간일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인간으로 사는 길을 고민하는’ 저 감동의 명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태어났으니, 그 출간 20주년이기도 하다. 지난 8월 27일 아트선재센터에서 출감 및 출간 20주년 기념 ‘신영복 북 콘서트’가 열렸다. 무고한 옥살이에서 놓여난 것을 ‘기념’이라 부르고, 그 ‘무고’를 덮고 천재일우의 ‘귀환’을 축하하는 아이러니가 묘했다. 출판사 측이 마련한 선물도 멋졌다. 신 교수의 옛 글에 학교 동료 조병은 교수의 영문 번역을 붙이고, 김세현 화백의 일러스트를 합해 해맑은 동심이 뚝뚝 묻어나는 그림동화책 『청구회 추억』을 상재한 것이다(박스 글 참조). 조촐하고 화기애애하면서도 뜨거운 자리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이미 ‘이 시대의 잠언’이다. 어떤 이는 책에서 용기를 배우고, 어떤 이는 책에서 위안을 얻었다. 어떤 이는 책 속에서 길을 만났다. 또 어떤 이들은 책을 통해 모여서 서로를 감싸는 울타리가 되었다. 저 따뜻한 경험들이 무대 위에서 낭송으로 모였다. 프랑스 유학 시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붙들고 미망의 강을 건넜다는 피아니스트 조은아씨는 ‘절반과 동반’의 이야기를 빌렸다. “절반은 불완전해 보여도 온전한 것들 사이에서 매개가 된다. 절반을 매개로 온전한 동반이 이뤄진다.” 조씨가 연주한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 꼭 그랬다. 그녀의 손가락은 주로 검은 건반 위에서 노닐었는데, 저 반음과 온음의 하모니로 흡사 건반 위에서 나비 떼가 날아오르는 듯했다. 마지막 손님으로 가수 강산에. 자유분방하고 유쾌한 무대였다. 오랜 구속의 세월을 지낸 신 교수와 어디에도 구속의 이미지가 묻어 있지 않은 장난꾸러기 록가수의 강렬한 콘트라스트. 둘의 우정이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세상 많이 달라졌지요? 감옥 안과 밖, 무엇이 가장 다르던가요? “음, 일단 감옥 안에는 택시가 없지요(웃음). ‘감옥은 바깥 사람들에게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만드는 정치적 장치’라는 미셸 푸코의 지적이 생각납니다. 감옥에서는 일체의 정보를 차단하니까, 아무래도 자기 내면으로 파고들어가는 추론을 주로 하게 되지요. 바깥은 정보의 홍수예요. 어쩌면 바깥 세상이 오히려 정보에 갇힌 것은 아닌가, 현대인이 정보의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히려 판단에 방해가 되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정보에 눈 감으면 경쟁에 뒤처지게 될 텐데요? “모순이지요. 그래서 ‘내로 캐스팅(Narrow Casting)’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좁고 진지하게. 지혜롭게. 그러면서 되도록 유유자적하게.”

-유유자적하기에는 요즈음 세상이 너무 급박하지 않은가요? “어렵지요. 국민경제의 카테고리가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것은 금융자본이에요. 산업자본 개념에서는 생산과 소비, 공급과 수요가 서로 맞물려 경제를 꾸려갔는데, 금융자본은 계속 삼켜야 사는 운명이지요. 상호기능이 없어요.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할까요? M&A가 끝나면 그 다음에는 무얼 할 수 있을까요?”

-정치 문제도 작지 않습니다. 조용하던 천주교·불교 교단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군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새로운 세대가 사회로 진입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문화와 인식, 감성의 변화가 이뤄졌는데, 이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촛불 자체가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촛불이 뭘 비추나요? 미국산 소머리를 비추는 게 아니죠. 바로 우리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고 대답하고 싶어요. 낡은 패러다임과 그런 구조를 비추는 것 아닌가 하는.”

-그래서 뭘 얻을 수 있을까요? “낡은 틀에 갇힌 형식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프랑스의 68혁명은 낡은 체제와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이었지요. 정부의 강경진압은 전국적인 반발로 이어졌고, 급기야 의회를 해산하고 군대까지 동원하게 됩니다. 프랑스 철학이 현대 철학을 주도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68의 성과일 겁니다. 라캉, 들뢰즈, 가타리 등 68의 세례를 받은 철학자가 세계적으로 목소리를 내게 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설명을 좀 해주세요. “현대 프랑스의 특징으로 꼽히는 톨레랑스가 좋은 예입니다. ‘나와 다른 남에 대한 관용’쯤 될까요. 톨레랑스는 다양성이고 공존이에요. 대접 받기 위해 대접한다고 할까요. 그러면서 언젠가는 저들을 나의 가치관 안으로 안아 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하고요. 그러기 위해서 내 안에 있는 낡은 가치를 스스로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지요.”

▶가수 강산에씨가 ‘신영복 북 콘서트’에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머리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신영복 교수는 1963년과 65년 서울대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를 하던 중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다. 영어의 몸으로 20년 20일을 지낸 뒤 88년 8·15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성공회대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고전강독 등을 강의하고 있다. 출소 10년 만에 사면·복권되어 98년 5월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로 임용되었고, 2006년 말 정년 퇴임했다가 다시 석좌교수로서 교편을 잡고 있다. 출소 기념으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출간되었고, 96~98년에는 중앙일보와 함께 국내와 해외를 돌아보는 평생 첫 외유를 가졌다. 허난설헌의 묘와 백담사, 이어도, 청령포 등 국내 기행은 『나무야 나무야』(96년)로, 유럽과 아메리카, 인도,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도는 세계 기행은 『더불어숲』 1, 2권(98년)으로 묶였다. 마음이 전하는 느낌은 세계 공통이던가. 아프리카 아이들이 생면부지의 신 교수에게 달려드는 한 컷의 사진은 정겹고도 뭉클하다. 『사람아 아! 사람아』(91년) 『루쉰전』(92년) 『중국역대시가선집』(94년) 등의 역서가 있고, 2004년에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을 집필했다.

-2006년에 정년퇴임 하셨는데 계속 학교에 계시네요? “학교에서 석좌교수 자격으로 강의를 열어주었어요. 학생들이 아직은 제 강의를 듣고요(웃음). 9~12월에는 주 1회씩 ‘CEO를 위한 인문공부’ 특강을 마련합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 의문시되는 시대에 학교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희망을 가르치며 함께 기다리는 것입니다. 희망은 견뎌가는 힘입니다. 가시적 성과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소중히 보아야 합니다.”

-만약 감옥에 가지 않으셨다면 어떤 삶을 사셨을지 궁금합니다. “옥중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래요. 그 사건 아니었어도, 어차피 그 다음 언젠가 필요할 때 집어넣었을 거라고. 역사를 보면, 별로 한 일이 없더라도 교도소를 채우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마 내가 그 역할이 아니었나 싶어요.”

-무고한 형을 살았는데, 억울함이나 분노로 치가 떨린 적은 없었나요? “무기수, 사형수들과 섞여 지내다 보니 정말 억울한 인생이 무엇인지, 참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어요. 목수가 있었는데, 집을 그릴 때 주춧돌과 기둥부터 그리는 거예요. 흔히는 지붕부터 그리는데, 목수의 그림은 집 짓는 순서와 같았던 거죠. 아는 것과 보는 것은 그렇게 다릅니다. 그때부터 막연히 머리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주위의 사람들을 깊이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그 삶의 뿌리들. 그로 인해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복역을 통해 덕을 본 것도 있을까요? “글씨와 고전 공부는 감옥의 인연을 보았겠지요. 바깥이었으면 다른 일 하느라 글씨를 그만큼 쓰지 못했을 테니까. 좋은 스승들도 감옥에서 만나 뵈었고요. 그리고 출소할 때 그런 생각을 조금 했어요. 내가 그래도 조금은 자기 개조를 이루었다고 보아도 되지 않겠나, 그게 마음의 위안이 되었어요.” 북 콘서트에서 신영복 교수는 답사의 마이크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사람이 하는 여행 중에 가장 멀고 힘든 것이 뭔지 아세요?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여행입니다.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 가는 여행이고요.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서 가슴으로 느끼는 것, 실천하는 것 말입니다.”

▶신영복 교수가 지인들과 공연을 즐기며 박수를 치고 있다.



40년 만에 돌이켜보는 ‘청구회 추억’

“1966년 이른 봄철 서울대학교 문학회의 초대를 받고 회원 20여 명과 함께 서오릉으로 한나절의 답청(踏靑)놀이에 섞이게 되었다.” 『청구회 추억』의 첫머리다. 스물여섯 젊은 강사와 20대 초반 제자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소풍을 간다. 몇 걸음 앞에서 남루한 행색의 꼬마 여섯이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 든 보자기 자락에는 냄비 손잡이가 삐죽 삐져나와 있었다. 청년 신영복은 봄놀이 꼬마들에게서 춘궁(春窮)을 떠올린다. 안쓰러움 때문이었을까. 신영복과 소년들 사이에 우정이 싹튼다. 씨름도 가르쳐주고, 석상 앞에서 함께 사진도 찍고, 헤어질 즈음에는 소년들에게서 진달래 꽃다발 선물도 받는다. 그게 모임이 되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 6시, ‘청구회’. 같이 걷고, 이야기 하고, 매달 100원씩 적금도 붓는다. 이듬해에는 육사 생도와 이화여대 제자들을 합류시켜 소년들과 함께 소풍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러나 가난한,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소년들이었다. 등록금이 없어서 중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 신영복은 고뇌한다. ‘저 아이들의 수업료를 내가 조달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머리는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사유하기를 강요하는데, 눈앞에는 초등학교 7학년 8학년들의 위축된 모습이 일렁거린다. 매달 붓는 100원씩의 적금이란 것이 훗날 어떤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일까. 『청구회 추억』은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쓰인다. 68년 7월 구속되어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69년 1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이송된 뒤 그해 11월 대법원에서 원심이 파기되기까지 사형수의 몸으로 쓴 글이다. 사형을 앞두고 신영복은 지키지 못한 약속은 없었나, 깊은 반성과 회한의 시간을 갖는데, 그 하나가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청구회 소년들이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 장충체육관 입구에서 영문도 모르는 바람을 맞으면서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룻바닥에 엎드려 쓰기 시작했다.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 휴지 위에.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서오릉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그러다가 무기징역 감형 확정과 함께 갑자기 감옥을 옮겨야 했을 때, 신영복은 황급히 근처의 헌병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메모묶음을 부탁했다. 집에 전해 주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그냥 가져도 좋다면서. “그리고 어둡고 긴 무기징역의 터널로 걸어 들어갔다. 휴지묶음과 청구회는 망각되었다.”『청구회 추억』은 93년 출간된 『신영복의 엽서』에 처음 실렸다. 『신영복의 엽서』는 그의 옥중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완결편에 해당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누락되었던, 또는 뒤늦게 발견된 기록들이 『신영복의 엽서』 안에 친필 쪽지 그대로 영인되어 담겼다. 신영복의 부재가 안타까워 글·글씨·그림들을 나눠가졌던 친구들이 원본을 본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많은 사람이 다같이 볼 수 있도록’ 책으로 내기로 한 것이다. ‘청구회 추억’의 휴지묶음도 『신영복의 엽서』에 담기었다. 그러나 청구회 아이들 소식은 오리무중이다. 삶에 쫓기느라 여유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힘든 삶을 살면서 그 힘듦을 보여주기 싫어서였을까. 혹여 누군가는 어느 무기수의 출옥 뉴스며 책 따위는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민초 무지렁이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밝고 맑은 시퀀스만 남기고 사라진 ‘청구회 추억’. 그 추억이 영화화된다. 제작비 일부가 이미 모아졌고, 시나리오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청구회 이야기가 스크린에 걸리고, 인구에 회자될 즈음이면, 뒤늦은 재회의 자리는 가능할까. 부디 가능하기를. 『청구회 추억』 신영복 글/조병은 영역/김세현 그림, 돌베개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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